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2화
라일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크 브레이브의 동료?”
“그래.”
지크는 예전에 꿨던 꿈을 떠올렸다.
“아이네 프리멜 루벨라,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 윌위스 드웨인과 함께 내 꿈에 나온 사람이다.”
“…새삼 생각하면 굉장한 이름값이야.”
다시 한번 들어도 어마어마한 이름들이다. 카르위먼의 성녀, 드라우드 수림의 엘프 공주, 스누위크 마탑의 전 탑주까지.
거한도 용병단의 대장이라는 신분이었지만 아무래도 이름값이 떨어졌다. 하지만 라일라는 그런 것으로 거한의 가치를 깔아뭉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 세 명은 고작 이름값 정도로 판단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신분 이전에 능력도 엄청난 인물들인 것이다.
저 사람들 사이에 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거한의 능력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흥! 브레이브 놈. 용사란 놈이 겉멋만 잔뜩 들어서 신분으로 사람을 선택하다니.”
“…용사란 칭호를 받은 인간이 그럴 리 없잖아. 모두 능력적으로 모자람 없는 이들이야. 당연히 능력을 보고 일행으로 받아들였겠지.”
“어떠려나. 용사라 불린 그렌 제너드도 꿍꿍이를 한가득 갖고 있었는데, 브레이브라고 그러지 않았을 보장이 있을까.”
“너는 무슨 일곱 살 먹은 어린애니?”
평소에는 소름이 돋다 못 해 질릴 정도로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녀석이 지크 브레이브의 이야기만 나오면 사고방식이 떼쓰는 아이로 퇴화해 버린다.
그건 용사 노릇을 한다고 한 지금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일단 그 사람의 정보를 좀 모아 왔다.”
브레이브는 싫어해도 브레이브의 동료는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름은 틸. 성은 없다. 이름 한 자가 전부야.”
“좋은 집안 출신은 아닌가 보네.”
“용병단에 좋은 집안 출신이 있는 게 더 희귀하지. 있다고 해도 뭔가 사연이 있을 게 뻔하니, 곧이곧대로 성을 말하고 다니는 놈도 별로 없을 테고. 그래도 휘하에 있는 용병단의 규모는 꽤 커.”
“얼마나?”
“500.”
“많네.”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규모였다.
“역시 지크 브레이브의 동료인가? 능력 있는 사람이야.”
라일라의 감탄에 지크가 앓는 소리를 냈다.
“고작 용병 500 정도 거느리는 정도로 뭔….”
“그래서 그게 끝이야?”
다시 투덜거리려는 지크의 말을 익숙하게 끊으며 라일라가 다음 정보를 뱉을 걸 종용했다. 지크는 부루퉁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 이외엔 별것 없어. 용병단의 능력이 상당히 좋다는 평판 정도. 하지만 인성은 별로인 것 같더군. 그쪽은 좋은 소문이 없었어.”
“용병들이 좋은 소문이 도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잖아? 그리고 우리가 봤던 그놈들도 있었고 말이야. 그걸 생각하면 좋은 소문이 도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
라일라의 말이 맞다. 기본적으로 거친 용병단은 이런 도시에서 머무를 때 상당히 사건을 많이 친다.
지크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걸 감안해도 조금 과한 감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
라일라가 표정을 달리했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조금 걱정을 많이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말겠지만 말을 한 사람이 지크다.
지크의 변태 같은 감을 생각하자면 신빙성 있는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감은 사람들이 말하는 두루뭉술한 것이 아닌, 회귀 전 힘의 마왕으로서 쌓아온 압도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통찰력을 기반으로 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틸이란 사람은 용병단을 폭급하게 운영할 사람은 아니었던 걸로 보이는데.”
거기까지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만남이었던 터라 본질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크의 말을 들은 이후엔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브레이브의 동료가 그런 사람일까?”
“윌위스 드웨인의 경우도 있잖아.”
“그 사람도 나쁜 사람은 아니었잖아. 가정 교육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지.”
“하긴, 브레이브의 동료가 됐을 때는 속죄를 하겠다는 뜻으로 합류했다고 네가 말했었지. 그럼 틸도 그런 경우일까?”
“몰라. 더 알아봐야지.”
라일라가 묘한 시선을 보냈다.
“더 알아봐? 역시 브레이브의 동료라서야?”
라일라가 살짝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했다. 분명한 놀림조였다.
“당연하지. 로브 놈들의 표적이 됐을 수도 있으니까.”
지크가 별로 동요하는 것 같지 않자 라일라는 김이 샜다. 하지만 다음 지크의 말에 오히려 그녀가 놀라야 했다.
“그리고 녀석이 다른 마왕인지도 모르고.”
“…마왕?”
“생각해 봐. 당시 용사파티의 구성원은 지크 브레이브, 아이네 프리멜 루벨라,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 윌위스 드웨인 그리고 틸이다.”
지크가 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다시 한번 브레이브 파티의 구성인원을 말했다.
“여기서 아이네 프리멜 루벨라와 레오나 펄 인 드라우드는 그렌 제너드의 동료로 변했다. 그리고 지크 브레이브와 윌위스 드웨인은 각각 마왕으로 변했지. 우리 예상대로 브레이브 파티원들에게 외부의 힘이 작용해 운명을 바꿨다면, 틸만 멀쩡히 두지는 않았을 거야.”
“…힘의 마왕은 너고 마도의 마왕은 윌위스 드웨인이었지. 그러면 남은 마왕은 하나지?”
“그래. 재난의 마왕이다.”
지크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어떤 마왕이었어?”
“그 녀석에 대한 것도 기억에 없어?”
“그건 있어. 이번에 깨어난 기억들 덕에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됐기도 하고. 그래도 직접 대면해 본 사람보다는 못 할 거 아냐.”
“나도 놈과 그다지 대면해 본 적은 없어서….”
지크는 팔짱을 끼고 생각을 정리했다.
“녀석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이다.”
재난의 마왕에 대한 정보가 슬슬 풀렸다.
“생김새는 잘 몰라. 길게 기른 머리를 풀어 헤쳐 다니고 수염도 제멋대로 자란 걸 방치하고 다녔거든. 옷도 그냥 대충 천 쪼가리를 걸치고 다녔고.”
하지만 그런 그도 커다란 특징이 있었다.
“그런데 덩치가 무척 커.”
“틸과 같네?
“틸과 같지.”
고작 그 정도 공통점만으로 아직 틸이 재난의 마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한 것보다는 낫다.
“나는 네 명의 측근들을 비롯해 소수나마 무리를 이끌고 다녔고 마도의 마왕 그놈도 사악한 마법사들을 휘하로 부렸다. 즉, 세력이 있었단 거야. 그런데 그놈은 그저 혼자였어. 그놈이 잠시라도 누군가와 같이 다니는 걸 본 사람은 없다.”
물론 본 사람이 죽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지크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놈은 어느 순간 나타나. 그리고 온갖 파괴와 학살을 일으키며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지. 그리고 사라져. 어떤 인간이 그 규칙성을 파악하려고 한 모양이지만 결국 실패했지.”
라일라는 지크의 말을 주의 깊게 들으며 자신의 정보와 계속 맞춰봤다.
“녀석에게 ‘재난’이라는 이명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야. 나나 마도의 마왕은 그래도 어디에 있고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예상이라도 해볼 수 있지만, 녀석은 그게 아예 없었거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녀석을 재난의 마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녀석의 행동양식은 사람들에게 재난 그 자체였으니까.”
“맞붙은 적은?”
“말했다시피 제 맘대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놈이었으니 만난 적 자체가 손에 꼽아. 내가 그 녀석 죽이겠다고 세상을 뒤지고 다닌 것도 아니고.”
세상을 뒤지긴커녕 지크는 그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붙어 본 적은 있지. 두 번 정도. 내가 있던 세력권에 녀석이 나타났을 때인데….”
“어땠어?”
“뭐, 나와 같은 마왕 칭호가 붙은 놈답게 강했어.”
재난의 마왕은 딱히 체계적인 공격 방식을 사용하는 자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마력을 세련되게 이용해 폭력의 홍수를 쏟아붓는 지크의 방식, 오랜 공부를 바탕으로 깊어진 마도의 지식을 이용해 마법의 폭풍을 일으키는 마도의 마왕의 방식과 극명하게 비견됐다.
“녀석의 공격은 심플해. 공격은 빠르게 다가가서 강하게 때린다. 방어는 빠르게 피하거나 단단한 피부로 받아낸다.”
“…막싸움이잖아.”
지식으로는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터무니없는 싸움방식에 라일라가 어이없어했다.
“맞아. 막싸움이었지. 하지만 고작 그런 싸움방식으로도 마왕의 칭호를 받은 녀석이야. 마구잡이로 휘두른 주먹은 마력을 가득 담은 칼날도 박살낼 정도였고 그냥 뜀박질을 하는 것뿐인데도 웬만한 공격은 전부 피하는 데다가 어떻게 어떻게 공격을 명중시켜도 피부에 공격이 박히질 않아. 더 환장하는 건 간신히 부상을 입혀도 치유 속도가 엄청나서 순식간에 치유를 해버린다는 거지.”
맞붙었을 때를 생각했는지 지크가 혀를 찼다.
“상대가 어떤 무기로 어떤 기술을 사용하든 자신이 있는 나지만, 솔직히 그런 전투방식엔 좀 당황했었다. 육체만을 믿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던 유일한 전투였지.”
“그래도 이겼지?”
“그럼!”
지크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턱을 들고 코를 빳빳이 세운다. 재난의 마왕을 이긴 게 퍽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해를 넘겨가며 싸운 끝에 두 번 모두 내가 이겼지.”
“그래도 죽이진 못했지?”
“뭐, 그랬지.”
그 점은 좀 아쉬운지 지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들었던 턱을 조금 내렸다.
“말했다시피 놈도 만만치 않은 놈이었으니까. 게다가 마왕의 자존심 같은 것도 없는지 자기가 불리하다 싶으면 내빼는 것도 마다치 않았어. 두 번 모두 도망친 녀석을 못 잡은 거니까.”
“어머? 마왕의 자존심은 너도 없지 않아?”
“크흐흐! 그건 그렇지. 그딴 쓸데없는 걸 가지고 있는 건 마도의 마왕 그 늙은이밖에 없었어. 아니, 솔직히 그 늙은이도 위기에 빠진다면 당장 도망쳤을걸?”
“마왕이란 것들이 이랬다니.”
라일라의 한심한 눈빛에도 지크는 오히려 소리 높여 웃었다.
“어차피 그래봤자 나쁘고 비열한 놈들 중 최고란 소리 아니냐! 그런 놈들이 자존심 운운하는 것도 웃겨!”
“그래. 그렇게 인정하는 건 보기 좋다.”
“암! 난 인정할 건 인정하는 놈이니까!”
라일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말해봤자 지크의 뻔뻔함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머리만 더 아플 것이다.
“그럼 앞으로 틸의 주변을 조사할 거지?”
“그래. 바빠지겠어. 윈두르 녀석이 가리키는 곳도 확인해야 하고 틸의 주변도 훑어서 로브 놈들이 없나 확인도 해야 하니까.”
“그래도 해야 할 일이잖아?”
“그렇지.”
지크는 의자 등받이에 깊이 기댔다.
“그래도 경험은 많이 있잖아. 나무도 세 그루를 찾았고 로브 놈들도 많이 엿 먹였지. 그중 하나는 윌위스 드웨인 그 양반의 일이었고. 마왕과 나무, 두 개를 한꺼번에 조사해야 하긴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을 거라고 봐.”
그리고 지크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설마 여기서 골치 아픈 게 더 끼어들기라도 하겠어?”
하지만 지크는 그 한마디를 덧붙이지 않았어야 한다고, 바로 다음 날 깨달았다.
* * *
“당신은….”
“응?”
‘뭐야, 그렌 제너드가 왜 여기 있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