제389화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지크와 라일라가 윌터, 엘리와 안면을 튼 지 며칠 후였다.
정원에서 마주친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윌터와 엘리는 지크 일행과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지크 일행이 머무는 곳은 상당히 고급 숙소로 당연히 그 숙박 비용도 만만치 않은 곳이다.
아무리 소중한 자식들이라지만 이런 등급의 숙소에 아이들을 계속 머무르게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늑대의 송곳니’의 벌이가 상당히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면이 있는 채로 오며가며 얼굴을 계속 부딪친 탓일까. 지크 일행과 윌터, 엘리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숙소의 정원.
도시의 현재 사정 때문에 숙박 인원이 적은 터라, 오늘도 정원은 인적이 드물었다.
그 정원의 중앙에서 지크와 한스, 스녹이 아이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어디서 꺾은 건지 자신의 팔만 한 길이의 나뭇가지를 꼭 쥐고 윌터와 엘리가 세 명을 노려본다.
그 시선이 가소로운지 팔짱을 낀 채 가장 앞에 서 있던 지크가 코웃음을 쳤다.
“우하하하하! 건방진 것들! 감히 나 대마왕 지크 님에게 덤비다니! 겁도 없는 놈들이구나!”
과장되게 웃으며 심술궂은 표정을 내보인다. 그의 옆에는 아이들과 같이 그의 팔 길이만 한 나뭇가지가 꽂혀 있었다.
“좋다! 그 용기를 찬양하며 내가 직접 상대해주마!”
지크가 마치 전설의 마검이라도 뽑는 양 나뭇가지를 천천히 뽑아 아이들에게 겨눴다.
아이들도 비장한 표정으로 -물론 비장감이 들기는커녕 귀엽기만 했지만- 나뭇가지를 검처럼 내밀었다.
“대마왕! 너의 악행도 이걸로 끝이다!”
“끝이다!”
윌터가 먼저 말하고 엘리가 따라 외친다. 지크는 그 소리를 듣고 한층 더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내 악행이 끝이라고? 허튼소리! 내 악행은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용사, 네 녀석의 실력은 제법이더군. 그러니 이 자비로운 대마왕께서 기회를 한 번 주마. 내 부하가 돼라!”
“그럴 수 없다!”
“맞아!”
윌터와 엘리가 당당하게 외쳤다.
“대가는 숙소 맞은편 주스 가게의 달콤한 주스다!”
“어, 진짜?”
대번에 윌터가 흔들렸다. 방금까지 굳게 지크를 겨누고 있던 그의 나뭇가지가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대마왕은 거짓말 안 한다! 그것도 한 달 동안 매일매일 사주마!”
“한 달?”
윌터 뒤에 있던 엘리마저 흔들렸다. 둘의 눈이 말라버린 물웅덩이에서 삶을 찾아 펄떡거리는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서 라일라와 함께 구경하고 있던 엘레나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어떡하죠, 스승님? 세계가 위험에 빠진 것 같아요.”
“과연 대마왕. 쓰는 술수가 비열하기 그지없네.”
라일라도 웃음기를 머금었다.
다행히 두 어린 용사는 비열한 대마왕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았다.
당당한 목소리로 거절 의사를 밝힌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진한 아쉬움이 남아있다는 것에, 라일라와 엘레나는 상냥하게 눈을 돌렸다.
“간다!”
“이야앗!”
아이들이 지크에게 달려든다. 당연히 예닐곱 먹은 아이들이 휘두르는 막대기 따위는 지크에게 바닥을 기어가는 개미의 다리 움직임만큼이나 의미 없다.
하지만 지크는 아이들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는 것처럼 움직였다.
“크윽! 설마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니!”
“아빠한테 배운 검술이 어떠냐!”
“대단하지!”
실제로 둘의 움직임은 다른 일반적인 꼬마들보다는 날랬다. 자라난 환경도 환경인 데다가 그들의 아버지에게 뭔가를 배우기도 한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공격을 받아주길 얼마. 지크가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흥! 제법이구나, 용사들이여! 하지만 나에게는 무서운 부하들이 있다! 너희들이 이 녀석들도 감당할 수 있을까?”
뒤에서 한스와 스녹이 걸어 나왔다. 그들도 이 작은 연극에 꽤 진심으로 임하고 있는지 표정이 진지했다.
쿠우우우!
그건 노웸도 마찬가지. 스녹의 어깨에 두 발로 딛고 서서 앞발을 마치 곰이 위협하는 마냥 들어 올린다.
물론 그것에 겁을 먹은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작은 용사들의 눈이 반짝반짝거리는 게 노웸의 귀여움이 그들의 심장을 직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작은 용사들은 노웸의 귀여움이란 압도적인 폭력에도 굴하지 않았다.
“두 명이 더 늘어난다고 해도 우리가 질 리는 없다!”
“누가 두 명이라고 했지?”
지크는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라일라와 엘레나가 보였다.
“엘레나!”
“네?”
난데없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엘레나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뭐 하는 거냐! 어서 나와서 힘을 보태지 않고!”
엘레나가 눈을 깜박였다. 설마 자신 보고 저기에 끼라고 하는 것일까. 엘레나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보는 건 재미있었지만 자신이 끼어 직접 연극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엘레나가 급히 라일라를 돌아봤다. 역시 이럴 때 믿을 건 스승뿐이다. 열심히 구원을 바라는 눈길을 보냈다.
라일라가 싱긋 웃었다.
“뭐 하니? 어서 가지 않고.”
구원 따위는 없었다. 스승의 명령까지 떨어지자 엘레나는 거부할 수 없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그녀가 힘없이 지크 쪽으로 걸어갔다.
“등장할 때는 대마왕의 부하처럼 등장해야지.”
“대, 대마왕의 부하처럼요? 그거 어떻게 하는 거죠?”
“째진 웃음소리를 내 봐. ‘오호호호호호홋!’, 이렇게.”
“그걸 어떻게 해요!”
“누나, 못 해?”
“언니는 재미없네.”
아이들이 실망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그 순진무구한 눈망울에 엘레나가 한 걸음 물러났다.
순진함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것이었단 말인가. 다시 한번 스승에게 구조의 눈길을 던진 엘레나였지만 느긋하게 손을 흔드는 라일라를 보고는 마지막 희망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 오호…호호호…호….”
“그래! 조금만 더! 배에 힘을 ‘빡!’ 넣고 성대가 찢어져라 목소리를 올린 채 웃는 거야!”
“오호호호호!’
“좋아!”
지크의 칭찬과 아이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지만 엘레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새빨개진 그녀의 얼굴이 새파란 하늘 아래에서 부각됐다.
그 모습을 라일라는 웃으며 지켜봤다.
엘레나를 포함시킨 지크 대마왕 일당은 다시 한번 아이들과 대적하기 시작했다. 누가 전직 마왕 아니랄까 봐 지크의 대마왕 흉내는 실로 엄청났다.
‘그에 비해 정신 연령은 아이들과 비슷한 거 아닐까?’
지금의 모습을 보면 무척이나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간다.
오늘 순찰은 새벽반이다. 저렇게 실컷 논 후, 저녁을 먹고는 도시 바깥으로 순찰을 나갈 것이었다.
하지만 그 예정은 갑자기 들린 종소리에 박살이 났다.
땡! 땡! 땡! 땡!
성벽 여러 망루에 걸려 있는 종들이 하나, 둘 울리기 시작하더니, 곧 시끄러운 화음을 일으키며 도시 내에 소리를 미치도록 흩뿌렸다.
마치 소리 높여 불행을 노래하는 악마의 울음처럼,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길함을 심었다.
한창 마왕 놀이를 하던 지크 일행도 그 소리를 들었다.
“지크!”
라일라가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크도 방금까지의 놀이를 멈추고 굳은 얼굴로 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봤다.
‘좋은 일은 아니겠지.’
고개를 내렸다. 방금까지 활기찬 표정으로 용사 역할을 하던 윌터와 엘리가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라. 웬만하면 바깥으로 나오지 말고.”
“네, 네!”
윌터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고는 옆에 있던 엘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숙소 안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이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한 후,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바로 가까운 성문으로 달려갈까?”
“기다려.”
“그럴 여유가 있어? 상황을 보아하니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그들이 도시와 나눈 계약은 어디까지나 도시 주변을 순찰하는 것까지다. 어떤 변고가 일어난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그들과 상관은 없다.
하지만 지크 일행 그 누구도 지금 일어난 사건을 피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비상종을 울리는 걸 보면 군대가 동원되는 일일 게 뻔해. 그렇다면 도시 자체에서 지휘 체계를 확립하려고 할 거다. 도시 지휘부도 바보가 아니라면 도시 내의 모든 전력을 소집하려고 할 테고. 즉, 도시에서 사람이 올 거란 거야. 우리 힘이 가장 필요한 곳을 알려줄 테니까 일단 기다리는 게 나아.”
지크의 말은 적중해, 얼마 있지 않아 병사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
* * *
병사는 지크 일행을 한 성문으로 안내하며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몬스터들입니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몬스터들이 피알루를 향하고 있다고 해요!”
“얼마나 말입니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전령도 정확히는 파악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고요!”
하지만 이렇게 난리를 치는 걸 보니 그 수가 상당한 건 확실했다.
지크 일행이 도착했을 때 성문에는 이미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단단한 무장을 갖추고 성벽 위로 올라가는 병사가 있는가 하면 필요한 물자를 이동시키는 병사도 있었다.
낮이라 활짝 열려 있어야 할 성문은 거의 닫혀 사람 몇 명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틈만 남겨놨을 뿐, 언제든지 닫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대기해주십시오! 곧 명령권자가 올 겁니다!”
병사는 지크 일행을 성벽 위까지 안내하고는 후다닥 내려갔다.
지크는 성벽 저편을 쳐다봤다. 아직 몬스터들이 보이진 않는다. 이번엔 성벽 바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늑대의 송곳니’의 캠프군.’
하지만 캠프 안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높은 성벽을 세워 놓은 도시조차 긴장할 정도로 많은 몬스터들이 몰려온다고 하는 상황에 성벽 밖 캠프에 계속 주둔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없다. 나름 착실한 방어 준비가 되어 있는 캠프였지만 그래봤자 캠프인 것이다.
지크가 주변을 살필 때 속속 주변 성벽에 병력이 충원되기 시작했다.
군인은 아니었다. 용병들이었다.
‘용병들은 전부 이쪽에 몰아두는 건가?’
지크 일행도 엄밀히 따지면 도시 직속의 병력은 아니었기에 도시 입장에서는 용병과 별 다를 바 없다.
올라온 용병 중에는 ‘늑대의 송곳니’도 있었다. 틸이 닉과 맥스, 부하 몇 명을 이끌고 큰 소리를 치며 성벽 위를 빠르게 걷고 있었다.
“난 ‘늑대의 송곳니’의 단장 틸이다! 도시에서 내게 용병들의 지휘를 맡겼다! 이번 전투에서 내 명령을 듣도록!”
그의 높이 들린 오른손에는 종이 한 장이 펄럭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게 위임장인 모양이었다.
보통 이렇게 용병들을 모아놓고 가장 실력 있는 용병이나 가장 커다란 용병단의 단장에게 지휘권을 주는 건 흔한 일이다.
그렇게 소리를 치며 걷던 틸이 지크를 발견했다.
“아, 지크 님!”
그가 지크에게 다가왔다.
“지크 님도 오셨군요. 이럴 줄 알았다면 지크 님께 지휘권을 양도할 걸 그랬습니다.”
“전 됐습니다. 지휘야 커다란 용병단을 이끌고 계신 틸 씨가 더욱 잘하실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비록 저희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털어버리고 이번엔 같이 싸우도록 합시다. 도시를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지크의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 틸이 미소를 머금었다.
둘은 악수를 나눴다.
“죄송하지만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지휘권을 받은 걸 알려야 하니까요.”
그러며 틸은 다시 큰 소리로 외치며 성벽을 돌아다녔다. 용병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안면이 있던 맥스가 가볍게 묵례를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닉도 지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예전 그와 헤어졌을 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무척 놀랄 일이었다.
‘딸과 놀아줬다는 것 때문에 그런가?’
생각나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다. 예상 이상으로 딸 바보인 모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