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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368화 (368/628)

제368화

라일라가 시스템을 중단시키겠다고 선언한 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우선 일행의 숫자가 줄었다.

지크는 먼저 한스, 스녹, 엘레나를 위로 올려 보냈다. 명분은 시스템이 멈출 시, 만에 하나라도 비올루윈에 해를 끼칠 현상이 일어났을 때를 위한 대응팀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한스와 스녹은 반색했다. 무덤에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게 한참 질리던 둘이었다. 다만 엘레나만큼은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법사, 그것도 마력이 없다고 생각됐을 때도 이론을 빠삭하게 파고들었던 그녀였던 만큼 학구열은 웬만한 고위 마법사에게도 꿀리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나무의 연구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지크의 말을 반대하진 않고 한스와 스녹을 따라 지상으로 올라갔다. 다만 어깨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축 처져 옆에서 스녹과 노웸이 열심히 그녀의 기분을 맞춰줬다.

그렇게 해서 무덤에 남은 건 지크, 라일라, 마릴린 셋뿐이 됐다.

‘기회야!’

제자 셋이 위로 올라가자 마릴린은 기뻤다. 지크 일행의 전력이 줄어든 것이다. 이걸로 조금은 계획이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딱 그 정도뿐. 위험성이 많이 낮아진 건 아니다. 마릴린이 보기에 지크 일행의 최고 전력은 지크와 라일라 둘이었다.

마릴린은 차츰차츰 나무들을 조작했다. 엘레나가 사라진 이상, 라일라가 식사나 수면 등을 이유로 자리를 비울 때는 대놓고 조작을 해도 문제없었다.

나무 근처에 한 사람만이 남을 때는 지크가 보통 호위로서 같이 들어와 있었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아무리 지크가 힘의 마왕이라 할지라도 방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 마릴린이 나무에 조작을 가하는 걸 알 수는 없다. 오히려 지크와 단둘이 있을 때, 그녀의 기분은 날아갈 듯 좋았다.

작업을 하면서도 그녀는 지크와 열심히 대화를 나눴다. 중요한 대화는 아니었다. 되는 대로 내던진 화제에 대해서 대화를 할 뿐이다. 하지만 그 사소한 대화조차도 마릴린은 무척이나 좋았다.

이 시간선에선 더 이상 하지 못할 대화일 테니까.

그렇게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고 있을 때, 식사를 끝냈는지 라일라가 들어왔다.

“마릴린, 너도 밥 먹고 해.”

“그럴까?”

안 그래도 배가 좀 고픈 참이다. 하지만 지크와의 달콤한 시간이 못내 아쉬워 마릴린은 미적거렸다.

“빨리 갔다 와. 뭘 굼뜨게 그래? 시간 아깝게.”

“아, 잠깐만!”

가볍게 자신의 등을 미는 라일라를 제지한 후 마릴린은 지크에게 다가갔다.

덥석!

그대로 지크를 한 번 끌어안았다.

“에헤헤!”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만족한 상태로 그녀는 입구 밖으로 나갔다. 가벼운 발걸음이 누가 봐도 그녀가 행복에 휩싸인 사람이란 것을 쉬이 알 수 있었다.

“좋겠어? 미인한테 포옹도 당해 보고.”

라일라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지크를 흘겨본다. 지크는 피식 웃었다.

“고작 저런 어린애 포옹 같은 걸로 행복감을 느끼기엔 내가 겪은 일들이 너무 많다만?”

“좋겠네.”

라일라의 심기가 더욱 불편해졌다. 발을 조금 거칠게 내디디며 그녀가 나무 근처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나무의 마력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작업은 좀 어때?”

“…….”

바로 대답을 하지 않는 걸로 그녀는 지크에게 자신의 꼬인 심기를 표출했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라일라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자신의 기분에만 매몰될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순조로워.”

“마릴린이 눈치챈 기색은 있냐?”

“없어. 내 눈치를 보며 자기 일에 바쁜 기색이야. 더 이상 은근슬쩍 나를 방해하는 일도 없고.”

“녀석의 마력의 움직임은 파악했어?”

“대충은.”

만약 마릴린이 들었다면 기겁을 할 말이 라일라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지크도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벌써? 난 좀 더 오래 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운이 좋아야 그럴 거라고 생각했을 뿐, 실질적으로 지크는 이번엔 그저 라일라가 나무에 대한 이해를 조금 더 높였으면 좋겠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과연 라일라라고 할까. 지크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해 버렸다.

“예전에 물의 나무를 살펴본 적이 있잖아. 그때의 경험을 살렸지. 마릴린의 마력 움직임이 좀 단순하기도 했고. 그래서 알아보기 쉬웠어.”

예전에 나무를 살펴본 적이 있어서 그렇다는 이유는 둘째 치고, 움직임이 단순해 알아보기 쉬웠다는 말에는 마릴린도 억울함을 표출하지 않을까.

‘그래도 나름 재능이 하늘을 찌르는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지크는 납득했다. 라일라의 재능은 자신과 비견되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다. 고작 마릴린 정도의 재능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건 좋은 소식이로군.”

때문에 지크는 그런 담백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그럼 마릴린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냐?”

“대충은.”

“…무슨 짓인데? 그저 연구에 치중하고 있을 뿐이냐?”

마지막 희망을 담아 라일라에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예상하고 있던, 씁쓸한 답이었다.

“아니.”

“…그렇군.”

이걸로 마릴린이 로브 놈들과는 관련이 없을 거라는, 작은 희망의 불꽃이 꺼졌다.

“뭘 하고 있었는데?”

“그게….”

라일라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지크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기 때문이다. 지크의 눈이 입구 쪽을 바라본다. 마릴린이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크의 입에서 평범한 대화 주제가 튀어나왔다. 라일라는 자연스럽게 거기에 대꾸를 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장난스럽게 말을 거는 지크와 나무를 연구하며 퉁명스레 대꾸하는 라일라. 누가 보면 한참 사소한 잡담을 나눈 사람들로 보였다.

“저 왔어요!”

방 안으로 들어오며 마릴린이 말했다.

“왔어? 밥은 잘 먹었고?”

“응! 오늘 밥도 맛있던데?”

그녀의 입가에 번들번들 묻어 있는 기름들을 보건대 정말 잘 먹은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롄가?”

지크가 벽에서 등을 떼고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만요, 지크 님!”

마릴린이 지크를 불렀다. 그녀는 지크에게 다가가 그의 등에 얼굴을 푹 묻었다.

“우후후!”

행복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 붙어 있진 않았다. 곧 얼굴을 떼고는 지크에게 손을 흔들었다.

“식사 맛있게 하고 오세요!”

“그러죠.”

지크가 방을 나가자 마릴린은 다시 나무 근처로 다가왔다. 그녀의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렇게 좋아?”

라일라가 물었다. 마릴린은 요새 한층 더 지크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당연하지. 아주 행복에 겨워 죽겠어.”

빙글빙글 미소 짓는 마릴린의 얼굴을 보며 라일라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이 얼굴이 정말로 뒤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사람의 모습일까. 언뜻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라일라는 마릴린의 마력 반응을 살폈다. 그녀의 마력이 뻗친 곳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마릴린이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 *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마릴린의 지크에 대한 애정표현은 한층 더 강화됐다. 그만큼 라일라의 심기도 점점 나빠져 갔다. 하지만 나무에 대한 연구는 착실하게 진행되었고, 라일라는 녹색 나무의 컨트롤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건, 마릴린이 계획을 실행해야 하는 날짜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알아내지 못하길 바랐는데.’

마릴린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녀도 자신의 기대가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지의 나무를 컨트롤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라일라가 녹색 나무 정도도 컨트롤하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죽여야겠어.’

이미 판은 깔아놨다. 이제 실행만 하면 그만일 뿐.

“시스템은 내일 내릴 거냐?”

“응.”

지크와 라일라가 대화를 나눈다. 상당히 친해진 친구 라일라와 그녀의 사랑 지크. 이제는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될 두 사람의 얼굴을, 마릴린은 조용히 눈에 담았다.

* * *

내일의 일정을 대비해 일찍 잠자리에 든 때였다. 쥐죽은 듯한 적막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있는 것이라곤 석실과 석상뿐. 유일하게 소리를 내는 존재인 사람이 잠에 들었으니 소음이 있을 리 없다.

그때였다.

그긍!

낮은 소리가 울렸다. 마치 바위 위에 얹어진 무거운 돌덩이를 억지로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다.

그그긍!

또 한 번 울렸다. 이번엔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게다가 다른 곳에서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그그그그긍!

소리가 더 커지고 소리가 나는 곳도 더 많아졌다.

번뜩!

지크가 눈을 떴다. 그는 바로 윈두르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주변을 살폈다.

수상해 보이는 건 없었다. 하지만 지크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분명 들렸어.’

잘못 들었을 리 없다. 게다가 이건 들어본 적 있는 소리다.

지크는 고개를 쳐들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석상을 쳐다봤다. 보통 석상들은 또렷한 눈으로 정면을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지크가 바라본 석상은 달랐다.

고개를 꺾어 지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일라! 마릴린!”

지크가 소리친 순간 라일라가 눈을 떴다. 옆에 있던 지팡이를 쥐고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무척이나 숙련된 움직임. 여행에서 얻은 경험 덕이었다.

“뭐, 뭔가요?”

그에 비해 마릴린은 허둥거렸다. 지팡이를 쥐고는 당황한 눈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하지만 지크가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쿠웅!

굉음이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굉음이 울린 곳을 쳐다봤다.

받침대 위에서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던 석상이 받침대를 내려와 있었다.

“저, 저, 저, 저게 뭔가요!”

마릴린이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움직이는 석상을 처음 보는 게 아닌 지크와 라일라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지크. 혹시 나 몰래 윈두르를 피라미드 근처에 가지고 들어간 건 아니지?”

“그런 적 없어. 나무 근처에 갈 때도 꼬박꼬박 마법 상자 안에 넣고는 예비 검을 가지고 다녔지. 너도 봤잖아.”

“그런데 저게 왜 움직일까?”

“글쎄?”

“그렇게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상황인가요!”

마릴린이 빽 소리를 질렀다.

“그도 그렇군. 일단 탈출하자.”

“아직 시스템을 못 내렸는데.”

지크가 앞장서자 라일라가 투덜거리며 뒤따랐다.

“두 분은 너무 여유가 넘치시네요!”

마릴린이 어이없어했다.

콰앙! 콰앙! 콰앙! 콰앙!

즐비한 석상들이 받침대를 내려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것들이 전부 자신들을 보고 있고, 손에 칼을 쥐고 있으며, 누가 봐도 자신들을 분쇄시킬 기세만 아니라면 좋은 구경이 됐을 것이다.

석상만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심상찮은 마력이 휘감돌며 사방에 흩뿌려진다.

스으윽!

바닥에서 검은 무언가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그림자….”

라일라의 말대로 그것은 예전, 석상과 같이 지크 일행을 괴롭힌 그림자들이었다. 예전처럼 무수하게 솟아나는 그것들을 보고 지크는 혀를 찼다.

“아주 예전 그때처럼 덤비는 것 같은데?”

“반갑지 않은 소식이네.”

라일라도 인상을 찡그렸다.

“뭐, 당황할 것 없어. 적이 예전처럼 나온다면 우리도 예전처럼 상대하면 그만이야.”

지크가 앞으로 나아갔다.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오는 그림자들. 동시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석상이 지크에게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검이 지크에게 짓쳐왔다. 지크도 윈두르를 휘둘렀다.

콰아앙!

주변을 떨어 올리는 굉음.

커다란 검이 높게 치솟으며 석상이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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