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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375화 (375/628)

제375화

지크는 마릴린을 내려다봤다. 피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은 얼핏 봐도 무척 끔찍했지만, 의외로 표정은 꽤 평안했다.

끝까지 지크의 패배를 믿고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것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생각 때문일까.

그저 죽은 후의 단순한 육체적 반응인지도 모른다.

지크는 마릴린의 눈을 감겨주기 위해 꿇었던 무릎을 펴 일어났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주변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는 그림자들이다. 아직까지 마릴린의 대기 명령이 남아 있는지 공격을 가하는 녀석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을 것이다.

마릴린이라는 명령권자가 사라진 이상, 그들은 원래의 시스템대로 지크와 라일라에게 공격을 가할 것이다.

하지만 지크와 라일라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마릴린은 죽고 석상들도 모조리 파괴당했다. 고작해야 숫자로 밀어붙이는 그림자 따위 지크와 라일라의 상대가 아니다.

“라일라.”

“으, 응?”

지크의 부름에 라일라가 대답했다. 어색한 얼굴로 쭈뼛쭈뼛거리며 그녀가 다가왔다. 아무래도 마릴린의 폭로 영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크는 그런 라일라의 모습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깐 이 녀석의 시신 좀 지켜줄 수 있겠어?”

슬슬 그림자들이 움직이려는 낌새가 보인다.

시신에까지 공격을 가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혹 전투의 여파에 시신이 손상될지도 모른다.

지크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 할 정도로 부끄럼을 느끼던 라일라였지만, 지크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지 않자 조금씩 진정됐다.

“알았어.”

별다른 이유도 묻지 않고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지크가 마릴린의 시신 옆에서 떨어지고, 그 자리를 라일라가 채웠다.

라일라는 마릴린의 시신을 내려다봤다. 지크의 인생을 뒤틀어 놓고 라일라 자신을 코어로서 삼으려 드는 조직의 일원. 분명한 적이다.

하지만 마릴린을 내려다보는 라일라의 시선은 복잡했다. 그래도 정이 든 것이다.

게다가 마릴린의 태도를 보면 오직 임무 때문에 자신에게 살갑게 대한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분명, 나름의 정이 있었다고 라일라는 생각했다.

콰아앙!

옆에서 폭음이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지크가 방해되는 그림자들을 치우고 있었다.

마릴린의 명령하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그림자들이 지크에게 적대적으로 달려들었지만 지크의 발걸음을 막을 순 없었다.

그림자들은 라일라에게도 달려들었다. 하지만 지크와 같이, 라일라에게도 위기감이란 보이지 않았다.

라일라가 지팡이를 들었다.

화르륵!

그녀의 지팡이에 불꽃이 솟았다.

퍼어엉!

원형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불꽃이 그림자들을 살라 먹었다.

바닥에 엎지른 검은 물감을 깨끗한 수건으로 스윽 닦아내는 것처럼, 주변 그림자들이 사라지며 바닥의 모습이 드러났다.

물론 그림자들의 수가 수인지라 그 바닥이 다시 그림자들로 뒤덮일 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그런 그림자들마저도 다시 라일라의 마법에 휩쓸려 나갔다.

마릴린의 시신을 라일라에게 맡긴 지크는 가장 가까운 석실로 향했다.

라일라의 성화 때문에 최대한 석실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전투 지점과 가장 가까이 있던 석실이었던 탓에 반쯤 무너져 있었다.

다행히 석실 입구는 조금 주저앉긴 했지만 그래도 구실은 하고 있었다. 지크는 허리를 숙여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무사하군.’

돌 부스러기가 조금 쌓여 있을지언정 안쪽의 관은 멀쩡했다.

지크는 관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망설임 없이 석관을 열고 그 안의 시체를 꺼내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과거 클로원의 황제로서 대륙을 호령하며 살다 간 시체에 하기엔 너무한 대우였다.

그러나 지크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턱!

관을 어깨에 메고 석실을 나왔다. 그림자들이 지크를 반겨줬지만 지크는 대충대충 윈두르를 휘둘렀다.

그것만으로 주변 일대의 그림자들이 일소됐다.

지크는 라일라에게 덤벼드는 그림자들의 일각을 무너뜨리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마릴린 거야?”

“그래.”

지크는 석관을 옆에 내려 두고 그 안에 마릴린을 집어넣었다. 라일라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관의 주인은, 어떻게 보면 라일라의 친척이라고 할 수 있는 자다. 하나, 라일라는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느끼는 점이 없었다.

오히려 예전 연구소에서 본 파이넬의 경우, 클로원에게서 시작된 회귀 능력으로 사람들 운명을 멋대로 조작하는 그렌 제너드의 경우 등등으로 클로원에 대해 나쁜 감정이 쌓여 있는 그녀였다.

지크는 마릴린의 시신을 넣은 석관을 마법 상자에 넣었다.

“나가서 묻어줄 거야?”

“그래도 마지막으로 배신을 때리기 전까지는 나름 좋은 부하였다. 무덤 정도는 준비해줘도 괜찮겠지.”

그렇게 말하곤 지크는 걸음을 뗐다.

“일단은 그림자들부터 진정시키자고. 화염의 눈물도 회수하면서 말이야.”

“좋아.”

둘은 그림자들을 뚫고 피라미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녹색 나무가 있는 피라미드의 중앙부에 도착했다.

하지만 거기에 녹색 나무는 없었다. 검게 탄 잿가루가 바닥에 짙은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나무의 진짜 모습이군.”

지크는 녹색 나무의 압박에서 벗어난 갈색 나무를 보고 중얼거렸다.

가지에서 불꽃을 내뿜었던 불의 나무, 물줄기를 흘려내던 물의 나무처럼, 갈색 나무도 가지에 우둘투둘한 암석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크와 라일라의 추측처럼 대지 속성의 나무가 확실한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대지의 나무는 원래보다 훨씬 더 가지를 확장시켜, 방의 대부분을 가지로 뒤덮고 있었다. 몇몇 가지는 벽과 바닥을 파고들어 있었다.

지크는 몸을 돌려 방의 입구를 막아섰다.

“일단 저 녀석들부터 없애자고.”

윈두르를 휘둘러 방으로 들어오려는 그림자들을 베기 시작한다. 이 방에서는 그림자들이 솟아나지 않았다. 입구로 들어오는 놈들을 저지하면 그만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라일라가 대지의 나무에 손을 올렸다.

녹색 나무에 휘감겨 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마력이 도도하게 흐른다. 하지만 라일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정도 마력은 물의 나무에서도 느껴본 바 있다. 그녀는 침착하게 대지의 나무의 마력의 흐름을 따라갔다. 그리고 곧 그림자들을 생성해내는 시스템에 접촉할 수 있었다.

‘많이 훼손되어 있네.’

애초에 녹색 나무로 제어되는 마력을 바탕으로 그림자들을 뽑아내는 시스템이니, 제어를 벗어난 대지의 나무의 마력을 시스템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시스템이 깨지며 그림자들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때까지 놓아둘 필요도 없었다.

우우웅!

라일라의 마력이 대지의 나무를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결코 대지의 나무의 마력을 거스르지 않았다.

괜히 자기 편하자고 나무의 마력을 뒤틀려 했다간 파이넬 꼴이 날 게 뻔했다.

라일라의 마력은 막강했지만 그렇다고 나무의 마력에 비할 바는 아닌 것이다.

라일라의 마력이 시스템에 닿았다. 너무 세찬 나무의 마력에 몇 번이나 휩쓸릴 뻔했지만, 물의 나무를 살폈던 경험과 라일라의 재능 그리고 마릴린이 하는 것을 훔쳐 배운 덕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라일라는 시스템에 마력을 주입했다.

멈칫!

지크를 향해 낫으로 변형시킨 팔을 휘두르던 그림자의 움직임이 멎었다.

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우글대던 다른 그림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스으윽.

그림자가 서서히 땅으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진흙처럼 형태를 무너뜨리던 그것들은 곧 아무런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지크는 피라미드 밖으로 나가 봤다. 밖에도 그림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확인을 끝낸 지크는 다시 피라미드 안으로 돌아왔다.

“어땠어?”

허리를 굽히고 무성하게 뻗은 대지의 나무의 가지 아래에 몸을 끼워 넣고 있던 라일라가 고개만 돌려 물었다.

“싹 사라졌다.”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고 라일라는 계속해서 가지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쯤 들어갔을까. 라일라가 붉은 구슬 하나를 가지고 다시 나왔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화염의 눈물이었다.

지크가 그것을 훑어봤다.

“깨지거나 그런 데는 없어?”

“깨끗해.”

라일라가 지크에게 화염의 눈물을 던지듯 건넸다.

지크가 모든 마력을 낼 수 있도록, 대지의 나무의 구속을 완전히 벗겨버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궁지에 빠졌을 때 마릴린이 대지의 나무의 구속을 벗기도록 미끼는 뿌려놨지만 그게 통할 가능성은 적었다.

실제로 마릴린은 대지의 나무의 구속을 완전히 벗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크가 자신의 정체를 안다는 걸 인식한 이후에 한 행동이다. 실제로 그녀는 지크가 뿌려놓은 미끼 덕에 만약을 대비해 녹색 나무를 제거하는 조치는 해놨었다. 녹색 나무의 구속력을 약화시켜 석상과 그림자의 위력을 강화시킨 것도 그 조치 덕이다.

라일라는 그것을 이용했다.

그녀는 몰래 대지의 나무에 화염의 눈물을 설치하고 간단한 발동 장치 아티팩트를 만들어 숨겨놨다.

그리고 그걸 마릴린의, 녹색 나무의 제어력을 제거하는 조치와 연결했다.

마릴린이 조치를 발동할 시, 라일라의 의지대로 화염의 눈물의 마력을 마릴린의 조치를 경유하여 일거에 폭발시킬 수 있도록 말이다.

적어도 방위 시스템의 강화를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녹색 나무의 제어력을 조금쯤은 약화시키리라는 생각하에 숨겨 놓은 조치였다.

의도는 성공해서, 녹색 나무는 화염의 눈물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불타버렸다.

그리고 해방된 대지의 나무는 윈두르와 공명, 훌륭하게 지크의 마력을 모두 일깨웠다.

“역시 생각대로 그 녀석은 나무들과 공명을 해서 네 마력을 일깨우는 모양이야.”

라일라가 지크의 등에 있는 윈두르를 툭 쳤다.

“방위 시스템은 나무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다면 발동하는 모양이고.”

아마 윈두르와 나무의 공명을 시스템이 문제라고 판단해서 지크 일행을 제거하려 했던 모양이라고 라일라는 설명했다.

“꽤나 자세하게 알게 됐군.”

“마릴린이 옆에서 하던 일들을 열심히 봤거든. 녀석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어떤 식으로 마력을 움직였는지도 모조리 확인했고. 그래서 나무에 대한 이해도는 굉장히 깊어졌다고 자부할 수 있어.”

라일라가 암석이 우둘투둘 돋아난 암석들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럼 지금 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얻은 거냐?”

“대충은. 그래도 확실하게 확인을 할 시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얼마나 걸리지?”

“한 열흘 정도.”

“별로 오래 걸리진 않는군. 그럼 확인하도록 해.”

지크도 나무 쪽으로 접근했다. 라일라처럼 가지를 한번 만져봤다.

나무 특유의 거친 촉감과 암석의 질감. 그리고 그 안으로 흐르는 막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이 나무는 완전하게 족쇄에서 벗어난 거지?”

“보면 알잖아?”

라일라가 가지에 돋아난 암석들을 툭툭 두드렸다. 지크는 미소 지었다.

“우리 생각이 맞는다면, 그렌 제너드 그놈의 회귀 능력도 더 불안정해졌겠군.”

“그럴 거야.”

대답하면서도 라일라는 지크의 눈치를 봤다.

안 그래도 생리적으로 그렌을 싫어했고, 그렌의 악행이라 추측되어지는 것들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더더욱 그렌을 혐오하게 된 지크다.

그런 상황에서 측근 중에도 스파이를 심어놨다는 사실이 밝혀진 상황이니.

그렌에 대한 지크의 이미지가 어디까지 추락할지 라일라는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때였다. 지크가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라일라.”

“왜?”

“용사 노릇이란 거, 한번 제대로 해볼까?”

라일라가 눈을 깜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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