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8화
그곳은 다른 곳보다 훨씬 더 하늘에 가까운 곳이었다.
누가 먼저 하늘에 도달하나 경쟁이라도 하듯 위를 향하는 수많은 봉우리들이 하얀 눈을 둘러얹은 채 늘어서 있고 그 옆으로 하얀 구름이 마치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곳.
데네스트 산맥.
저 멀리 보이는 산맥의 이름이었다.
총 7개의 나라에 걸쳐 있는 그 거대한 산맥은 그 크기로 인하여 ‘세계의 지붕’, ‘신들의 휴식처’, ‘가장 먼저 창조된 곳’ 등, 많은 별명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 산맥이 유명한 데에는 그 규모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셀록블럼.
데네스트 산맥에 있는 거대한 봉우리로,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는 곳. 게다가 산세도 험해 평범한 사람은 꼭대기는 물론 산 중턱마저 올라가기 힘든 곳이다.
거기에 그 봉우리는 거의 매일 구름 아니면 운무에 뒤덮여 그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
그 신비로운 모습에 주변에서 신성시되기까지 하는 곳.
지크 일행의 눈에도 그 산이 보였다. 다른 봉우리들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그 산은 컸다.
지크는 셀록블럼을 한 번 쳐다보고 자신이 들고 있는 윈두르를 쳐다봤다.
‘역시 저기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은데.’
휘어진 가지의 날들이 셀록블럼을 향하고 있다. 물론 방향만을 가리키는 윈두르를 생각하면 셀록블럼 너머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일단은 가봐야지.’
지크는 윈두르의 날을 원상 복귀시키고 다시 등에 멨다.
“가자!”
지크는 일행을 이끌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라일라가 지크의 옆에 나란히 서며 물었다.
“역시 셀록블럼이 목적지야?”
“그런 것 같아.”
“셀록블럼이라면 그 안에 뭔가가 있을 만하지.”
“하지만 지금까지 별 정보는 없었어.”
인간의 발길을 아예 거부하는 것 같은 셀록블럼이지만, 정복을 당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은 올라가기 거의 불가능한 봉우리긴 해도 이 세계엔 평범하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은 것이다.
마력을 사용해 평범한 사람보다 아득히 높은 신체능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셀록블럼은 정복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마력 사용자들의 숫자는 적었고, 그중 셀록블럼을 등반할 정도의 능력자는 더욱 적었다.
아무리 마력 사용자들이라도 셀록블럼이 어중이떠중이들이 오를 만한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더욱 적은, 셀록블럼을 등반할 수 있는 사람들 중 셀록블럼을 오를 이유가 있는 자는 더더욱 적었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과 할 의도가 있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니까.
때문에 정복당했을지언정, 셀록블럼의 실체는 그다지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들키지 않았던 거 아냐? 아, 비올루윈의 꼴을 보면 아니겠구나.”
대도시, 그것도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몰리는 관광도시 아래에 떡하니 존재하면서도 사람들이 존재조차 몰랐던 게 비올루윈의 유적이다. 셀록블럼에 유적이 있다면 더더욱 찾기 힘든 것이 당연하다.
“뭐, 일단 가보면 알 일이야. 저기가 목적지든 아니면 경유지든 일단 어느 정도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건 확실하니까.”
“당장 갈 거야?”
“아니. 일단 피알루에 들를 거야.”
피알루. 데네스트 산맥에 가장 가까이 있는 도시다.
아무리 높은 산맥이라도 산맥을 넘어 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있는 법이고, 피알루는 그 무역 상인들이 들르는 거점 도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돈 많고 물자 많은 커다란 무역도시를 생각하면 안 됐다.
데네스트 산맥은 무척이 험했고, 따라서 물자의 이동도 힘들었다. 때문에 피알루의 규모는 다른 무역도시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였다.
하지만 적어도 며칠 몸을 쉬게 할 정도로는 충분했다.
“뭔 일이 있을지 모르니 몸은 충분히 쉬게 해야지.”
라일라는 물의 나무와 대지의 나무가 있던 유적을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걸은 지 얼마. 해가 지고 달이 떴다. 지크 일행은 간단한 캠프를 치고 불을 피웠다. 마법 상자에서 식료를 꺼내 끼니를 막 때웠을 때였다.
지크가 뒤쪽을 바라봤다.
그다음 눈치챈 것은 한스였다. 그가 에스텔레이드를 잡고 일어섰다. 지크와 한스의 행동에 일행이 긴장했다.
라일라와 엘레나가 지팡이를 쥐고 일어났고 스녹도 노웸을 어깨에 태운 후 몸을 일으켰다.
“뭐야?”
엘레나가 스녹에게 작은 소리로 묻는다. 대지의 울림에 집중을 하던 스녹이 대답했다.
“몬스터 같아. 숫자도 상당히 많아. 한 이삼십 마리 정도는 되는 것 같아.”
엘레나의 눈에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과하진 않았다. 딱 전투를 하기에 알맞은 정도. 이런 식으로 몬스터와 마주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라일라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녀의 지파이에서 불덩이가 솟아올라 주변을 밝혔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몬스터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거들이군.”
지크의 말처럼 그것들은 대형 몬스터인 오거였다. 하지만 오거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자잘한 몬스터들도 섞여 있었다.
지크가 한스, 스녹, 엘레나를 보며 턱짓을 했다. 세 명이 앞으로 나섰다. 지크와 라일라는 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굳이 그들까지 나설 필요조차 없는 몬스터들이다.
곧 셋과 몬스터의 전투가 벌어졌다. 한스가 에스텔레이드를 들고 뛰어들었다. 빛이 몇 번 번쩍거리며 몬스터들을 도륙한다. 스녹도 대지를 들어 올려 몬스터들을 짓이겼다.
“비켜요!”
엘레나가 크게 외치자 한스가 뒤로 물러났다. 반쯤 전멸한 몬스터들에게 엘레나가 만든 거대한 화염구가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대지가 떨리며 열풍이 주변을 휩쓴다. 붉은 화염이 몬스터들을 태워버렸다.
쿠웅!
새까맣게 변한 마지막 오거가 쓰러지며 몬스터들이 전멸했다. 이 정도의 몬스터들은 지크 일행에게 아무런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한스와 스녹, 엘레나가 터벅터벅 걸어와 원래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는다. 지크와 라일라는 이미 앉아 있었다.
“수고했다.”
지크가 짤막하게 한마디를 하자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한 상행 정도는 흔적도 없이 초토화시켜 버릴 몬스터들을 해치운 것치고는 무척이나 무덤덤한 행동이었지만 지크 일행의 실력을 생각하면 방금 전의 전투는 준비운동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몬스터의 습격이 조금 많지 않아?”
라일라가 의문을 표했다. 최근 몬스터의 습격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지크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오거 같은 놈들이 무리 지어서, 그것도 자기보다 약한 놈들과 다니고 있다. 확실히 이상한 상황이지.”
“산맥에 가까워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것도 보통 산맥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스가 의견을 표했지만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몬스터의 습격이 빈발한 이유는 돼도 저 머저리들이 무리 지어 다니는 설명은 되지 않아. 게다가 아무리 데네스트 산맥 근처라고 해도 이 정도 빈도의 습격은 이상하다.”
무엇보다 지금 이곳은 피알루 근처다. 본격적인 무역도시에 비견하면 초라하지만 그래도 도시는 도시.
게다가 그곳은 데네스트 산맥의 몬스터들이 혹시라도 밀고 내려올 시 막아내는 1차 저지선이기도 했다.
“무언가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네?”
“그래.”
지크는 옆을 쳐다봤다. 어둠 속 보이는 길의 끝에, 피알루가 있을 것이다. 그 너머에 데네스트 산맥이 있을 것이고, 그 안에 셀록블럼이 있다.
그곳에 대체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무에 관련된 일이라면 좋겠는데.’
지크는 기대감을 품었다.
* * *
밤을 지낸 후 일행은 계속 걸었다. 몬스터들의 습격은 계속됐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크 일행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자기들의 목숨만 날아갔을 뿐.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크 일행처럼 몬스터들의 습격을 방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끔찍하네.”
라일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한스와 스녹, 엘레나도 마찬가지.
지크가 한 걸음 앞으로 나가, 몸에서 떨어져 나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는 팔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온도가 죽었을 때의 팔의 주인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 같았다.
한스와 스녹도 주변 사체를 살폈다.
“몬스터의 짓이겠죠, 선배?”
“그래.”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혼자 나뒹굴고 있는 다리 한짝을 집어 든 한스가 주변을 살폈다.
“다른 부위는 없네.”
살점과 사지 몇 개가 나뒹굴고 있을 뿐, 나머지 부위는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가도 주변에 흩뿌려진 피의 양을 보면 그 사지의 숫자도 무척 적다. 생각되는 건 단 하나.
‘전부 먹혔군.’
한스는 혀를 차고는 무릎을 펴 일어났다.
시체를 조사하는 지크와 한스, 스녹과 달리 라일라와 엘레나는 죽은 자들의 것이리라 추측되는 물건들을 살폈다.
산산이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가도에 흩어져 있다. 너무도 철저하게 부서져 도대체 이것들이 무슨 용도였는지 도저히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그나마 남은 마차 바퀴 일부가 아니었다면 아마 추측만으로 나뭇조각의 용도를 알아야 했으리라.
“상행이었나 봐.”
여러 가지 잡화들이 굴러다닌다.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니 몬스터들이 그냥 두고 간 것일 것이다.
가도를 걷던 상행이 몬스터의 이상 발생 때문에 몰살당했다. 일행을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대충 시신을 수습해 가도 옆에 묻고는 표식 하나를 세운 후 일행은 다시 피알루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다시 한번 시체들을 만났다. 그리고 또 한 번. 또 한 번.
“생각 이상으로 사태가 심각한 모양이야.”
이제는 살점 하나 남지 않고 그저 말라붙은 핏자국만이 남은 곳을 보면서 지크가 턱을 쓰다듬었다.
오는 길에 몬스터 무리를 또 한 차례 쓰러뜨린 후이기도 했다.
‘어쩌면 피알루에서 발이 묶일지도 모르겠군.’
본격적인 용사 노릇은 나중에 하기로 했지만, 적어도 그 바닥 정도는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피알루가 몬스터의 습격에 노출되어 있다면 힘 좀 실어주는 것도 괜찮으리라.
그렇게 지크 일행이 또 한 번의 상행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였다.
그 상행은 상당히 컸는지 흩어진 상품이나 마차의 파편, 먹히지 않은 인간의 부속물들이나 핏자국이 상당히 많았다. 거기에 상당히 반항을 했는지 몬스터의 사체 부속도 보였다. 아마도 몬스터들이 죽은 동료의 시체마저 먹어치운 모양이었다.
일행은 익숙하게 사체들을 한곳에 모았다. 가도 옆에 구덩이를 파고 사체를 묻은 후 흙을 덮으려던 때였다.
두두두두두!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라일라가 소리가 난 곳을 쳐다봤다.
“웬 용병 같은 놈들이 오는데?”
“도시에서 고용한 놈들이겠지. 이 사달이 났는데 도시에서 가만히 있진 않았을 거야.”
일찌감치 접근하는 무리를 알아챘던 지크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뭔가 마찰이 있진 않겠지?”
“몬스터가 이리 날뛰고 있는 판국에 같은 인간하고 마찰을 빚겠어? 웬만큼 또라이가 아닌 이상은 훑어보고 그냥 지나칠 거다.”
“만약 그런 또라이라면?”
“뭘 묻고 그래.”
마치 물체는 아래로 떨어지고 강은 바다로 흐른다는 당연한 진리를 묻는다는 듯 지크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시비를 건다면 조져야지. 용사 노릇을 한다고 했지 병신 머저리 호구가 되겠다는 말은 안 했어.”
지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 두 개는 같은 건가?”
“…너는 정말로 용사 단어에 악의를 갖고 있구나.”
라일라가 고개를 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