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4화
입을 뻐끔거리는데도 불구하고 나오는 소리는 없다. 마치 수면 위에 무리지어 모여든 붕어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라일라는 간신히 목에서 목소리를 짜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
아마 ‘그런 거 아냐!’라고 비명 같은 부정을 내지르려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시도는 마릴린에게 막혔다.
“그렇게 부끄러워 할 거 없어, 라일라.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거든. 나를 봐. 얼마나 당당하게 표현을 했니?”
“…적어도 네 행동이 사람들의 표준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어.”
마릴린이 입을 삐죽였다.
“사랑의 표현은 사람마다 다르니까.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개의 사랑이 있는 거야. 나같이 조금 적극적인 사랑이 있을 수도 있지.”
“조금?”
적어도 그 단어만은 확실하게 바뀌어야 한다. ‘적극적인’이란 표현도 그렇다.
아마도 ‘조금’은 ‘매우’로, ‘적극적인’은 ‘과격한’으로 바꾸어야 납득 가는 표현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마릴린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커다란 감정에 비교하면 그 정도 표현은 정말로 ‘조금’이지.”
저 뻔뻔함은 좀 배우고 싶다. 사랑이란 감정에 한해서만큼은, 저 뻔뻔함의 대명사인 지크마저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닌 척해 봐야 소용없어, 라일라. 내가 말했지? 조금만 눈치가 있으면 네 감정은 다 보인다고. 너도 지크 님의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알지 않니?”
라일라의 눈동자가 또르륵 굴렀다. 마릴린의 말에 순간 머릿속이 고장 난 듯 멈춰버렸다.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순식간에 그 뜻을 이해했다.
이해했기 때문에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라일라의 수치심을 머리끝까지 밀어 올릴 결론으로 이어졌으니까.
하지만 마릴린은 라일라가 결과를 회피하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지크 님은 이미 옛적에 네 감정을 알고 있었어.”
라일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의식적으로 지크를 돌아보려다가 황급히 멈췄다. 지금 지크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난 감정 같은 거 없다니까!”
미약한 반항을 해봤지만 목소리가 날아다녔다.
그 모습을 보고 마릴린이 폭소를 터뜨렸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달아오른 얼굴로, 눈에 창피함 때문에 새어나온 한 방울의 눈물까지 달고서는, 라일라가 마릴린을 노려봤다.
그 모습에 마릴린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세상에! 지크 님은 저런 순진한 아이를 옆에 두고도 시치미를 뚝 떼고 계셨던 건가요?”
지금껏 조용히 있던 지크가 입을 열었다.
“이제 막 사람들의 관계를 알아가는 녀석이야. 이런저런 조언보다는 직접 느끼고 깨닫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라일라가 ‘휙!’ 소리가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격하게 고개를 돌려 지크를 돌아봤다.
“지크 님은 무슨 딸아이를 둔 아빠인가요? 생각하는 게 무슨 할아버지 같아요. 아, 회귀를 하셨다고 하니까 실질적인 정신연령은 그쯤 되던가요?”
지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그라도 나이 들었다는 소리는 기분이 나빴던 걸까.
하지만 라일라는 계속해서 튀어나오는 새로운 정보에 정신이 없었다. 설마 지크가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어라? 그런데 직접 깨닫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면 제가 말하기 전에 말렸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네가 말린다고 말려지는 녀석이냐.”
“그렇긴 하죠.”
이미 서로 목숨 걸고 드잡이질까지 한 마당에 지크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마릴린이 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자기 감정을 깨닫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봐서 말이야. 천천히 깨닫는 것도 좋지만, 한 번에 확 뒤집어엎어서 정리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거치시네요.”
“마왕이라고 불린 나다. 이 정도는 거친 축에도 못 끼지.”
지크와 마릴린의 대화가 이어짐에도 라일라는 정신을 다잡지 못했다.
“한동안 라일라에게 대화는 무리일 것 같네요. 그럼 둘이서 느긋하게 이야기를 해볼까요?”
“이게 목적이었냐?”
“어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혀를 살짝 내미는 게 확신범이 분명했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뭐, 좋아.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꺼내 봐라.”
“와아!”
마릴린이 두 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그리고 급히 입을 열었다. 마치 1초라도 아까운 듯이.
그건 기묘한 광경이었다. 방금까지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전투를 하던 두 사람이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온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눈다.
박살 나서 바닥을 뒹굴고 있는 석상의 잔해도, 무수한 수로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그림자의 무리도 여기저기 부서지고 패인 주변의 모습도 그대로다.
하지만 마치 두 사람은 주변의 황량한 모습과 자신들은 관계가 없다는 것처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잡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술 한 잔 씩을 앞에 두고 나눌 만한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로 둘의 만남이 오래된 건 아니지만, 지크는 회귀 전의 마릴린의 모습을 통해서, 마릴린은 계속해서 들었던 지크의 이야기를 통해서 둘은 대화를 막힘없이 이어갔다.
머리가 백짓장처럼 물들었던 라일라도 눈앞의 상황이 이상한 걸 눈치챘다.
하지만 둘의 대화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어떤 결과가 나올지 쳐다볼 뿐이었다.
변화가 생긴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주륵!
환한 미소와 함께 쉬지 않고 떠벌이던 마릴린의 입가로 핏방울이 맺히더니 곧 가느다란 선을 그리며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
라일라는 당황했다. 말을 하다가 혹시 입술 안쪽이라도 깨문 것일까.
하지만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점점 더 많아졌다. 입 안 좀 씹었다고 나올 수 있는 피의 양이 아니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마릴린도 그걸 보는 지크도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눌 뿐. 혹시라도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닐까 싶어 라일라가 몇 번 눈을 비볐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릴린의 입에서 나오는 피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입에서 뿐만이 아니라 눈, 코, 귀 등, 얼굴에 뚫려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피가 흘러내렸다. 그에 따라 마릴린의 얼굴도 점점 창백해져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릴린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고 대화를 멈추지도 않았다.
그건 무척이나 기괴한 모습이었다.
마릴린의 말이 끊긴 건 그로부터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이후였다. 숨은 거칠고 얼굴의 반이 피로 덮여 있다. 초점이 흐릿한 것이 아마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슬슬 끝이냐?”
지크가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를 더 하고 싶어서 최대한 버텨봤지만, 이제 한계 같아요.”
“그러니까 조금 더 약한 저주를 걸지 그랬냐.”
“그러게 말이에요. 하려면 확실하게 하자는 생각으로 이 저주를 걸었는데, 너무 강했던 모양이에요. 자살에 어울리는 다른 저주들도 많은데 말이에요.”
그제야 라일라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했다.
마릴린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저주를 건 것이다. 지크는 그걸 알고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주는 의미로 대화를 받아준 것이고.
마릴린의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보였다.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몸의 상태가 나빠진 것이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지크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너와 진심으로 대화를 나눈 건 이게 처음일지도 모르겠군.”
“어머, 전 언제나 진심이었는걸요. 지크 님이 알고 있던 미래의 저도 그랬음이 틀림없어요. 내기해도 좋아요.”
“뻔뻔하기는….”
혀를 차는 지크의 반응에 마릴린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지크 님?”
“뭐냐? 내용에 따라서 들어주지 못 할 것도 없다만.”
“이기지 말아주세요.”
담담하게, 그녀는 지크에게 말했다.
“비참한 패배도 좋고, 여유 있는 승리의 양도여도 좋아요. 저희 조직과의 싸움에 져주세요. 그리고 다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시간의 굴레 속으로 돌아와 주세요. 그래서 다시 만나요, 우리.”
지크는 팔짱을 끼었다.
피범벅이 된 마릴린을 보며 그가 입을 열었다.
“너와 만나는 건 이게 마지막일 거다. 너와 대화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거고. 네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겠지.”
이보다 더 단호할 수 없는 거절. 하지만 마릴린은 예상하고 있던 것인지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잔인하시네요.”
“남의 인생을 가지고 논 너희보다는 낫다고 본다만?”
“원래 그런 것들은 상대적인 법이죠. 저한테는 지금 지크 님의 말만큼 잔인한 게 없어요. 그리고 원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감정인 법이죠.”
“훌륭한 이중잣대로군. 그건 나와 취향이 비슷하구나. 마음에 든다.”
지크가 감탄한 듯 박수를 쳐주자 마릴린이 부끄러운 미소를 띠었다.
지금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광경을 라일라는 멍청하게 쳐다봤다.
“라일라.”
“…으, 응?”
갑자기 말을 거는 마릴린에게 라일라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번 시간선에서 지크 님과 즐겁게 지내도록 해.”
“그러니까 난 그런 게 아…!”
라일라의 말은, 마릴린의 차가운 광기와 집착이 어린 눈을 보고 멎었다.
“하지만 지크 님은 결국 내 게 될 거야.”
“…….”
그 집요한 선언에 라일라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조금 전까지의 동요의 빛이 사라진 라일라가 잔잔히 말했다.
“아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마릴린. 이기는 건 우리일 테니까.”
“그렇지. 잘 말했다, 라일라.”
지크가 라일라의 편을 들자 마릴린이 샐쭉하게 지크를 노려봤다.
“라일라만 편들어주시는 건가요? 무척 질투 나네요.”
“질투한다고 해도 소용없다. 네가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솔직히 그런 걱정도 들어요. 이 정도까지 계획이 어그러진 만큼, 어쩌면 우리가 지는 건 아닐까 말이에요. 하지만 그래도 지크 님. 전 끝까지 당신의 패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마릴린이 크게 피를 토했다. 그 사이로 붉은 색의 살점들이 보였다. 내장이 찢어져 넘어오고 있는 것이다.
지크와 라일라는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후우!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마릴린이 지크를 쳐다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기괴한 미소를 지은 채, 마릴린이 지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크…님…반드…다시…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털썩!
잔혹한 저주가 온몸을 갉아먹고 있는 와중에도 절대 쓰러지지 않던 마릴린의 몸이 앞으로 거꾸러졌다.
그녀의 주위로 피가 쉴 새 없이 뿜어진다.
지크가 천천히 마릴린의 곁으로 다가갔다. 감기지 않은 마릴린의 눈을 손으로 감겨주며 나직이 말했다.
“잘 가라, 마릴린.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그렇게 지크는, 자신의 마지막 측근과 완벽한 결별을 고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