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1화
거한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다.
팔 한 짝 없이 땅을 굴러다니는 부하들을 보느라 놓쳤던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마차의 파편으로 보이는 나뭇조각들과 상품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들.
부하들의 몸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피와 뚜렷하게 비교되는, 말라비틀어진 핏자국. 그리고 사체를 묻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구덩이까지.
“대, 대장! 아닙니다! 저 녀석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애꾸가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거한은 애꾸를 한 번 힐끔 쳐다볼 뿐, 그의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지크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다.
“확인해 봐.”
거한이 구덩이를 가리키며 뒤에 있는 부하에게 명령했다. 부하가 말에서 내려 구덩이 쪽으로 달려갔다.
지크 일행도 그를 막지 않았다.
부하는 구덩이 아래를 살피더니 안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팔 하나를 집어 거한에게 보이도록 높이 들어 올렸다.
“전부 신체의 일부뿐입니다! 정상적인 시체는 없습니다!”
“어떻게 죽은 것 같나?”
“지금껏 우리가 오지게 봤던 시체들과 같습니다! 이것들, 몬스터에게 먹힌 것들이에요.”
지크의 주장과 같은 상황이다. 자신에게 불리해질 것 같자 애꾸가 급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데 이 자들이 먼저 우리를 습격한 겁니다! 저 자식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대장이란 사람은 아무래도 지크의 주장 쪽에 더 무게를 두는 모습이었다.
한쪽은 평소 말을 지지리도 안 듣던 부하. 그것도 인성이 파탄 난 녀석이다.
그에 비해 한쪽은 정황상 몬스터에 당한 사체를 묻어주려 한 사람들.
하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부하의 편을 들어주려는 게 아니다. 정확한 물증 없이 섣불리 판단하는 건 위험하다는 상식적인 생각에서였다.
거한이 다시 지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전투의 이유는 둘째 치고. 결판은 난 듯한데, 당신은 그 녀석에게 뭘 하고 있었지?”
“고문.”
“…어째서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부하라 하더라도 부하는 부하.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달갑진 않은 모양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노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하지만 지크는 이번에도 태연했다.
“댁의 부하, 이런 짓을 한 게 오늘이 처음일까? 그도 아니면 이미 몇 번이고 했는데 걸리지 않은 것뿐일까?”
“여죄를 캐고 있었단 말인가?”
“그래. 그리고 효과도 봤지. 이딴 짓을 네 번씩이나 해먹었다더군.”
거한이 애꾸를 노려봤다.
“거짓말입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넌 그 말밖에 못 하냐?”
지크가 한심하게 애꾸를 쳐다본다. 하지만 애꾸도 필사적이었다.
“그럼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하지 뭐라고 한단 말이냐!”
지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떼쓰는 아이에게 한숨 쉬는 어른 같다. 그 모습에 애꾸가 울컥했다.
그러나 지크는 그의 심경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거한에게 물었다.
“도시 옆에 산이 있나? 동굴이 있을 만하고 사람들을 끌고 가 살해해도 들키지 않을 만한 곳으로 말이야.”
“생각나는 곳이 하나 있다.”
“그럼 그곳을 뒤져 봐. 도시 옆 산에 있는 동굴로 피해자들을 끌고 갔다고 하니까.”
“설마 이 녀석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죠, 대장! 오히려 저놈이 그곳에서 살해를 저질렀을 겁니다! 저한테 덮어씌우려는 거라고요!”
“…일단은 너희들 모두 도시로 데리고 가겠다. 가서 본격적인 조사를 해보지.”
무척이나 강압적인 말이다. 하지만 의외로 지크는 반발하지 않았다.
“좋아. 어차피 우리도 피알루로 가던 길이었으니. 하지만 괜찮겠어? 너희는 몬스터 토벌 의무를 받았잖아. 이런 일로 의무를 내팽개치면 도시에서 좋아하지 않을 텐데.”
“…….”
거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콧등이 찡그려지는 것을 보니 지크의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순찰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대답하고 거한이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용병들이 움직였다. 몇 명이 다른 순찰대를 요청하기 위함인지 도시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머지 용병들은 그룹을 나눠 일부는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부축했고 일부는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말들을 수습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지크 일행을 빙글 둘러쌌다.
혹시라도 지크 일행이 도망을 칠까 포위하는 것이었다.
지크는 그들의 행동에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지크가 아무런 말이 없으니 일행도 용병들의 행동을 묵인했다.
일단 현장이 대충 수습되자 거한이 소리쳤다.
“돌아간다!”
그렇게 지크 일행과 용병단은 서로를 경계한 채 피알루까지 어색한 동행을 했다.
* * *
피알루에 처음 가 본 사람들은 보통 투박하고 거칠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역 도시라고 칭해지긴 하지만 사람도 물자도 부족하다. 볼품없다고 평하는 사람마저 존재했다.
그러나 도시 안에는 무역도시 특유의 활기와 에너지가 감돌았다. 하나, 다른 무역도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바로 긴장감이었다.
그곳이 어느 지역이건 간에 상행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다. 맹수, 도적, 몬스터 등등의 위협이 곳곳에 도시라고 있고 날씨도 상행을 방해한다.
그러나 피알루는 그 위협이 한층 더 높았다.
이유야 당연히 데네스트 산맥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친 지형과 변화무쌍한 날씨 그리고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위험한 몬스터들까지.
그걸 생각한다면 도시에 흐르는 긴장감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피알루에 흐르는 긴장감은 그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지나친 면이 있었다.
상인들의 거점이라기보다는 마치 군사 요충지에 세워진 요새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나는 것은 하나.
피알루가 지금, 자신의 역할 중 무역도시로서의 역할이 아닌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데네스트 산맥의 몬스터 준동을 막는 1차 저지선으로서의 역할을.
그런 피알루 안으로 지크 일행이 들어섰다.
먼저 보낸 용병들이 사정을 설명한 듯 성문에 꽤 지위가 있어 보이는 자가 나와 있었다.
현 사태를 조사하기 위해 도시 상층부에서 보낸 조사관이었다.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마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며칠 동안은 조사 때문에 억류되어 있어야 할 듯 보였다.
그러나 지크가 내놓은 물건 하나에 분위기는 일변됐다.
카르위먼 명예 성기사의 증표.
그걸 보는 순간 귀찮아 보이는 태도로 지크와 일행을 대하던 조사관의 시선이 돌변했다.
방금과는 전혀 다르게 태도가 공손해졌다.
거한도 무척이나 놀랐다. 하지만 동시에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면 게임은 끝인 것이다.
그는 부하를 쳐다봤다.
한쪽밖에 없는 부하의 눈이 공허하게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살 수는 없겠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라면 신뢰도는 확실하다. 아마 그의 말에 거짓은 없었을 터.
부하는 도시로부터 받은 알량한 권력을 앞세워 상인들을 납치해 죽이고 재산을 강탈했을 것이다.
그런 자를 도시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다. 사형을 피할 순 없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똑바로 좀 살라고 했는데도!’
용병은 거칠다. 거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온갖 시비나 트러블이 일상처럼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는 도가 지나쳤다. 평소에도 그의 말을 밥 먹듯 무시하고 다니더니 결국 이런 사단이 나고 말았다.
애꾸가 도움을 구하듯 거한을 쳐다본다. 그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거한은 그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제 죗값을 받는 것뿐이다.’
안 그래도 저놈과 저놈을 따르는 무리들을 용병단에서 쫓아낼까 고민 중이었다.
그 고민이 이번에 외부의 도움으로 해결됐다고 생각하면 된다.
‘문제는 우리한테도 그 책임이 돌아올 거라는 건데….’
녀석들이 속해 있는 용병단이니 책임 소재를 피할 수 없다. 거한은 일찌감치 애꾸를 쫓아내지 못한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어쩔 수 없지. 수습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그래도 심한 대접을 받진 않을 것이다. 지금 피알루엔 사람 손 하나가 아쉽다. 그 점을 어필한다면 책임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저놈은 안 될 테지만.’
사람이 필요한 이유는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한데, 도시에 해를 끼치는 사람을, 아무리 사람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가만히 둘 리 있겠는가.
거한은 계속해서 일에 대한 수습을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그중에 애꾸를 위한 생각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 * *
카르위먼 명예 성기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억류되는 상황을 무마한 지크 일행은 피알루에서도 꽤 고급스러운 숙소에 방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도시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누가 봐도 지금 이곳 피알루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날 저녁.
지크 일행은 지크의 방에 모였다. 저녁을 먹는 겸 오늘 모은 정보를 교류하기 위해서였다.
서로 대화가 오고 간다. 일행은 도시를 쏘다니며 얻은 사소한 정보라도 모두 풀어놨다.
“예상과 같군.”
지크가 스프를 한 숟가락 떠먹으며 말했다.
그들이 가도에 널브러진 시체와 종종 받은 몬스터들의 습격으로부터 예측한 것처럼, 도시는 데네스트 산맥의 몬스터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유를 알아 온 사람 있나?”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없군.”
“너도 모르는 거야?”
라일라가 되물었다.
“넌 카르위먼의 신관들한테 물었었잖아. 고위 신관이라면 도시 상층부와도 어느 정도 연결선이 있을 테니 정보도 다른 이들보다 많이 알 텐데.”
“그들도 모르는 모양이다. 그저 어느 순간 갑자기 몬스터가 습격해오기 시작했다고 하더군. 슬쩍 떠봤는데 도시 상층부도 모르는 모양이고.”
“그것 참.”
“하지만 아예 짐작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모두의 시선이 지크에게 쏠렸다.
“몬스터의 공격이 시작된 시기를 알아봤는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대지의 나무를 해방시켰을 즈음부터 공격이 시작된 모양이야.”
“…혹시 나무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우리가 여기까지 걸음을 옮긴 이유가 이 녀석이 우리를 다른 나무로 안내해주지 않을까 하는 상황에서 그런 거잖냐.”
“그렇긴 하지.”
“물론 확신할 순 없어. 그저 시기가 우연찮게 맞아떨어졌을 뿐,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해.”
“그럼 바로 산맥으로 들어갈 거야?”
“그래야지.”
지크는 윈두르를 뽑아 들었다. 지크가 명령하기도 전에 윈두르는 날을 구부려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이 녀석도 여전히 산맥 쪽을 가리키고 있기도 하고.”
“대비를 잘해야겠네. 산맥 아래까지 이 난리라면 위쪽은 더 심각할 수 있으니까.”
“오히려 더 잔잔할 수도 있지 않겠냐.”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그 후,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다 식사 자리는 끝났다. 일행은 각각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라일라는 지크의 방에 남았다. 다른 셋이 있으면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번에 봤던 용병 대장 기억하지?”
둘만 남게 되자 지크가 바로 말을 꺼냈다.
“기억하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잊어버렸겠어.”
용병치고는 얌전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덩치도 무척 컸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 이상 라일라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말에 그녀는 거한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자, 내가 꿈에서 봤었던 지크 브레이브의 동료 같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