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0화
마릴린은 놀랐다. 아니, 기겁을 했다. 석검만 아니라면 당장 자신의 몸을 두 동강 낼 것 같은 윈두르도 그렇고, 지크가 자신의 배신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지크가 내뱉은 단어였다.
위치.
그건 훗날, 그녀가 지크의 측근으로서 사람들에게 불릴 명칭이 아니던가. 지금 등장할 단어가 절대 아니다.
그것도 지크의 입에서라면 더더욱.
“흡!”
지크가 힘을 줘 석검을 밀어냈다.
마릴린은 급히 정신을 차렸다. 허둥지둥 뒤로 물러나며 그림자들을 자신의 앞으로 모았다.
콰아앙!
“꺄아악!”
윈두르에서 나온 마력이 전면을 휩쓸자 마릴린이 비명을 지르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다행히도 그림자들을 방패 삼는다는 전략이 통해 그녀에게 직접적인 타격이 가진 않았다. 그저 검기에 의한 거센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때리는 정도.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시야가 아직 모두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마릴린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물러난 자리는 그림자들과 석상이 채웠다.
콰앙! 콰앙! 콰아아앙!
연신 굉음이 들린다. 지크가 가로막는 모든 걸 때려 부수는 소리일 것이다.
콰드드드득!
그녀가 물러난 자리에 얼음 기둥이 솟아났다. 분명 라일라의 마법이다.
그러나 마릴린의 빠른 판단과 행동 덕에 지크와 라일라의 공격은 그녀를 상처 입힐 수 없었다.
“상황판단 빠르네.”
얼어붙은 그림자들을 깨트리면서 라일라가 말했다.
“미래에 내 측근이 되었을 녀석이야. 게다가 대부분 참모로서 움직였지만 전투 능력도 나쁜 건 아니지. 너도 대련을 해 봐서 알 텐데?”
“그건 그랬지.”
라일라는 저번에 했던 대련을 떠올렸다. 정면대결에서 일반 마법사보다 불리하다는 저주술사라는 능력을 가지고 그녀는 상당히 대단한 움직임을 보였었다.
‘미래의 측근? 참모?’
지크와 라일라의 계속되는 대화에 마릴린의 경악은 깊어져만 갔다.
미래에 지크의 측근으로서 참모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계획의 일부. 당연히 그것들도 지크가 알고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마릴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지크가 회귀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와 라일라의 태도를 보면 그들은 회귀라는 개념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등허리가 서늘했다. 그들의 가장 커다란 비밀이 새어나간 것이다.
그것도 미래의 힘의 마왕 지크 모어와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 라일라에게.
‘대체 어떻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조직의 누군가가 흘렸다는 것. 하지만 그건 이상했다.
‘정보를 아는 조직원은 극소수인데?’
그녀도 정보를 아는 모든 조직원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숫자가 두 손안에 꼽힌다는 건 안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다. 말단 조직원조차 정보를 발설하지 않는 그들의 조직이다. 회귀라는 엄청난 정보를 아는, 조직에도 핵심에 속하는 조직원들이 정보를 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렌 제너드도 아니다.
‘그 용사 놀이에 미친놈이 그런 말을 함부로 했을 리 없어.’
아이러니하게도 그 미친놈은 그런 면에서는 믿을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럼 설마 라일라가?’
브뤼셀 시스템의 일부로서 그녀의 머리에 대량의 지식이 잠들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고작 그것뿐이다. 그녀의 지식은 시스템하에서만 열어볼 수 있다. 물론 약간의 기억이 그녀에게 나타날 수는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회귀에 대해 저렇게 확신을 할 정도까지 떠오르진 않을 거라고 했는데….’
기껏해야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선에서 그칠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많은 기억이 떠오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기억이 다시 사그라들 것이라고도 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게 가장 설득력이 높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라일라의 기억이 생생하다.
마릴린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여유가 넘치나 보네?”
막아서는 석검 두 개를 제친 지크가 그대로 마릴린을 향해 파고들어 왔다.
“윽!”
마릴린이 급히 그림자들을 움직이자 지크의 발이 느려졌다.
마릴린은 지크에게 저주를 쏘아 보냈다. 그러나 저주의 빛덩이들은 윈두르의 화려한 궤적에 걸려 전부 두 동강이 났다.
하지만 그거면 됐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어!’
지금 지크의 움직임을 보면 아무리 강대한 저주를 쏘아 보낼지라도 그의 검에 모조리 걸릴 게 뻔했다.
그녀가 원한 건 그저 지크의 움직임을 멈추는 것.
목표물은 따로 있었다.
쿠웅!
지크 쪽으로 다가오던 석상이 방향을 꺾었다. 커다란 석검을 들어 올려 내려친다. 목표는 라일라였다.
“칫!”
라일라가 혀를 차며 손을 옆으로 뻗었다.
퍼어엉!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들이 옆으로 뻗어가 그림자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간다. 순식간에 옆쪽으로 커다란 공터가 생겨났다. 라일라는 급히 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석검이 지면을 강타했다. 커다란 흠집이 나며 흙먼지와 돌가루가 비산했다.
하지만 라일라의 몸에 상처는 없었다. 그저 로브 위에 묻은 먼지와 피부를 툭툭 두드려대는 돌가루에 인상을 쓸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후웅!
또 하나의 석검이 떨어졌다. 라일라는 방금처럼 마법으로 옆쪽을 청소한 뒤 텅 비어버린 그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라일라는 석검을 세 개까지 피했다. 마법사들의 평균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녀도 마법사는 마법사. 한계는 있었다.
“크윽!”
세 개째의 석검을 피하며 그녀의 자세가 무너졌다. 지금까지처럼 몸을 날려 피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아니, 피하는 건 둘째 치고 그림자들을 소멸시켜 피할 공간을 만들어낼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석검을 올려다본다. 포기한 것일까.
하지만 그녀의 눈에 절망한 기색은 없었다.
콰아아앙!
번개처럼 떨어진 석검이 라일라가 있는 곳을 강타했다.
하지만 라일라에게 상처는 없었다. 그녀는 덤덤하게 지팡이를 흔들었다.
퍼어엉!
바람이 주변을 휘감으며 달려드는 그림자들을 박살 냈다. 주변이 깨끗해진 걸 확인하고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못 버텼어.”
“사과할 필요 없어. 나도 녀석을 충분히 몰아붙이지 못했으니까.”
막은 석검을 흘려내며 지크가 말했다.
쿠웅!
석검이 옆으로 떨어지자 지크는 윈두르를 석상의 팔 부위에 휘둘렀다.
콰아앙!
석상의 손목 부위가 크게 패였다.
사람이라면 당장 검을 놓쳤겠지만, 석상은 여전히 검을 굳게 쥐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파편이 떨어지는 것이, 몇 번 커다란 충격을 받으면 당장이라도 손목이 떨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것도 사실이었다.
하나, 석상은 다시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쯤 부서진 손목을 축 늘어뜨린 채 뒤로 물러났다. 그림자들도 지크와 라일라를 포위할 뿐 공격하지 않았다.
그렇게 격렬한 전투가 잠시 멎었다.
지크와 라일라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지금 석상과 그림자의 공격을 멈출 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설마 거기서 바로 덤벼들 줄은 몰랐어요.”
마릴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크의 기습에 정말로 크게 놀랐던 듯 그녀의 주변은 그림자들과 석상이 철통처럼 지키고 있었다.
“혹시라도 라일라가 다쳤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혼자서 돌격하셨나요, 지크 님?”
“라일라는 여느 마법사처럼 뒤에서 연약하게 보호만 받는 녀석들과는 다르거든. 섣불리 덤벼드는 놈들의 뒤통수를 지팡이로 까버릴 수 있는 녀석이니까. 저번에 느끼지 않았나?”
“아주 확실하게 느꼈죠. 하지만 저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어요.”
설마 석상의 공격을 그토록 많이 피할 수 있을 줄이야.
라일라를 공격해 지크를 떼어내려는 그녀의 시도가 하마터면 실패할 뻔했다. 바로 앞까지 짓쳐들어온 윈두르의 살벌한 검날에 이번 시간대의 목숨은 여기까지인가 순간 생각했을 정도다.
“뭐, 그거야 이제 느꼈으면 됐을 테고. 고작 그걸 묻자고 전투를 잠시 멈춘 건 아니지?”
“그건 그렇죠. 그런데 이제 반말을 하시네요, 지크 님?”
“설마 이제 와서 존대를 해달라는 건 아니지? 내가 아는 위치 마릴린 프릴은 그 정도로 경우 없는 녀석은 아니었잖아? 아무리 본 목적을 내내 숨기고 있다가 나중에 뒤통수를 후려치는 녀석이라고 해도 말이야.”
“…….”
지크의 입에서 나온 너무도 구체적인 이야기에 마릴린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지크가 회귀에 대한 지식을 라일라에게 들었을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크가 말하는 태도를 보면 마치 직접 겪기라도 한 것 같다.
‘무엇보다 저 태도….’
만났을 때부터 스틸월보다는 모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예상치 못한 변수에 의해 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잘 됐다고도 여겼다. 그 변수를 알아내면 스틸월을 모어로 바꾸는데 더욱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마릴린에게 또 하나의 가설이 생겼다.
생겨나버렸다.
‘스틸월에서 모어로 변한 게 아니라, 오히려 모어였다가 성격이 조금 둥글어진 느낌이야.’
지크의 기억과 행동, 태도, 성격 그리고 변수까지 모조리 설명할 수 있는 가설.
하지만 마릴린은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건 그저 지크가 회귀란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 지금 회귀를 할 수 있는 건 그 용사 병신뿐이야!’
그렇게 자신을 타일러봤지만 거듭되는 의심을 뿌리칠 수 없었다.
진실을 확인해야 했다.
때문에 그녀는 전투를 멈췄다. 제발 그 최악의 가설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지크 님.”
“뭘 물어볼지 예상은 간다만. 말해봐라. 아마도 대답하기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닐 테니까.”
“당신은 그 회귀란 개념을 어떻게 알게 된 거죠?”
질문을 한 마릴린은 침을 삼켰다. 제발 그 끔찍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기를 빌면서.
“겪어 봤으니까.”
“…다시 한번 정확히 말해주세요.”
“이봐, 마릴린. 멍청이처럼 굴지 마. 너는 총명한 녀석이야. 이미 예상하고 있는 일을 왜 쓸데없이 다시 묻고 있어? 못 알아들은 게 아니잖아. 그저 믿기 싫을 뿐이지.”
“그럼, 정말로….”
윈두르를 어깨에 툭툭 두드리며 지크가 씨익 웃었다.
“회귀란 거 말이야.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더군.”
마릴린은 한순간 지팡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지크 모어의 무지막지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물론 마릴린은 그것에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강대한 힘을 지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크가 자신들의 계획 아래에서 꼭두각시처럼 놀아났을 때다.
“하지만 한 번쯤은 해볼 만한 경험이었어. 그 덕에 꽤 많은 것들을 얻었거든. 얄밉던 가족에게 엿 한번 거하게 먹였고, 새로운 취미 생활도 얻었어. 힘도 예전보다 훨씬 더 빠르게 얻었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게 뭔지 알아?”
지크의 얼굴이 변했다. 무섭도록 불쾌한, 때문에 그의 힘을 알고 있는 자라면 더욱 공포감을 느낄 그런 얼굴.
“감히 내 인생을 멋대로 굴려먹던 새끼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는 거다!”
‘조직의 존재를 알고 있어!’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그녀의 예상보다 더욱 최악이란 것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