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6화
“용사 노릇을?”
“그래.”
라일라는 지크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없는데?”
그녀는 마법 상자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마치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운 얼굴로 지크에게 권했다.
“자, 일단 마셔봐. 마시고 우리 신관이나 의사를 찾아가 보자.”
“…마음이야 이해한다만, 난 아픈 게 아냐.”
“원래 자기 병은 자기가 모르는 법이야. 일단 마시고 이야기해, 우리.”
자꾸 지크의 손에 포션병을 들려주려는 라일라. 지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아픈 거 아니라니까.”
“아픈 게 아닌데 네가 그런 말을 할 리 없잖아.”
지크의 강한 부정에도 라일라의 생각은 확고한 모양이었다.
‘혹시 마릴린의 배신이 생각 이상으로 충격이 컸던 건가?’
걱정스러운 생각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 그녀의 속내를 쉽사리 짐작한 지크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본심을 얘기하지 않는다면 이 우스꽝스러운 오해가 멈추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에 지크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걱정 마라. 나도 무슨 ‘세계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거나 ‘불행한 자들이 한 명도 없는 이상을 위해서’라거나 같은, 두드러기가 나다 못해 피부가 썩어 문드러질 생각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건 아니니까.”
무척이나 지크다운 말에 라일라가 이성을 되찾았다.
“그럼 그 소름끼치는 말의 저의가 뭔데?”
“그렌 제너드를 엿 먹이기 위해서다.”
지크가 당당하게 말했다. 이것도 무척이나 지크다운 말이다.
‘응, 아픈 건 아니구나.’
라일라는 자신의 걱정을 우아하게 마음의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설명을 계속하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 복잡한 이유는 아니야. 대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렌 제너드 그놈이 용사라는 타이틀에 집착하고 있는 건 확실해.”
그건 라일라도 동의하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렌의 용사 칭호를 빼앗겠다는 거야?”
“그래. 내가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그건 예의가 아니지.”
지크가 웃었다. 당장이라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라일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비릿하게 웃는 지크의 얼굴은, 왕년에 마왕이라 불렸던 기세와 공포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래도 당장 죽이려 들지는 않네?”
“놈이 회귀를 할지 모르니까.”
안 그래도 이번에 마릴린의 행동을 보고 든 확신이 하나 있다.
“마릴린이 최대한 나를 죽이려 들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지?”
“그거야 뭐….”
자기가 유리하다고 생각됐을 때, 마릴린이 석상과 그림자의 움직임을 조정하여 조금 사정을 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거 아냐? 녀석의 입장에서는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으면 사로잡는 게 낫잖아.”
라일라는 다시 코어로 삼고 지크에게는 정보를 빼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크는 그 생각에 좀 부정적이었다.
“그러기에는 회귀란 능력이 너무 중요해. 자칫 손에 사정을 둬서 나를 놓치기라도 했다가는 녀석들 입장에서 정말 난리가 나는 거니까.”
“으음, 그렇게 말하면 또 그렇네. 그럼 널 죽이지 않을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건가?”
“나는 아마도 회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는 중이다. 솔직히 난 예전부터 회귀의 발동 조건이 죽음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어.”
이유는 별다른 게 없다. 그가 회귀를 했을 때, 그는 그렌에 의해 몸이 두 쪽이 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렌 녀석의 회귀 조건도 죽음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 그런데 마릴린이 내가 죽는 걸 꺼리는 것 같아 의심이 들었다. 녀석은 내가 죽음으로써 다시 회귀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만약 그렇다면 녀석도 회귀의 조건을 죽음으로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말은 곧, 그렌 제너드의 회귀도 죽음으로부터 발동한다는 뜻이 된다.
“…정말 그렇다면 그렌 제너드를 죽이는 건 자제해야겠네. 적어도 녀석의 회귀 능력을 봉쇄했다고 판단될 때까지는 말이야.”
섣불리 그렌을 죽였다가는 그들이 한 모든 것들이 원점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회귀의 주체가 그렌임에도 불구하고 지크의 기억이 보존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 그래서 용사 노릇도 당장 할 생각은 없어. 너무 서둘러서 용사 칭호를 빼앗았다가는 녀석이 이번 시간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살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야.”
“이제 와서 자살하기엔 바뀐 게 너무 많지 않아? 하려면 진작 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그런데도 회귀하지 않고 꿋꿋이 용사 노릇을 하려는 점만큼은 순수하게 칭찬하고 싶다.”
라일라는 지크가 한 칭찬이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불순하게 들렸다.
“그렇다고 녀석을 봐줄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녀석의 회귀를 막는 즉시 난 용사 칭호를 얻기 위해 움직일 거야.”
지크의 눈이 스산해졌다.
“쉽게 죽여줄 순 없지. 녀석이 죽는 건 자신이 가장 원하던 걸 내게 빼앗긴 이후여야만 해.”
지크의 선언을 듣고 라일라는 생각했다.
그렌 제너드가 얼마나 뛰어난 능력과 대단한 수를 숨겨뒀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살아왔건, 그의 말년은 절대로 편하지 않을 거라고.
* * *
지크와 라일라는 무덤에서 정확히 12일을 더 머물렀다.
나무의 조사에 라일라의 예상대로 정확히 10일이 걸렸고, 나머지 2일은 멀쩡한 석실의 나머지 글자들을 다시 한번 훑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그동안 지크는 화염의 눈물을 통해 마력을 깨우는 것에 집중했다.
12일이란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다.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무척이나 느리게 갈 수도 있고 순식간에 지나갈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라일라에게 12일이란 기간은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지하 무덤이라는 환경이나 나무와 석실의 조사는 그녀의 시간 감각을 느리게 만드는 원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시간을 너무 길게 느낀 원인은 하나.
마릴린이 폭로한 그녀의 감정 탓이었다.
제자들은 먼저 지상으로 올라가고 마릴린은 사망한 지금, 이 인적 없는 고요한 곳에서 얼마 전 자기 감정을 들킨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온갖 잡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지크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지크는 그 사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안과 함께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뭔가 간단한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냐?’
하지만 그런 생각이 조금씩 쌓여가는 와중에도 라일라는 나무와 석실에 관한 조사를 완벽하게 끝냈다. 대단한 능력과 집중력이었다.
라일라의 조사가 끝나자 둘은 무덤을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봤던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은 사라지고 여기저기 파괴되고 황폐화된 무덤을 뒤로한 채 긴 계단을 올랐다.
그 시점에 라일라의 불만, 불안은 한계까지 치솟았다. 부루퉁한 심통이 얼굴에 비칠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을 흘끗 보고 지크가 피식 웃었다.
“내가 네 감정을 알고도 별 말을 하지 않는 게 불만이냐?”
“으, 응?”
라일라는 깜짝 놀랐다. 이제와 지크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불만과 불안에 눌려 있던 부끄러움이 다시 고개를 세차게 들이밀었다. 라일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 무슨 소리야?”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목소리의 음이 적어도 세 단계는 높아져 있었다. 삑사리도 두 번이나 났다.
라일라의 얼굴이 좀 더 붉어졌다. 하지만 허세를 포기하진 않았다.
“크흠! 큼! 저기, 너와 마릴린이 뭔가를 오해하고 있던 모양인데, 난 널 좋아하는 게 아냐.”
“그래?”
“그래.”
“알았다. 오해했던 모양이군. 미안하다. 다시는 그런 말 꺼내는 일 없을 거야.”
‘어라?’
아무 일 없다는 듯 계단을 올라가는 지크의 등을 라일라가 당황해서 쳐다봤다.
부끄러움에 무턱대고 한 부정을 지크가 너무도 태연하게 받아들이자 당황한 것이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계단을 오르기만 했다. 앞서 걷던 지크가 뒤를 돌아봤다. 불만에 가득 찬 라일라의 얼굴이 보인다. 그가 피식 웃었다.
“원하는 대로 해줬는데 표정이 왜 그래?”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을 뿐이다.
지크가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았다. 라일라도 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뭐야?”
불퉁함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린다. 지크는 무릎을 굽혀 계단 몇 칸 아래에 있는 라일라와 시선을 맞췄다.
“갑작스럽게 느끼는 새로운 감정이 당황스럽지?”
저도 모르게 일단 부정부터 하려던 라일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기엔 지크의 눈이 너무 진지했다.
“특히 너는 그게 더 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식은 많지만, 감정 면에서 너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평소에 익숙하게 느끼던 감정과는 무척이나 다른 감정에 당황스러울 만도 하지.”
라일라는 묵묵히 얘기를 들었다.
“서투르게 그 감정을 예단하려 하지 마. 조금씩 느끼고 관찰해봐. 그리고 천천히 파악해. 너라면 얼마 되지 않아 그 감정과 당당히 대면할 수 있을 거다. 그때가 되면 네가 하고 싶은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거야. 그때 행동하면 된다.”
지크는 무릎을 펴 몸을 바로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라일라의 눈을 직시했다.
“원래는 네가 천천히 그 감정에 익숙해지길 바랐지만, 마릴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충격요법이 되어버렸으니 네 혼란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때 말한 것처럼 지금의 상황도 나쁘진 않을 거야. 너라면 잘 해낼 거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
라일라는 잠시 할 말을 찾듯 입을 오물거리다 조용히 내뱉었다.
“…네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아.”
지크가 소리 내어 웃었다.
“당연하지. 이건 내가 가문에서 쫓겨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느꼈던 감정을 토대로 이야기한 거니까. 아직 스틸월의 물이 덜 빠졌을 때 느꼈던 감정이지. 요새 회귀 전, 특히 마왕이 되기 전의 기억을 곱씹어 보고 있거든.”
‘아!’
라일라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지크가 예전 했었던 사랑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는 것을.
그것을 깨닫자마자 라일라는 심부에서 뭔가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분명 질투였다.
하지만 라일라가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닫기도 전, 안쓰러움이란 감정이 다시 라일라의 내면을 뒤덮었다.
스틸월에서 모어로 변하는 과정에 많은 사건이 있었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절대 지크에게 좋은 사건이 아니라는 것도. 그걸 생각한다면 지크의 사랑이 결코 순탄치 않게 끝났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라일라는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래도 꽤 상냥하게 알려주네?”
“동료잖냐.”
동료. 팀 플랫과 마릴린 프릴. 회귀 전 네 측근 중 둘의 생명을 끝장낸 지크에게 무엇보다 복잡한 울림을 갖는 단어일 것이다. 라일라는 이 화제도 대화를 길게 잇지 않았다.
“알았어.”
그녀가 대답했다.
“네 말대로 해볼게. 나한테 나쁜 일도 아닌 것 같으니까.”
“잘 생각했다.”
라일라가 슬쩍 지크의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
“저기 말이야, 지크.”
“왜?”
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내 감정을 확실하게 직시했을 때 말이야. 혹시 고백… 같은 걸 한다면 넌 받아줄 거야?”
지크가 웃었다. 그건 무척이나 건방진 웃음이었다.
“백 년은 일러, 멍청아.”
“…방금 전에는 흐름상 고개를 끄덕여주는 타이밍 아니었어?”
“나 같은 대단한 사람 곁에 서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원한다면 어디 반하게 만들어봐. 앞으로 기회는 많을 테니까.”
자신만만한 미소가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밉다.
라일라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고 지크를 지나쳐 계단을 올랐다. 그 뒤를 지크가 빙글빙글 웃으며 따라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