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8화
지크가 용병단에 들른 후 며칠이 지났다.
지크 일행은 계속 순찰을 돌며 마주치는 몬스터들을 제거했다. 지크의 넓은 감지 범위에 힘입어 그들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몬스터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전날에는 행정관이 직접 찾아와 역시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며 호들갑을 떨고 돌아갔다.
그러나 산맥에서 내려오는 몬스터들은 줄지 않았다. 사태의 끝은 아직 요원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몬스터의 위험 속에서도, 피알루의 사람들은 오늘이란 날을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지크 일행은 오늘도 몬스터 무리 몇 개를 박살낸 뒤 귀환했다.
전투로 더러워진 몸을 -그래봤자 흙먼지를 조금 뒤집어쓴 정도에 불과했지만- 씻고 휴식을 취한다. 오늘 그들이 배정된 시간대는 동이 트지 않은 새벽부터 정오까지였기에 아직 바깥은 환했다.
전투를 했다지만 지크 일행에게 그 정도 몬스터 따위는 피라미와 다를 바 없는 터라 쌓인 피로는 솔직히 말해 없었다.
엘레나조차도. 그녀도 이 괴물 같은 파티에 적응을 끝낸 것이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각.
거기에 피로가 쌓인 것도 아니니 지크 일행 중 잠을 청하는 이는 없었다. 각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냈다.
그중 지크와 라일라는 숙소 뒤편에 나와 있었다.
그곳은 숙소에서 꾸며 놓은 꽤 규모 있는 정원이었다.
과연 고급 숙소의 이름값은 어디로 가지 않는지 그곳은 상당히 잘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잔디가 깔려 있고 가에 심어진 울창한 나무들이 자연스레 바깥의 시선을 가린다. 곳곳엔 꽃이 심어져 있고 손님들이 쉴 테이블과 의자도 부족하지 않게 설치되어 있었다.
‘역시 썩어도 무역도시로군.’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지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가격이 높은 고급 숙소라지만 도시 자체의 경제력이 높지 않은 이상 이런 숙소는 있을 수 없다.
그걸 생각하면, 아무리 무역도시 중에서도 급이 딸리는 피알루라지만 무역도시는 무역도시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역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몬스터의 습격 때문인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투숙객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아, 행복하다.”
라일라가 테이블에 늘어졌다. 숙소에서 타 준 차 한 잔을 홀짝이며 따뜻한 햇살 아래 몸을 데우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피로가 쫙 풀리는 것 같아.”
“네가 고작 그것 가지고 피로가 쌓일 리가 있냐.”
“시끄러. 정신적인 피로라고. 요 근래 계속 몬스터만 때려잡고 다녔잖아.”
그러면서 테이블에 뺨을 늘어뜨린다.
“확실히 그렇겠군. 나이가 많으면 보통 피로가 빨리 오는 법이지.”
“누가 나이가 많다는 거야!”
“너 말이다, 너. 아무리 못해도 네 자리 수는 훨씬 넘지 않냐?”
라일라가 눈을 부라린다.
하지만 씨근덕거릴 뿐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클로원의 공주, 그것도 초대 황제의 딸이라는 정체가 밝혀진 이상 그녀는 이 세상에 사는 그 어떤 인간들보다도 나이가 많은 것이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예전의 그것까지 합치면 보기보다 훨씬 나이 많으면서!”
예전의 그것이라면 회귀 전을 말함이다.
“그리고 나는 내내 잠들어 있었다고! 그걸 나이로 치는 게 이상한 거지!”
“그래그래. 어르신의 말씀 잘 들었다. 그게 연륜이라는 그거지?”
“으으으!”
이를 부득부득 갈며 지크를 노려본다. 하지만 지크는 얄미울 정도로 쾌활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콱 불덩이라도 던질까 보다.”
“효과는 있겠네. 맞는다면의 얘기지만.”
뻔뻔한 지크의 얼굴을 보며 혀를 날름거리고는 라일라는 다시 얼굴을 테이블에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지크는 자신 몫의 차를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확실히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어.’
정확히 말하면 자신 앞에서 흐트러지며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이 많아졌다.
계기는 아마도 예전의 고백. 저게 라일라 특유의 친근감을 표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렇게 지크와 라일라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아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이런 시간이 라일라는 너무 좋았다.
사소한 일상 하나하나를 내뱉으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꼭 이럴 때 훼방을 놓는 인간은 있는 법이다.”
“저기….”
누군가 테이블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라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모습으로 쭈뼛거리고 있는 남성 한 명이 있었다.
라일라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용건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래도 혹시 모른다. 다른 중요한 용건을 가진 사람일 확률도 적지만 존재한다. 무척이나 희소한 확률이지만.
때문에 라일라는 일단은 예의 있게 그에게 용건을 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의 예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라일라의 예의 있는 태도에 자신감이 샘솟은 것일까. 남성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혹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신데요?”
“아, 그게 말이죠.”
남성이 잠시 헛기침을 했다.
“너무도 아름다우신 분이셔서 저도 모르게 말을 걸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같이 차라도….”
판에 박힌 말. 벌써 몇 십, 몇 백 번을 들었는지 모를 말이다. 역시 뭔가 중요한 용건으로 찾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라일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죄송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요.”
그래도 처음은 웃는 낯으로 거절했다. 하지만 라일라도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크도 알고 있었다.
저 한 마디로 돌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니, 근처에 정말로 괜찮은 찻집을 알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같이 식사 한번 어떠십니까? 피알루의 명물을 잘하는 집이….”
“됐어요.”
예절 바른 거절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 방금 전까지의, 얼마 남지 않은 가식도 던져버리고 라일라가 차갑게 끊었다.
갑자기 변한 라일라의 태도에 사내가 당황했다. 방해꾼을 보는 것 같은 라일라의 싸늘한 눈빛이 사내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사내는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끈질기다. 하지만 예상되던 일이기도 했다.
지크는 라일라를 쳐다봤다. 처음의 가식적인 표정을 벗어던지고 손등으로 얼굴을 괸 채 대놓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보통 아무리 미인이라도 저렇게 인상을 찌푸릴 때는 못난 곳이 보이기도 하건만. 정말로 라일라는 단 하나의 흠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러니 맞은편에 나라는 사람이 앉아 있는데도 무턱대고 들이댔겠지.’
“다시 한번 생각….”
“생각 없다니까요.”
그리고 라일라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뗐다. 마치 사내와의 얇디얇은 인연조차 자비 없이 끊어버린다는 태도다.
당연히 라일라에게 무척이나 깊은 호감을 가지고 접근한 남성에게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충격을 주는 행동이었다.
“그, 그러지 마시고….”
사내는 저도 모르게 라일라의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어쩜 저렇게 라일라에게 접근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경로를 밟아가는지, 혹 짜기라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이.”
지금껏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지크가 입을 열었다.
사내의 시선이 지크를 향했다.
그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사내가 첫눈에 반한, 여신과도 같은 여성과 일행인 자다. 자신을 향해 귀찮다는 눈빛을 보낸 그녀가 저놈에게만은 방긋방긋 미소까지 지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목격했다.
당연히 질투심이 폭발했다. 마치 온몸을 부풀려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려는 짐승처럼 사내는 어깨를 한껏 펴고 지크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압박이라도 하려는 듯 지크를 노려봤다.
그러려 했다.
‘응?’
사내는 문득 자신의 등허리가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이빨이 딱딱 부딪치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물러서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무엇보다 지크의 눈에서 시선을 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눈을 떼는 순간이 바로 자신의 인생이 끝날 것만 같았다.
사내가 이상 현상을 느낀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꺼져.”
지크의 무감정한 말에 사내는 대꾸조차 제대로 못 하고 도망갔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지 가면서 몇 번이나 넘어졌지만 그는 비명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 한 채 필사적으로 정원에서 사라졌다.
지크와 라일라의 주변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처음부터 도와주면 안 돼?”
라일라가 투덜거렸다.
“저런 놈들은 당사자가 확실히 끊어버려야 해. 내가 나서는 건 그 다음. 처음부터 내가 나섰다간 괜히 너를 속박하느니, 나보단 제가 더 어울린다느니 개소리를 지껄일 놈들이 많으니까.”
“그거야 방금처럼 쫓아내면 되잖아.”
“이거 큰일 날 녀석이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에게 압박을 넣으라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없는 거냐?”
라일라의 손이 살그머니 펴졌다.
마력이 유동되는 게 당장이라도 지크의 얼굴에 불덩이라도 처넣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지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포기했다. 불덩이 몇 개 처넣는다고 저 강철 상이 사라지진 않을 테니까.
“하여간, 요 근래 더 그러는 것 같은 느낌이야.”
라일라가 다시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투덜거렸다. 지크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랑을 하면 더 예뻐진다고 하던가?’
그저 속설인지 아니면 뭔가 근거가 있는 말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라일라가 예전보다 훨씬 더 생기 있게 보이는 건 확실하다.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지크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라일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응? 무슨 일이야? 혹시 반했어?”
“하긴, 그 나이 먹었으면 슬슬 치매가 올 때쯤 됐지. 걱정 마라. 난 다 이해하마.”
“진짜로 한 방 날려버릴까.”
그렇게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크와 라일라는 서로간의 잡담을 계속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크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에 따라 라일라의 시선도 자연스레 옆으로 향했다.
그들의 테이블과 조금 떨어진 곳에 인영이 보였다.
설마 아까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지는 것인가. 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뭔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옆에 서 있는 인영의 덩치가 무척이나 작았던 것이다.
‘아이들?’
라일라로서는 처음 본 아이 둘이 거기 있었다. 남자아이 한 명과 여자아이 한 명.
라일라가 찌푸렸던 눈썹을 황급히 폈다.
“너희들은 누구니?”
대답은 지크에게서 돌아왔다.
“‘늑대의 송곳니’의 단장과 부단장의 자식들이야.”
“아, 저번에 말했던 그?”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절로 사랑스러움이 느껴진다.
도저히 험악한 용병의 아이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아이들은 제대로 키우는 모양이네.’
지크에게 틸과 닉이 자식을 데리고 다니며 용병 일을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던가.
당연히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 수나 있을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직접 만나본 아이들은 예상보다 무척 번듯했다.
겉보기로는 최소 중산층 이상의 자제들 같다. 옷도 단정하고 피부도 깨끗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구김살이 없어 보였다.
“무슨 볼 일이 있니?”
라일라를 본 아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예쁜 누나다!”
“응응! 내가 본 언니들 중 제일 예뻐!”
“어머! 고마워라.”
라일라가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언니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니?”
그 말에 틸의 아들, 윌터가 지크를 가리켰다.
“며칠 전에 아빠네 용병단에서 저 아저씨를 본 적이 있어서요!”
아무래도 그때 봤던 지크를 다시 보게 되자 호기심에 접근하게 된 모양이었다.
“아저씨도 아빠 동료예요?”
닉의 딸인 엘리가 물었다. 지크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나는 아저씨가 아니란다. 오빠야. 그리고 아가씨 아빠 동료는 아니야. 알겠니?”
“응, 아저씨!”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라일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비웃음이 걸렸다.
“역시 아이들이야. 사람 볼 줄 안다니까.”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서는 무척이나 깨끗한 웃음을 보였다.
“저 아저씨의 말처럼 아저씨는 너희 아빠의 동료가 아니야. 이 언니의 동료란다.”
아저씨와 언니란 단어에 포인트를 주는 걸 봐서는 아까 말했던 나이의 언급에 대한 복수가 분명했다.
지크는 기분 나쁜 듯 혀를 찼다. 앞에 있는, 반쯤 식은 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렇게 지금 피알루에 닥친 위험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온한 시간이 흘러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데네스트 산맥으로부터 훨씬 더 많은 수의 몬스터 무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