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9화
말을 탄 자들이 지크 일행에게 접근했다.
단단한 철을 덧댄 질긴 가죽 갑옷과 날카롭게 관리된 무기들. 터질 듯한 근육과 스산한 눈빛이 그들이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실력 있는 용병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실력과 인성은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라일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서도 알 수 있는 용병들의 건들거리는 모습이 척 봐도 충돌 한번 거하게 일어날 것 같았다.
피할 수는 없는 걸까. 라일라는 시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예상이 틀려, 용병들이 얌전하게 지나가길 빌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언제나 빗나가는 법이 없다.
“어이! 거기!”
가장 앞에서 말을 달리던 용병이 외쳤다. 누가 봐도 지크 일행에게 하는 소리다.
일행이 용병들을 쳐다봤다.
숫자는 스물. 상당한 숫자다. 그들의 거친 인상을 더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과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압박감을 느낄 터다.
그러나 지크 일행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크 일행의 앞에 용병들이 멈췄다. 가장 앞에 있던 용병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왔다.
아까 지크 일행에게 소리를 친 자였다. 다른 용병들도 한 인상 하고 있었지만 이 용병은 그중에서도 한층 더 험악했다.
마치 산도적처럼 얼굴 가득 들어찬 빳빳한 수염과 볼과 턱에 하나씩 보이는 칼자국. 무엇보다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가 그의 인상을 더욱 살벌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가 지크 일행을 훑어본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역시나!’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애꾸의 눈이 자신과 엘레나를 끈적하게 훑고 지나간 걸 느낀 것이다.
엘레나도 그 시선을 느꼈는지 몸을 반쯤 스녹의 뒤에 숨겼다.
겁먹은 건 아니다. 그저 생리적 혐오감에 몸서리쳐져 그럴 뿐.
“너희는 누구냐!”
애꾸가 위협스럽게 외쳤다. 척 봐도 지크 일행의 기를 누르려는 의도가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 고작 그 정도 위협에 겁을 먹을 사람은 없었다.
“니들이야말로 뭐냐?”
지크가 삐딱하게 대꾸했다. 라일라는 감탄했다. 용병들과는 차림새도 생긴 것도 완전히 다르지만, 지크의 건들거림은 결코 용병들에 밀리지 않았다.
애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원한 반응이 아니다.
많은 머릿수와 험상궂은 얼굴, 거기에 천문학적인 가격을 자랑하는 본격적인 전투마는 아닐지라도 나름 말까지 타고 있는 자신들이 위협스럽게 말하는 것이다.
그게 상행이건 단순한 여행자건 겁에 질려 쩔쩔매야 했다.
그러나 지크 일행이 그런 반응을 보일 리 만무.
그러나 애꾸는 화를 억눌렀다.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건방진 말을 내뱉었던 지크의 머리를 두 쪽으로 쪼개고 싶었지만, 바로 무력을 사용할 순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숙련된 무장집단이라고 해도 지크 일행도 무장을 하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저 계집들은 마법사 같기도 하고.’
그 보기 힘들다는 마법사들이 한 파티에 두 명이나 존재하다니. 무척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애꾸는 전투에 들어갔을 때 자신들이 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마법사들을 상대해 본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승리자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일단 칼질을 하기 시작한다면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상대의 파티에 마법사까지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하나,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여기서 소란이 이는 것이었다.
‘괜히 소란을 피워 그 인간이 왔다가는 골치만 아파질 거야.’
때문에 그는 무력 사용을 뒤로 미뤘다. 목적을 이룰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도 그가 무력 사용을 뒤로 미룬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는 피알루에서 고용한 용병단이다!”
애꾸가 짐짓 위엄 있게 소리쳤다. 도시의 권력을 등에 업으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지크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울컥 솟아오르는 화를 내리 누르며 애꾸가 한층 더 거칠게 말했다.
“지금 뭘 하고 있지?”
“보면 알 거 아냐? 가도에 굴러다니는 사체들을 묻어주고 있었다.”
지크가 아직 흙을 덮지 않은 무덤을 가리켰다.
애꾸가 히죽 웃었다. 지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트집 잡을 일을 발견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호오? 혹시 지금 상행을 습격하고 그 증거를 은폐하려던 건 아니겠지?”
지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척이나 크고 과장되게.
애꾸의 웃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누가 봐도 지크의 한숨은 그를 무시하는 것이었다.
“어이, 야!”
지크가 애꾸를 쳐다봤다.
“헛소리를 하려면 다른 놈들이나 붙잡고 해. 여기서 네 어쭙잖은 위협에 벌벌 떨며 휘둘릴 사람 없으니까.”
“뭣! 어쭙잖은 위협이라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피알루에서 고용된 용병이다! 그리고 도시 근처에서 일어난 일을 조사할 권리를 갖고 있기도 하지!”
애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한 장의 두루마리였다. 그는 자랑스럽게 그것을 펼쳐 보였다.
그건 피알루와 그들이 계약을 맺었다는 계약서였다. 도시의 직인이 선명한 그것은 분명한 진품이었다.
“알겠나! 우리는 피알루에 위협이 될지 모르는 것들을 모두 찾아내 없앨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와 도시가 맺은 계약이니까! 그리고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무척이나 수상하군.”
애꾸가 의기양양하게 지크 일행과 그들이 파놓은 구덩이를 쳐다봤다.
“그러니 너희를 구속, 조사하겠다! 순순히 따라오도록! 만약 우리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도시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고 그건 즉 이곳 영주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며, 나아가 왕국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왕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다름없다는 협박이다.
하지만 애꾸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도시의 명령을 어긴다는 건 그 도시에 권한을 위임한 영주를 무시한다는 뜻이고, 영주를 무시한다는 건 영주에게 권한을 위임한 국왕의 권한을 무시한다는 뜻이니까.
뒤에서 지크가 하는 양을 긴장감 없이 보고 있던 다른 일행의 얼굴이 굳었다.
그들도 스물 남짓한 용병들의 협박에 굴복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 뒤에 나라의 권력이 있다면 얘기가 다른 것이다.
드디어 지크 일행의 긴장된 얼굴을 본 애꾸가 뿌듯해했다.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처음에 뻣뻣하게 구는 폼이 건방졌지만, 도시의 권력을 앞세우자 대번에 태도가 변한 것이 즐거웠던 것이다.
‘이래서 권력, 권력 하는 거군.’
그의 특기인 무력으로 상대를 가지고 노는 것도 재미있지만, 권력이란 건 그것과는 다른 맛이 있다. 애꾸는 요 근래 얻은 이 권력이란 장난감에 푹 빠져 있었다.
특히 이번에 발견한 사냥감들은 무척이나 상태가 좋았다.
‘저런 년들은 처음 보네.’
애꾸의 눈이 라일라와 엘레나를 다시 훑었다.
둘 다 보기 힘든 미인이다. 아니, 애꾸로서는 처음으로 본 미녀들이었다.
특히 라일라는 차원이 달랐다. 엘레나는 그래도 어느 정도 현실성이 있는 미녀라면, 라일라는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봐도 도저히 현실성이 보이지 않는 미녀였다.
여신이라고 주장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남자 놈들도 괜찮고.’
두 놈은 상당히 곱상하게 생겼고 한 놈은 좀 처지긴 하지만 몸이 탄탄한 것이 충분히 수요가 있을 녀석들이었다.
겁을 충분히 줬으니 이제 과실을 수확할 때다.
애꾸는 엄격한 표정을 -그래봤자 깡패 같은 얼굴이었지만- 지으며 말했다.
“알았으면 얌전히 우리를 따라…!”
“염병하네.”
하지만 그의 말은 지크의 차가운 말에 끊겼다.
애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여기서 자신의 말을 끊을 줄은 몰랐다.
애꾸가 지크를 쳐다봤다. 그리고 눈치챘다.
다른 일행과는 다르게 지크의 얼굴엔 여전히 긴장의 ‘긴’ 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당황도 잠시. 애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크게 성을 냈다.
“네놈! 감히 도시의 명령을 거역하…!”
“그딴 게 도시의 명령일 리가 있냐.”
다시 한번 애꾸의 말이 끊겼다.
이제 애꾸의 얼굴은 붉다 못해 아예 시뻘게졌다. 당장이라도 지크를 베고 싶은 것처럼 그의 손이 검자루 근처에서 꿈틀거린다.
하지만 어떻게든 지크를 권력으로 누르고 싶었는지 애꾸는 끝끝내 칼을 뽑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계약서를 흔들었다.
“이 계약서가 보이지 않는 거냐!”
그러나 여전히 지크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놈들이 도시와 계약을 맺었다는 건 사실이겠지.”
“알고 있다면 당장 우리를 따라…!”
“하지만 네놈들이 맺은 계약은 그저 몬스터 토벌 계약일 뿐이잖아. 지금의 순찰도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이 있지 않나 확인하는 거고.”
“……!”
애꾸는 입을 다물었다. 튀어나올 듯 동그래진 눈이 지크가 한 말이 사실임을 입중하고 있었다.
애꾸 뒤에서 비틀린 웃음을 지은 채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용병들도 얼굴이 굳었다.
“그, 그런 헛소리가…!”
“헛소리는, 지랄. 오면서 봤는데 몬스터가 꽤 무리지어 다니더군. 거기에 몬스터에 습격당한 사람들도 많고. 아무리 이곳이 데네스트 산맥 근처라도 분명한 이상 사태지.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피알루에서도 대응에 나섰을 테고. 그 대응 중에는 너희 같은 용병 놈들을 고용하는 것도 있었을 거다.”
“……!”
애꾸의 얼굴에 점점 당혹감에 물들었다. 하지만 지크의 말은 계속됐다.
“한데, 몬스터가 이렇게 난리를 치는 와중에 몬스터 습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에 대한 조사권을 피알루에서 줬다고? 무역으로 먹고 사는 도시가? 그것도 너희 같은, 무력 빼면 남는 게 없는, 신뢰 따위는 시궁창에 던져 놓았을 용병 놈들에게? 윗대가리들 중에 무능한 놈들이 많다지만 그렇다 해도 무역 도시의 윗대가리 정도 해먹으려면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가야 돼, 이 빡대가리야!”
지크의 욕설에 애꾸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뻔하지. 그 알량한 계약서를 들이밀며 사람들을 협박해 저들 이득을 챙겼겠지. 재미도 좀 보고. 그런데 말이야. 이 참상이 안 보이냐?”
지크가 핏자국과 나뭇조각, 상품들이 흩어진 가도를 가리켰다.
“도시에 고용된 주제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개 같은 일이지만, 하려면 적어도 네놈들 일은 다 하고 했어야지. 무능하게 네놈들 일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개 같은 짓을 먼저 하려 들어? 네놈 같은 자식들은 개 같은 놈들을 넘어 개쓰레기 같은 놈들이야.”
“이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그럼 도시로 가서 확인해 보자고. 설마 다른 말을 하진 않겠지? 우리를 조사하려면 당연히 도시로 가야 하잖아? 너희만 아는 비밀 아지트에 끌고 갈 생각이 아니었다면 말이야.”
흥분한 애꾸에 비해 지크의 어조는 침착하게 그지없다.
하지만 같이 흥분해 쏘아붙이는 것보다 오히려 그게 더 얄미운 법.
“이 개자식이이이이이!”
애꾸가 결국은 검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뒤에 있는 용병들도 무기를 꺼냈다.
지크 일행도 전투태세를 갖췄다.
“뒈져어어어!”
애꾸의 검이 지크에게 내려쳐진다.
지크는 잠시 아무런 움직임 없이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검을 올려다봤다.
지크의 머리 바로 위까지 검이 접근했다. 곧 두 쪽으로 쪼개질 지크의 머리를 상상하며 애꾸가 입술을 비틀 때였다.
콰아앙!
애꾸의 몸이 옆으로 날아갔다. 검과 검을 들고 있던 팔이 산산이 부서져 있다.
애꾸는 멍하게 흩날리는 쇳조각과 피, 살점, 뼛조각들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지크에게 향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나뭇가지처럼 생긴 괴상한 검이 들려 있었다.
‘분명 등에 있었는데?’
하지만 애꾸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퍽!
땅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치며 그는 정신을 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