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7화
지크와 라일라는 유적을 나와 도시로 돌아왔다. 한스와 스녹, 엘레나는 무덤에 들어가기 전 이용하던 숙소에 머물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한스가 오랜만에 만난 둘에게 고개를 숙였다. 숙소엔 그뿐, 스녹과 엘레나는 외출 중인 모양이었다.
“그래. 별일은 없었지?”
“네. 도시를 계속 순찰했지만 별 이상은 없었습니다.”
한스의 이야기를 듣고 라일라는 살짝 양심이 찔렸다.
비올루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은 마릴린을 속이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즉, 한스를 비롯한 세 명은 헛고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지크는 라일라와 다르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 깨지기에 지크의 철면피는 무척이나 단단했다.
“잘했다.”
지크의 칭찬에 한스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한데, 프릴 씨가 보이지 않는군요. 다른 곳에 들렀다 오시는 겁니까?”
얼마 전 새로 들어온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한스가 물었다. 라일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지크는 이번에도 덤덤했다.
“배신해서 죽였다.”
“……!”
“……!”
라일라는 깜짝 놀랐다. 설마 저렇게 대놓고 말할 줄이야.
한스의 얼굴을 보니 그도 적잖게 놀란 모양이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그렇군요.”
그것으로 한스의 반응은 끝이었다. 라일라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쟤도 참 특이해.’
지크를 심하게 믿는다고 해야 할지, 충성심이 높다고 해야 할지.
한스가 어떻게 지크의 일행이 됐는지 이미 들어 알고 있던 터라, 지금의 한스는 꽤 신기했다.
지크와 라일라는 숙소에 방을 잡고 올라갔다.
예전에 머물던 방이 비어 있어 다시 한번 그 방들을 잡았다.
오랜만의 침대에서 둘은 편히 쉬었다.
둘 다 조금의 강행군 정도에는 끄떡하지 않는 사람들이고 마법 상자에 이것저것 용품들을 집어넣을 수 있어 노숙치고는 굉장히 편하게 보낸 그들이지만, 아무래도 지붕 있는 고급 숙소의 침대만큼은 못한 것이다.
저녁때까지 늘어지게 보낸 둘은 오늘의 순찰을 끝내고 온 스녹과 엘레나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한스처럼 마릴린의 거취를 궁금해하는 둘에게 지크는 똑같이 ‘배신해 죽였다’고 답해줬다.
당연히 둘은 놀랐다. 그러나 이후 스녹의 반응은 한스와 비슷했다.
아무래도 지크와 여행 경험이 긴 이상 한스와 비슷하게 지크를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엘레나는 조금 찝찝해하는 기색이었지만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는 그녀도 별말 없이 넘어갔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하며 근황을 보고한 일행은 밤이 늦어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지크도 자신의 방에 들어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미 저녁때까지 침대에서 늘어져 있던 터라 여행의 피로감은 전부 사라져 있었지만, 오래간만의 휴식이다. 며칠 정도 침대 위에서 게으름을 피워도 나쁠 건 없다.
하지만 지크는 얼마 안 있어 침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들어와.”
문 앞에 나타난 익숙한 기척에 지크는 상대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말했다. 상대도 예상한 듯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온 상대는 라일라였다.
“무슨 일이야?”
“할 얘기가 있어서.”
“앉아.”
지크는 방에 있는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실례할게.”
라일라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쭈뼛쭈뼛 걸어 들어온 라일라가 조심스럽게 지크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예전, 지크의 방에 스스럼없이 들어오던 모습과는 무척이나 다르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지금과 예전이 같을 리가 없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이성의 방인 것이다.
그 모습에 지크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티를 내진 않았다.
“그래, 무슨 이야긴데?”
긴장에 살짝 굳어 있던 라일라지만 지크가 예전처럼 태연하게 이야기를 주도하자 그녀의 긴장감도 조금씩 풀려갔다.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야.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러 왔어.”
“앞으로의 계획이라….”
지크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솔직히 별생각은 없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렌 제너드 놈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지만, 아직 놈의 회귀를 막을 방법을 모르니까. 다른 나무의 행방도 모르고.”
“하긴. 너, 용사 노릇도 그렌 제너드의 회귀를 막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할 거라고 했지.”
“일단 며칠 정도 쉴 생각이야. 그동안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봐야지.”
그러며 지크는 한탄하듯 말했다.
“어디서 다음 나무에 대한 단서 같은 게 뚝 떨어지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럴 일이 있겠….”
라일라가 갑자기 입을 다물자 지크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라일라의 시선이 자신의 뒤쪽을 향하고 있단 걸 안 지크가 등을 돌렸다.
그곳엔 지크가 벽에 기대어 놓은 윈두르가 있었다.
평소에도 무척이나 희한하게 생긴 윈두르지만, 지금의 모습은 평소와 또 달랐다. 마치 며칠 동안 강풍에 시달린 나무처럼, 나뭇가지 같은 윈두르의 여러 날들이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저거 언제부터 저랬냐?”
“네가 다음 나무에 대한 단서 운운하자 변하기 시작했어.”
지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벽 쪽으로 걸어가 윈두르를 쥐었다.
스으윽.
지크가 들어 올리며 방향이 좀 틀어지자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윈두르의 날들이 움직였다. 날들은 아까와 똑같은 방향 쪽으로 휘었다.
지크는 윈두르를 들고 방을 몇 바퀴 돌았다. 라일라의 시선이 지크를 따라 움직였다.
지크가 어떤 방향으로 몸을 돌리더라도 윈두르의 날들은 계속 같은 방향 쪽으로 움직였다.
“…이 녀석이 어떤 일정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네 의견은 어떠냐.”
“나도 같은 생각이야.”
“가리키는 방향은 아마 나무가 있는 장소고.”
“그것도 같은 생각이야.”
지크가 윈두르를 응시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원상태로 돌아와 봐.”
지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윈두르의 날들이 원상태로 복귀됐다. 곧 윈두르는 평소의 나뭇가지 같은 형태로 돌아갔다.
“나무가 있는 곳은?”
윈두르의 날이 다시 휘었다.
확실해졌다. 윈두르는 나무가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다.
“대체 이 녀석은 뭐 하는 녀석이야?”
알려주려면 진작부터 알려주든가. 지크는 투덜거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거 사실 말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라일라의 말이 무척이나 설득력 있게 들리는 건 지크가 정신이 나갔기 때문은 아니리라.
혹시 이 새침데기 검이 다른 정보도 가르쳐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지크는 여러 질문을 해봤다.
‘클로원의 다른 주요 유적이 어디 있는가’부터 마인들의 위치, 에스텔레이드와 토르니움의 위치, 그렌 제너드의 위치 등등.
하지만 윈두르는 그 어느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반응하는 건 오직 하나, 나무의 위치뿐이었다.
그마저도 하나뿐이다. 지크 일행이 한 추측대로라면 앞으로 남은 나무는 두 그루여야 한다.
“남은 나무가 한 그루뿐이거나, 다른 한 그루는 찾을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야겠지.”
지크가 윈두르를 식탁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혹은 두 나무가 전부 지금 가리킨 방향에 있거나.”
라일라가 다른 의견을 냈다. 하지만 지크는 부정적이었다.
“그건 너무 희망적인 관측이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만.”
보통 희망적인 관측은 별로 현실성이 없다는 걸 지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쨌든 단서는 단서다. 이 녀석이 가리키는 곳에 뭐가 있는지는 가보면 알겠지.”
지크는 옆에 내려놓은 윈두르의 자루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 * *
도시를 떠나기 전, 지크는 비올루윈에서 조금 떨어진 산에 들렀다. 함께 하는 이는 라일라뿐, 제자들은 도시에 남았다.
그 산은 산세가 상당히 험한 곳이었다. 그러나 라일라는 능숙하게 산을 탔다. 지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오르길 얼마. 지크와 라일라는 산 아래에서 미리 봐놓은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험한 산세가 잠시 완만해지는 곳이었다. 주변에 하늘을 가리는 큰 나무도 없어 햇볕이 상당히 잘 들었다.
지크는 그곳에 땅을 파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람 키보다 더 깊은 구덩이를 파낸 지크는 마법 상자에서 마릴린의 시신이 든 관을 꺼냈다.
구덩이에 관을 넣기 전, 지크는 뚜껑을 열어 마릴린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끔찍한, 하지만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크는 뚜껑을 닫았다. 구덩이 안에 관을 집어넣은 후, 그 위로 파낸 흙을 다시 밀어 넣었다.
라일라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마릴린의 무덤이 완성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땅을 고르게 다진 후, 지크는 사람만 한 바위를 무덤 앞에 놓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곧게 펴 바위 표면에 가져다 댔다.
그그극!
마력이 가득 들어찬 손가락이 바위를 무척이나 손쉽게 긁어냈다. 지크는 손가락을 움직여 바위에 글자를 새겼다.
『어리석은 영원한 꿈을 원하던 자, 여기에 잠들다』
손바닥을 부딪쳐 돌가루를 털어낸 후, 지크는 꽃 한 다발을 바위 앞에 놓았다.
여태껏 뒤에서 지크가 하는 일을 보고만 있던 라일라도 그때만큼은 앞으로 나와 지크처럼 바위 앞에 꽃을 놓았다.
그 후, 둘은 잠시 동안 무덤을 응시했다.
“끝났구나.”
“그래.”
라일라의 말을 지크가 담담히 긍정했다.
“무덤을 보니까 기분이 좀 그렇네.”
라일라의 말투에는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같이 다닌 기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마릴린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은 상당히 컸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빠르게도 친해졌어.”
“나에 대한 집착만 아니면 녀석의 성격은 활달하고 친근한 편이니까. 사람 사귀기에는 무척 좋은 성격이지.”
“확실히 그랬지. 너에 대한 집착은 끔찍했지만. 무슨 말만 하면 너를 좋아한다고 노래를 불렀거든.”
“그건 아마 네 감정을 일찌감치 눈치채고는 널 흔들기 위해 한 말이었을 거다. 네가 아는 정보를 쉽게 끌어내기 위해서 말이야. 잘만 사용한다면 효과가 상당한 수법이지.”
라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뭐, 너를 견제하기 위한 마음도 없진 않았을 테고. 같은 사람을 좋아할 때, 라이벌에게 자신의 마음을 계속 말해서 라이벌의 호감 표현을 주저하게 만드는 방법이야. 그것도 나름 쏠쏠해.”
“…정말로 여러모로 대단한 녀석이었네.”
라일라가 허탈하게 말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묻혀 있지.”
지크는 마릴린의 무덤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그리고 등을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다.”
그 목소리에는 분명, 어떠한 결의가 뚜렷이 느껴졌다.
* * *
모든 할 일을 끝내고 지크 일행은 비올루윈을 떠났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일행의 리더인 지크도 알지 못했다. 그저 윈두르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걸었다.
과연 그 주인에 그 검인지, 윈두르의 길 안내 방식은 오로지 직진이었다. 높은 절벽과 넓은 강, 깊은 숲을 맞닥뜨렸을 때도 돌아가는 길을 안내해주는 상냥함 따위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검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게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크 덕에 험지의 강행군에 익숙한 일행은 별 어려움 없이 윈두르의 안내대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마치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서 있는 무척이나 거대한 산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