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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384화 (384/628)

제384화

속내와는 달리 첼시의 겉모습은 더 할 나위 없는 신관의 모습이었다. 타인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렌은 이미 첼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이미 수많은 회귀로 그녀의 인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천한 것.’

능력이 뛰어나면 뭐 할까. 외모가 좋으면 뭐 할까. 첼시는 그의 ‘정의로운 용사 파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예비’들 중에서 그나마 좋은 능력과 외모를 갖고 있는 신관은 이 여자밖에 없었다.

물론 첼시를 오래 데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얼른 명성을 올린 후에 더 좋은 녀석으로 갈아 치워야지.’

그렇게 생각하면 루벨라가 아쉽기 짝이 없었다. 능력도 외모도 심성까지,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잘 어울리던 신관이었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녀 하나만 기다리다가 명성을 올릴 기회를 날릴 수는 없다.

무엇보다 지금은 지크 모어라는 눈엣가시 같은 녀석도 착한 일을 한다며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그게 설령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신기루 같은 꿈이라 해도, 그는 반드시 누구에게나 칭송받는 용사가 되어야 했다. 특히 지금처럼 지크 모어가 경쟁자가 된다면 더더욱.

‘차라리 잘됐어. 이번 일을 내가 해결한다면, 내가 지크 모어보다 훨씬 용사다운 사람이라는 증명이 되겠지.’

이번 데네스트 산맥의 몬스터 준동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 시간선에 이 정도 변수는 이젠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짜증이 나지 않을 리도 없다.

그러나 지크와의 경쟁을 불태우는 순간 그 짜증은 스르르 가라앉았다.

정확히는 지크를 눌렀을 때 느낄 희열 때문이었다.

‘아무리 지크 모어라도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보다 이변을 더 빨리 해결할 순 없을 거다.’

그렌은 성벽 너머로 보이는 데네스트 산맥의 봉우리들을 노려봤다.

‘반드시 내가 해결하겠어!’

그렌의 눈에 알 수 없는 집착과 광기가 소용돌이쳤다.

“가자!”

그렌이 일행에게 말했다. 어서 빨리 짐을 내리고 몬스터들을 토벌해야 했다.

양옆에 있는 첼시와 피나의 어깨를 툭 치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는 라라가 있는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라라는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먼저 앞으로 가는 세 명을 쳐다봤다.

그녀가 힘없이 그렌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 * *

그날 밤, 지크는 식사 자리에서 말했다.

“그렌 제너드를 만났다.”

수프를 떠서 입에 가져가려던 라일라가 멈칫했다.

“그 인간을 만났다고? 어디서?”

“성문과 가까운 거리에서. 오늘 들어온 모양이야.”

“무슨 일로 온 거래?”

“말로는 몬스터 토벌과 몬스터 준동의 원인 제거를 위해서라는데, 속내야 모르지.”

라일라는 머리를 짚었다. 그녀도 이 상황에서 그렌 제너드라는, 신경 써야 할 존재가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에 골치가 아팠던 것이다.

“뭔가 특별한 건 없었지?”

“동료가 늘었더군.”

“동료?”

라일라의 시선이 흘끗 엘레나에게 머물렀다. 그녀는 지크의 얘기를 들으면서 음식을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종종 자신의 빵을 뜯어 옆에 있는 노웸에게 주기도 했다.

“누군데?”

“모르는 놈들이야. 첼시 윈드네와 피나 어쿠스라고 했던가?”

엘레나의 몸이 멈칫했다.

“각각 신관과 마법사더군.”

그렇게 말한 지크가 엘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피나 어쿠스란 녀석은 너와 연관이 있던 것 같은데. 어떤 녀석인지 말해줄 수 있나?”

“엘레나와 관련이 있는 녀석이라고?”

라일라가 물었다.

“엘레나가 마법을 잘 사용할 수 있게 됐는지 물어보더군.”

“그래?”

라일라의 시선도 엘레나를 향했다.

두 명의 시선을 받은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탑에서 유명한 사람이었어요. 다음 대 마탑을 이끌어 갈 젊은 마법사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죠.”

스누위크에 있었던 자라면 엘레나를 아는 것도 이상하진 않다. 엘레나는 당시 스누위크에서 유명한 아이였으니까. 비록 나쁜 쪽이긴 했지만.

그러나 엘레나의 태도로 보아 그냥 아는 사이도 아닌 듯 보였다.

“동시에 퀘이럴 학파의 에이스이기도 했죠.”

‘퀘이럴 학파라. 들어봤던 것 같은데….’

하지만 지크가 퀘이럴 학파에 대해 떠올리는 것보다 라일라의 말이 더 빨랐다.

“재위크가가 속해 있던 학파가 퀘이럴 학파 아니었니?”

“맞아요.”

‘그렇군. 거기서 들었었어.’

재위크가. 라일라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얻어 터졌던, 일명 마탑의 수재인 마윈 재위크와 올랜드 드웨인의 술수에 걸려 쿠데타를 주도했던 웨인 재위크의 가문.

‘웨인 재위크가 수장으로 있던 학파가 퀘이럴 학파였어.’

“어쿠스는 웨인 재위크… 님의 외손녀예요. 마윈 재위크와는 사촌이었죠. 그와 함께 미래에 퀘이럴 학파를 이끌어갈 쌍두마차 중 하나로 불렸어요.”

웨인 재위크를 칭할 때 무슨 칭호를 써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흐렸던 엘레나는 일단 ‘님’이란 존칭을 붙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 스누위크 밖으로….”

“스누위크에 머무르기 거북하게 된 거겠지. 외할아버지가 쿠데타의 주범 중 하나니까. 게다가 퀘이럴 학파는 저번 쿠데타에 꽤 열렬히 참여하지 않았나? 그럼 더더욱 껄끄러웠겠지.”

쿠데타 때문에 퀘이럴 학파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사라지진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상처를 치료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리리라.

‘원망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군.’

쿠데타의 주동자는 웨인 재위크지만 그를 뒤에서 교묘하게 조종한 것은 엘레나의 아버지인 올랜드 드웨인이다. 물론 웨인 재위크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그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만큼 다른 이를 원망하는 건 웃기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란 존재는 그 웃기는 일을 숨 쉬듯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나 이것도 추측일 뿐이다. 지크는 일단 피나 어쿠스에 대한 판단을 뒤로 미뤘다.

‘그저 엘레나가 마법사로서의 길을 나아가기 시작한 만큼 단순히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 어쿠스 씨의 상태는 어땠나요?”

그래도 같은 마탑 출신이라서일까. 아니면 그녀의 아버지가 일으킨 쿠데타의 피해자라고 생각한 것일까.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쁘진 않아 보였다. 나름 동료들과 괜찮게 지내던 것 같기도 하고.”

‘라라 브라우닝만 빼고 말이지.’

“다행이네요.”

“같은 도시에, 그것도 같은 일을 하려 하니 오다가다 만날 수도 있을 거다. 그때 한번 상태를 봐봐.”

“네.”

“저기….”

지크와 엘레나의 대화가 끝날 즈음, 한스가 지크에게 말을 걸어 왔다.

“거기에 브라우닝 씨도 아직 계셨습니까?”

“그래. 아직 있더군.”

“혹 검을 버리셨나요?”

“아니, 여전히 검을 고집하고 있는 것 같더라. 허리춤에 검이 걸려 있었으니까.”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가 히죽 웃었다.

“왜, 관심 있냐?”

“네. 아무래도 방패보다는 검이 어울리는 분 같았으니까요. 지크 님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본인도 검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고요. 원하던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한스의 모습에 지크가 김샌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찔러봤다.

“그 녀석이 원하는 길을 가는데 네가 왜 마음이 놓여?”

한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타인이라도 원하던 길을 걸으며 목표를 좇는 걸 보면 좋지 않습니까? 재능조차도 그쪽이고요.”

“그만 둬. 한스는 너와는 다른 녀석이야. 순수한 녀석이라고.”

라일라가 지크의 팔을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지크는 입맛을 다시며 물러섰다.

하지만 속으로 드는 생각 하나에 기분은 좋았다.

‘어쩌면 라라 브라우닝마저 빼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

생각해보면 그녀도 그렌의 밑에 두기에는 아까운 인재다. 그 악취 나는 놈과 같이 썩어갈 바에는 마음에 상처를 입더라도 그 밑에서 빠져나오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달리 손을 쓸 생각은 없었다.

‘인연이 있다면 알아서 일이 진행되겠지.’

지크는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한스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봤다.

* * *

이튿날, 지크는 시청으로 향했다. 그의 정체를 아는 시청 관계자는 지크를 극진히 모셨다. 시장을 데리고 오겠다는 걸 만류하고 지크는 용건을 꺼냈다.

“몬스터 토벌에 참여하시겠다고요?”

“그렇습니다.”

지크를 상대하는 행정관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당연했다. 안 그래도 도시가 위기인 상황이다.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에서 전력이 늘어나는 상황을 반기지 않을 리 없다. 게다가 상대는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신뢰도 실력도 확실한 상대다.

“저희야 반대할 이유가 없죠! 과연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십니다! 이토록 정의로우시다니!”

행정관은 침이 마르도록 지크에게 아부했다. 아부는 돈이 들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로 카르위먼 명예 성기사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게다가 별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로 행정관은 지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행정관은 지크에게 최대한 편의를 봐주려 했다.

“혹시 원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최대한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고용한 용병단 중 하나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걸 기억하십니까?”

행정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에게도 그건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었죠. 아마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의 일일 겁니다.”

틸이 소속한 용병단의 이름이 그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크 님 일행이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리겠습니다. 그건 분명 도시의 관리 책임입니다.”

행정관이 고개를 숙이자 지크가 손사래를 쳤다.

“사과는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문제 삼을 생각도 없고요. 제가 그 얘기를 꺼낸 건 그 때 용병들이 꽤 많이 처형당해 아무래도 도시 방위에 빈틈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서 말입니다.”

“그렇긴 합니다.”

용병 40여 명의 목이 한 번에 달아난 상황이다. 최대한 그 빈틈을 메우고는 있지만 안 그래도 손이 부족한 상황. 빈틈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저희가 메우고 싶습니다.”

“지크 님이 말입니까?”

행정관이 생각에 잠겼다.

“원하는 곳에 배치를 해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늑대의 송곳니’와 같은 구역에서 일하시게 됩니다만.”

“괜찮습니다. 빈틈도 메우고, 겸사겸사 ‘늑대의 송곳니’도 감시하도록 하죠. 이미 그런 무리가 나왔는데, 다른 자들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도시 입장으로서는 나쁠 것이 없다. 고개를 끄덕인 행정관은 곧 상층부로 의견을 올렸고, 허락이 떨어졌다.

그렇게 지크는 ‘늑대의 송곳니’ 용병단 근처에서 틸을 감시할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 * *

다음 날부터 지크 일행은 정해진 시간에 성문을 나서 순찰을 돌았다. 꽤 고된 일정이었지만 지크의 강행군으로 단련된 일행에게 이 정도 수준의 순찰은 강행군도 아니었다.

콰드득!

지크의 윈두르에 덤벼들던 오크가 두 조각이 났다. 다른 몬스터들이 성난 괴성을 내지르며 일행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들의 운명도 다르진 않았다. 지크 일행의 공격에 그것들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생각보다 산맥을 내려오는 몬스터들이 많은 모양이야.”

마법에 새까맣게 그을린 고블린들을 내려다보며 라일라가 말했다.

지크도 동감이었다. 행정관에게 들었던 것보다 몬스터를 만나는 빈도가 잦았다.

‘즉, 몬스터의 준동은 수습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뜻인가.’

당연히 절대 좋은 일이 아니다.

‘역시 최대한 빨리 산맥에 올라가 봐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일행이 다시 순찰을 시작했을 때였다.

지크 일행처럼 순찰을 하는 중인 용병들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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