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3화
마릴린은 자신이 꽤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건방진 소리는 아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녀는 꽤 아니,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다.
괜히 조직이 지크의 아래에 넣을 스파이로서 발탁한 게 아니다. 아무리 성격이 맞는다 하더라도 실력이 없으면 지크가 신뢰하는 최측근까지 될 수가 없다.
그에 따라 마릴린은 높은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저주술사라는 특성상 정면대결에선 약할 수밖에 없더라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에선 상대가 누구건 대부분 이길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 실력은 미래에도 꾸준히 상승해, 결과적으로 자신과 대적할 수 있는 자는 얼마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미래에 힘의 마왕 지크 모어의 최측근으로서, 마인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축에 들어가게 될 것을 생각하면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마릴린은, 자기가 품은 자신감이 무척이나 값싸고 보잘것없다고 느꼈다.
어머어마한 굉음이 무덤을 울린다. 지크가 한, 윈두르를 휘두르는 행동. 이번 전투 때 몇 번이나 본 행동이다.
그러나 결과는 같지 않았다.
느끼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마력을 품은 검기가 그녀의 옆을 스쳤다.
검기의 진행을 방해하는 것은 없었다. 대지고 석실이고 그림자고 석상이고, 그 검기 앞에서는 모두 평등했다.
평등하게 잘려 나갔다.
거침없이 진격한 검기는 무덤의 끝에 도달해 벽에 부딪쳤다.
콰아아앙!
검기는 그제야 사라졌다. 하지만 품고 있던 위력이 위력인 만큼 곱게 사라지지 않았다.
벽에서 떨어진 파편이 지면으로 추락하는 모습이 보인다. 나무의 마력으로 보호받아 일반 벽보다 훨씬 더 강한 강도를 자랑하는 벽에 거대한 상흔이 생겼다.
쿵! 쿵! 쿠쿵!
검기에 휘말려 잘려나간 석상들이 넘어졌다. 깨끗하게 일자로 베어진 그것들이 다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마릴린은 지팡이를 꽉 쥐고는 몸을 기댔다. 다리가 조금 풀린 것이다. 지금 지팡이를 놓는다면 볼썽사납게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 지크의 일격이 낳은 참상을 확인했다.
깔끔하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이었다.
지크의 바로 앞부터 생겨난 검흔은 일직선으로 쭉 뻗어 있었다.
깨끗하게 일소된 그림자와 세로로 두 동강이 난 채 널브러져 있는 석상들의 잔해를 지나 이어진 검흔은 진로상에 있는 석실들마저 갈라버린 후 깊이 팬 벽의 상처에까지 이어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검기의 위력을 알 수 있는 무시무시한 광경.
마릴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녹슨 풍차를 억지로 돌리는 것처럼 돌아가지 않는 목을 다시 움직여 지크를 바라봤다.
그는 상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제 봐도 사랑스럽던 얼굴이다. 하지만 지금 마릴린은, 지크를 대면한 이후 처음으로 그 얼굴에서 사랑이 아닌 다른 감정을 느꼈다.
공포였다.
공포가 입을 열었다.
“어떠냐, 마릴린. 마왕의 힘이란 걸 본 소감은.”
다른 때라면 지크의 질문에 냉큼 대답했겠지만 지금만큼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력한 접착제로 입술 사이를 붙여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야!”
큰 소리가 들렸다. 라일라가 도끼눈을 뜨고 지크를 보고 있었다.
“석실까지 훼손시키면 어떡해! 아직 해석하지 않은 문자가 있단 말이야!”
“어차피 중요한 것도 별로 없을 텐데, 뭐.”
“그건 확인하지 않고는 모르지! 어디에 어떤 정보가 있을지 모른단 말이야!”
전투 중에 다투기 시작하는 둘. 다른 사람이 본다면 급박한 전투 상황 중에 뭐 하는 것인지 당황할 광경이다. 혹자는 한심함에 혀를 찰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 두 사람이 어리석어서 전투 중 다투는 게 아니었다.
‘여유야.’
주변이 석상과 그림자로 둘러싸여 있더라도 자신들의 안전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릴린은 저 자신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 알았어!”
지크가 투덜대며 다시 윈두르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또다시 터지는 폭음. 주변에 있던 석상 열 체가 일시에 무너졌다. 근처에 있던 그림자들이 일소된 건 덤이다.
조각조각 나 무너지는 석상들의 모습에 마릴린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도대체 그 짧은 사이에 몇 번을 벤 것일까.
그러나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 장본인은 별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됐지?”
“그래.”
이야기를 나누는 지크와 라일라를 보며 마릴린은 정신을 차렸다.
아직 전투는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의 전투는,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전투다.
아무리 지크가 막대한 힘을 휘두른다고 해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 공격해야 해!’
이유 있는 여유라지만 방심은 방심이다.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아마 지금이 유일할 터.
마릴린이 마력을 움직여 석상과 그림자들을 움직였다. 석상과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기민했다. 그것들에 마력이 물밀듯 주입된다.
‘역시 나무가 완전히 해방된 모양이야.’
석상과 그림자에 주입되는 마력이 많아져 자연스레 그것들의 힘도 강해진 것이다.
하지만 마릴린은 기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석상과 그림자가 강해진 것보다 지크가 훨씬 더 강해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릴린의 걱정을 안고 석상과 그림자들이 지크와 라일라에게 달려들었다.
“도와줘?”
라일라가 물었다. 하지만 지크는 당연하게도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라일라도 의례적으로 한 말일 뿐인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히려 팔짱을 낀 후 방관 상태로 들어갔다.
이 상태의 지크가 얼마나 강한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지크가 움직였다.
팔을 날카로운 칼날로 바꾼 채 달려드는 그림자를 너무도 쉽게 자른다. 차라리 진흙이 더 단단해 보일 정도였다.
쿠웅!
석상 하나가 지크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석검을 높이 쳐든 후 지크를 향해 내려쳤다.
그에 대한 지크의 반응은 윈두르를 들지 않은 왼손을 살짝 드는 것이었다.
석검이 빠르게 내려와 지크의 머리 위까지 도달했다. 그때 즈음 되어서야 지크의 왼손이 움직였다.
지크의 손이 석검의 옆면을 때렸다.
콰앙!
마치 장난과도 같은 그 행동이 불러일으켰다고는 믿기기 어려울 만큼 큰 소리가 났다. 결과는 더욱 엄청났다.
지금껏 손목이 끊어지는 경우는 있었어도 석상이 검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석상은 너무도 허무하게 검을 놓쳤다. 옆으로 튕겨나간 석검은 몰려있는 그림자들을 짓누르며 몇 번 튕기다 바닥에 널브러졌다.
검을 놓친 석상이 무방비 상태로 지크의 앞에 놓였다. 지크는 가볍게 윈두르를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서걱!
가볍디가벼운 절삭음이 나며 석상의 어깻죽지부터 허리까지 잘려 나갔다.
저주를 준비하던 마릴린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말 그대로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다. 그것도 온갖 수련을 해 높은 경지에 진입한 어른과 이제 막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어린아이 수준의 차이처럼 보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윈두르가 폭풍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기서 뿌려지는 검기는, 그 위험성과 포악함을 떠나서 아름다웠다.
커다란 반월형으로 뿜어지는가 하면 산산이 쪼개져 눈처럼 흩날리거나 손가락만 한 굵기로 빛처럼 뻗어가기도 했다.
자신을 보호해줄 석상과 그림자들이 부서져나감에도 마릴린조차 일순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건 지크의 뒤에 있는 라일라도 마찬가지.
‘이런 식으로 싸울 수도 있었구나.’
지금까지 마력이 전부 해방될 때마다 지크는 기술을 사용하긴 해도 주로 거대한 마력을 휘두르는 전투방식을 취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적들을 제압하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하지만 지금의 지크의 전투방식은 다르다. 일견 우아하다고까지 보이는 전투방식.
정말로 환상적인 지크의 마력 제어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력 제어를 위해 마력의 양을 조절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해방된 마력을 정말로 원 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좀 더 다듬고 가공해서 세련되게 사용하고 있는 것뿐.
‘정말로 답이 없었겠네.’
라일라는 아주 잠깐이지만 지크를 적대했던 그렌을 동정했다.
콰앙! 콰앙!
석상이 빠른 속도로 파괴되어 간다. 석상이 그 지경인데 그림자들이 지크의 발목이라도 잡을 수 있을 리 없다.
마치 땅바닥에 기어가는 개미떼를 밟는 것처럼 지크는 그림자들을 너무도 쉽게 박살냈다.
마릴린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다. 계속해서 저주를 쏘아 보냈다. 하지만 마릴린의 저주는 지크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시야 안의 존재에게 내리는 저주는 아예 통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쿠웅!
석상이 무너져 내린다. 그것이 마지막 석상이었다. 남은 것은 바퀴벌레처럼 우글거리는 그림자들뿐.
하지만 그림자들은 지금의 지크는커녕 라일라에게조차 위협이 되지 않는다.
지크는 마릴린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떠냐, 마릴린. 마왕의 힘이란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알게 됐냐?”
“…….”
강화된 석상들이 모두 처리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오래되지 않았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석상의 파편들이 마치 처음부터 부서진 그 상태로 있던 것 같다.
그림자들이 아직 덤비고 있었지만 석상까지 모두 파괴된 마당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크가 장난처럼 튕기는 손가락에 그림자들이 손도 못 쓰고 파괴되는 걸 본 마릴린은 그림자들을 멈췄다.
“이걸로 끝? 아니면 다른 깜짝 쇼라도 준비해뒀나?”
지크의 질문에 마릴린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질문했다.
“그게 마왕의 힘이라고요?”
“그래. 정확히 말하면 내 마력이 모두 깨어난 상태지.”
“예전 몬스터 무리에서 비올루윈을 구했다고 했을 때 사용한 힘이 그거군요.”
“맞다.”
“아마도 계기는 나무와 연관되어 있고 말이죠.”
“그것도 맞다.”
“순순히 대답해주시네요.”
“이제 네가 어떤 정보를 얻는다고 해도 상관이 없으니까.”
절대로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지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생각하고 있는 게 있으면 해봐.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다려도 줄 테니.”
“…….”
마릴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침묵 속에서 지크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 권유다, 마릴린. 내 밑으로 와라.”
묵직한 말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건 정말로 최후의 권유라는 걸, 마릴린은 쉽사리 알아차렸다.
마릴린이 웃었다. 아주 예쁘고 아름답게.
“싫어요.”
“주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냐?”
“그것도 있네요. 하지만 제 의지도 분명히 존재해요.”
“뭐지?”
“지크 님의 곁에서 단 한 번의 생을 보내는 것보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계속 지크 님과 만나고 싶으니까요.”
“또 그 소리냐.”
“하지만 그게 제 진심인걸요. 게다가 이번 생에는 막강한 경쟁자도 있으니까요.”
마릴린이 라일라를 쳐다봤다.
한 발자국 뒤에서 사태가 돌아가는 걸 지켜보던 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지크 님을 두고 라일라와 경쟁을 하면 이길 자신감이 들지 않거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릴린의 말뜻을 알아챈 라일라가 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마릴린은 태연했다.
“순진한 건 좋지만 자기 감정을 너무 부정만 하는 것도 좋지 않아, 라일라. 네가 지크 님을 좋아하고 있는 거, 조금만 눈치가 있으면 전부 보이는걸.”
“무…!”
라일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