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9화
‘…뭐야, 저건?’
마릴린은 멍청한 표정으로 눈앞의 상황을 지켜봤다. 눈을 몇 번 깜박여 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맞는다면 육체가 갈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짓뭉개져 한낱 핏덩이와 육편으로 변할 것 같은 석상의 거대 검.
하지만 그 검의 목표가 된 지크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냈다. 석상에 비교하면 바늘로도 보이지 않을 검을 휘둘러 오히려 석상의 검을 튕겨내 버린 것이다.
쿠웅!
균형을 잃은 석상이 발을 움직여 겨우 중심을 잡는다. 하지만 그런 빈틈을 지크가 놓칠 리 없었다.
지크가 석상에게 달려갔다. 그 와중에 방해되는 그림자들은 모조리 도륙됐다.
탓!
지크가 석상의 발치에서 점프를 했다. 석상의 얼굴 부위까지 올라선 지크는 그대로 윈두르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
윈두르에 정통으로 맞은 석상의 얼굴이 뒤로 확 꺾였다.
공중으로 파괴된 석상의 파편들이 산산이 흩뿌려졌다. 지크는 그중 가장 큰 파편을 발로 차 뒤로 날았다.
후웅!
지크가 있던 곳으로 석상의 팔이 무서운 파공음을 내며 지나갔다. 그것의 손가락이 꿈틀대는 것이, 마치 지크를 잡지 못한 분노를 표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석상의 반격은 그걸로 끝이었다.
쿠우웅!
석상이 뒤로 넘어졌다. 그곳에 있던 그림자들이 석상에 깔려 모조리 소멸됐다.
툭!
지크는 라일라 옆으로 내려섰다. 주변에 달려드는 그림자들을 베어내며 석상이 쓰러진 쪽을 바라봤다.
“이제 어느 정도 상대가 되는군.”
“그거 다행이네.”
라일라가 지팡이를 흔들었다. 지팡이 끝에 가득 모였던 번개가 일시에 방출됐다.
콰르르릉!
번쩍이는 번개는 검은 해일과도 같이 몰려오는 그림자들을 휩쓸고 여세를 몰아 석상들까지 집어삼켰다. 번개에 휩쓸린 그림자들이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다.
그 엄청난 위력과 범위에 뒤에서 지켜보던 마릴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라일라는 만족하지 못한 듯 보였다. 오히려 혀를 차기까지 했다.
“역시 안 통해.”
그림자들을 말 그대로 지워버린 라일라의 번개였지만, 석상들은 그녀의 번개를 맞고도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도 태연한 그것들의 움직임에 약이 오를 정도였다.
그러나 라일라의 마법이 쓸모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림자들에게 라일라의 마법은 재앙 그 자체였다. 더욱 강해진 그녀의 마법은 그림자들을 말 그대로 학살했다.
‘…엄청나네.’
뒤편에서 둘의 전투를 보고 있던 마릴린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강하다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예상하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다르다.
둘의 실력은 그녀의 예상을 확실하게 상회했다.
‘도망치게 협력할까?’
지크와 라일라는 이대로 무덤을 탈출하려는 모양이었다. 둘을 무덤에서 쫓아내기만 한다면 당장 시스템은 안전하다.
그러나 마릴린은 곧 그런 생각을 접었다.
‘포기할 거란 보장이 없어.’
마릴린이 우두머리에게 연락을 취하는 동안 다시 한번 시스템을 중단하러 내려올 수도 있다. 지금 받고 있는 공격을 브뤼셀 시스템이라고 의심하는 둘이었기에 가능성은 충분했다.
‘끝장을 내자.’
이번 시간선에서 그들과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마릴린은 결심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둘을 공격할 수는 없다. 가장 치명적인 상황을 노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때까지 철저하게 같은 편인 척을 해야 한다.
우웅!
마릴린의 지팡이에 마력이 돌더니 곧 그녀의 지팡이에서 빛이 뻗어나갔다. 그 빛은 큰 보폭으로 접근하고 있는 석상을 때렸다.
퍼엉!
빛이 석상에 적중했다. 하지만 석상에 뭔가 변화가 있진 않았다. 그것은 여전히 넓은 보폭으로 지축을 뒤흔들며 흉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릴린에게서 몇 번의 빛이 더 뿜어져 나가 석상을 쳤지만, 그것들도 석상에게 대미지를 주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저것들, 저주도 통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마릴린의 말에 지크가 혀를 찼다.
“마법 종류는 다 무효화시키는 건가. 저런 꼴을 보면 신성마법도 마찬가지겠어.”
“저도 라일라처럼 그림자 쪽을 맡을게요!”
“그러도록 해요. 석상들은 전부 내가 맡을 테니까.”
다시 한번 날아오는 거대한 석검을 지크가 맞받아쳤다.
콰앙!
그 석검도 방금 전의 석검과 같이 윈두르에 의해 높게 튕겨나갔다.
하지만 지크는 방금 전처럼 균형을 잃은 석상에게 일검을 날릴 순 없었다.
후웅! 후웅!
이번엔 두 개의 석검이 동시에 지크를 공격해 왔다.
지크는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그림자들을 베고는 윈두르를 쳐들었다.
그리고 두 석검을 올려다봤다. 동시에 내려쳐지는 공격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시간차는 있다.
지크는 미세하게 먼저 도착한 석검에 윈두르를 갖다댔다.
쿠웅!
아까와는 다른 소리가 났다. 대놓고 힘으로 눌러버린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 지크는 석검의 힘을 옆으로 흘려냈다.
“흡!”
그리고 흘러나가는 석검에 윈두르를 사용해 힘을 더했다.
콰앙!
두 번째로 도착한 석검이, 지크에게 흘려진 석검과 충돌했다.
지크의 기술에 밀려 위력을 상당히 잃었던 첫 번째 석검이었지만, 지크가 보충한 힘 덕에 두 석검의 위력은 비슷비슷했다. 당연히 두 석검은 크게 튕겨나갔다.
쿠웅! 쿠웅!
두 석상이 비틀거린다.
지크는 두 석상의 중앙으로 뛰쳐 들어갔다. 가까이에 있는 석상의 발목을 향해 윈두르를 크게 휘둘렀다.
콰직!
윈두르가 발목의 반을 뜯어냈다.
안 그래도 균형이 무너져 있던 석상이었다. 그 석상이 무릎을 꿇었다.
지크는 다른 석상의 발목에도 윈두르를 휘둘렀다. 이 석상은 조금 더 균형이 무너져 있던 모양이었다. 크게 기우뚱하며 넘어갔다.
불행하게도 그 석상은 넘어지면서 무릎을 꿇은 석상을 덮쳤다.
콰아아앙!
두 개의 석상이 겹치며 바닥에 뒹굴었다. 돌바닥이 깨지고 흙먼지가 피어 올라왔다. 석상들에 휘말린 그림자들이 이번에도 소멸했다.
지크는 넘어져 있는 다른 석상에게 달려갈까 하다가 멈췄다. 라일라와 너무 멀어지는 건 좋지 않은 데다가 그 석상은 이미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리할 필요는 없지.’
지크는 그림자들을 마구 베며 라일라와 마릴린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상대하기 꽤 쉽나봐?”
주변 그림자들을 불과 번개로 학살하던 라일라가 말했다.
“예전보다는 훨씬 낫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볍게 상대할 만한 것들은 아니야.”
“보기에도 그래 보여.”
“너는 어때?”
“보는 대로야.”
지팡이에서 쏘아진 푸른 빛이 주변을 맴돌았다.
쩌저저적!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마치 정신 나간 제작자가 만든 기괴한 인형들처럼 그림자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콰직!
얼어붙은 그림자의 표면에 금이 가더니 그림자의 몸체들이 깨졌다. 그림자의 파편들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곧 사라졌다.
“너도 예전보다는 수월하게 처리하는군.”
“내 실력이 올라간 것도 이유겠지만, 마릴린의 도움도 커.”
지크는 고개를 돌려 마릴린을 쳐다봤다. 그녀는 정면을 주시한 채 영창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번쩍!
그녀의 지팡이에서 빛이 튀어나가더니 그림자가 모여 있는 허공에서 펑 터졌다. 그림자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지는 것이 보였다. 아마 행동속도를 늦추는 저주인 모양이다.
다음 저주를 준비하려던 마릴린이 지크의 시선을 눈치챘다.
찡긋!
한쪽 눈을 찡긋해 윙크를 날린 마릴린이 다시 영창에 들어갔다. 지크는 한 번 피식거린 후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검기가 날아가고 불덩이와 번개가 휘몰아치며 저주가 흘러 다닌다.
그 막강한 화력에 맞서 석상과 그림자들도 각각 막대한 질량과 무수한 숫자로 맞섰다.
그러나 이미 예전에 이곳을 찾아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진 지크와 라일라를 막을 순 없었다.
덤벼드는 족족 석상과 그림자들이 깨져 나간다. 그러나 석상과 그림자에게 공포는 없었다. 그저 계속해서 지크 일행을 죽이기 위해 덤벼들 뿐이었다.
어느새 석상과 그림자들이 지크 일행을 둥글게 포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크 일행은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지크 일행이 무덤을 탈출하는 건 시간문제 같아 보였다.
콰앙!
지크가 석상 하나의 허리춤을 윈두르로 때렸다. 석상이 파편을 흩날리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쿠웅!
그것은 지크 일행을 포위하느라 가까이 붙어 있던 다른 석상에 부딪혔다. 그 덕에 석상이 넘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주변에 있던 몇몇 석상들의 행동에 제약이 생겼다.
하지만 모여 있는 석상은 그것들만이 아니었다.
쿠웅!
또 다른 석상이 다시 지크 일행의 앞길을 막아섰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졌는지 지크는 능숙하게 윈두르를 휘두르며 앞을 막아선 석상을 맞상대했다.
후웅!
석상의 거대한 석검이 떨어진다. 언제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설 것 같은 공격이었다. 그 파공음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듯했다.
하지만 지크는 그 엄청난 공격을 벌써 몇십 번이나 받아냈다. 지크의 괴물 같음이 절실히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석상의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아무리 지크라도 제대로 맞는다면 죽음에 이를 것이다.
마릴린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앞에 지크와 라일라의 등이 보였다. 자신의 실력을 뽐내며 적들을 압도하는 두 사람. 이 압도적인 포위를 뚫은 역량은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들이 이 포위망을 뚫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마릴린이 뒷걸음질 쳤다. 향하는 곳은 그림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곳. 자살행위처럼 보이는 행동이다. 마릴린이 지금까지 몸 성히 버티고 있는 이유는 지크가 그녀를 보호해줬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주술사인 그녀가 지금껏 버티고 있을 수 없다.
검은 그림자들이 달려든다. 당장이라도 그림자들의 손이 마릴린을 토막 낼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림자들은 마치 마릴린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지나쳤다.
마릴린이 지팡이를 뻗었다. 이미 영창은 끝내놨다. 지팡이 끝에 마력이 모였다. 준비한 건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저주.
대상은 지크다.
물론 지크의 압도적인 마력이라면 이 정도 저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틈을 만들어낼 순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석상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그리고 지크라는 벽이 사라지면, 라일라가 목숨을 잃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마릴린은 지크의 등을 바라봤다. 그는 위에서 날아오는 석검을 향해 윈두르를 휘두르는 중이었다.
마릴린은 그 모습을 뇌리에 선명하게 새겼다.
‘안녕, 내 사랑.’
저주가 쏘아졌다. 그것은 은밀하고 음습하게 지크의 등을 향해 달려갔다.
콰앙!
거대한 충격음이 터졌다. 석상의 검이 지면을 때린 것이다.
마릴린은 담담하게 흙먼지가 일어나는 곳을 쳐다봤다. 사랑하는 사람의 최후를 확인해야 하는 의무가 그녀에겐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목격한 건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
마릴린은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 눈으로 좇을 수 없는 것이 그녀를 향해 덤벼드는 것 같았다.
그녀 곁에 있는 그림자들과 석상이 움직였다.
콰아아앙!
또다시 폭음.
마릴린의 근처에 있던 그림자들이 거대한 힘에 의해 사라졌다. 마릴린은 자신의 앞에 드리워진 석검에 놀랐고, 그 너머에 있는 것에 더 놀랐다.
“결국은 이렇게 돼버리는군.”
싸늘한 말투가 그녀를 향해 날아온다.
“역시 넌 배신자였어, 위치.”
석검이 가로막고 있는 윈두르가 날카로운 빛을 반짝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