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6화
그 사람을 처음 본 건 어렸을 적이었다.
“이게 네가 앞으로 섬길 사람이다.”
그 말과 함께 초상화 한 점이 건네어졌다.
그려져 있는 건 젊은 남자의 모습.
상당히 잘생긴 이목구비가 이성의 호감을 쉽게 받을 수 있을 거라 여겨졌지만 얼굴에 담긴, 자신만만하다 못해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은 받은 호감을 모두 깎아버리게 만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초상화의 얼굴이나 표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초상화를 받으면서 들은 말.
그녀가 앞으로 섬겨야 할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마릴린은 지크란 인물을 알게 됐다.
그 후, 마릴린에게 지크에 대한 세세한 정보가 전달됐다. 그의 취향이라든가 과거, 그리고 미래까지.
그런 정보들이 마릴린에게 주어진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의 취향을 그녀의 취향으로 만들고, 그의 과거와 미래를 알아 그를 직접 만났을 때 그의 환심을 쉽게 사도록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조직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강도 높게 이루어진 세뇌는 빠르게 마릴린의 마음을 잠식해 들어갔다.
“이 사람이 누구지?”
교육이 끝나자 조직의 우두머리는 그녀에게 지크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물었다. 마릴린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섬길 분입니다.”
“그리고?”
마릴린이 얼굴을 붉혔다. 몽롱한 눈빛과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그건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자의 모습이었다.
“제가 사랑하는 분입니다.”
“그렇지.”
우두머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말하는 것처럼 이 자는 네가 섬기며 사랑해야 할 자다.”
그녀의 의무와 감정을 다시 한번 못 박는 것처럼 우두머리가 재차 말했다.
“그래서 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나 중 한 명을 선택한다면 누구를 선택할 거지?”
“당연히 주인님입니다.”
그녀가 지크를 사랑하는 건 사실이다. 그 외에 사랑을 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계속해서 진행된 세뇌는 우두머리에 대한 충성을 너무도 확고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을 수 있을 만큼.
게다가 거기엔 그녀의 성향도 영향을 끼쳤다.
“그래. 네가 사랑하는 대상은 그가 될지라도 따르는 건 나여야지. 그게 네 사랑에도 도움이 된다.”
우두머리가 킬킬대며 말했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많은 회귀를 해야 한다. 넌 그 시간선마다 지크 모어를 만날 수 있는 거야.”
마릴린의 표정이 몽롱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우두머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물론 너는 회귀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너한테 그런 건 상관없지? 그저 지크 모어와 계속 붙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니까.”
“지금 시간선 이전에도 제가 지크 님과 항상 같이 다녔나요?”
“물론이지. 지크 모어의 오른팔로서 너는 항상 그자와 함께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너는 지크 모어를 사랑했지.”
“아!”
마릴린이 두 손을 꽉 쥐었다.
“열심히 일하도록 해라, 마릴린 프릴. 그 끝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 목적을 이룰 때까지의 무한한 시간 동안 너는 언제나 지크 모어와 함께다.”
그때 마릴린은, 거울이 없음에도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예쁘게, 아주 예쁘게 웃고 있었다.
* * *
마릴린은 지크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얼굴에 빠르게 혈액이 돌았다. 계속 이대로 바라보고만 싶었다.
하지만 할 일이 있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뗄 수밖에 없었다.
진한 아쉬움이 몰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상황은 심각했다.
브뤼셀 시스템을 중단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라일라의 그 말은 그들 조직의 근원 그 자체를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말이었다.
브뤼셀 시스템. 그녀가 알기로 회귀를 할 수 있는 기적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들 조직을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이기도 했다.
회귀라는 엄청난 기적을 바탕으로 그들 조직은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 시스템을 중단하는 방법이라니.
‘위험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 조직은 치밀하다면 치밀하지만 엉성하다면 엉성하다.
치밀함은 지금껏 회귀를 하며 얻어온 정보들을 바탕으로 일을 꾸미는 터라 그랬다면, 엉성함은 아무리 계획이 망가지더라도 회귀를 이용해 다시 원점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자신감 때문에 그랬다.
한데, 회귀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바로 무너지진 않을 거야.’
조직의 모든 걸 알진 못하지만, 강하면 강했지 절대 약한 조직이 아니다.
그러나 엄청난 혼란에 휩싸일 건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몰락의 길로 접어들 가능성도 크다.
당연히 막아야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일단 지크 님과 라일라가 상대라는 게 문제인데.’
지크는 훗날 힘의 마왕으로서 전 세계를 공포에 질리게 하는, 자타공인 최강의 자리에 오르는 자다.
완전히 여물지 않은 지금에도 그 강함은 보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에 정확한 정체는 모르지만 브뤼셀 시스템의 코어 노릇을 하던 라일라도 무척이나 까다로운 상대가 분명하다.
그녀의 지식과 식견은 요 근래 같이 연구를 하는 척을 하면서 확실하게 알게 됐다.
‘다른 일행도 얕볼 수 없어.’
한스란 자는 원래 그렌이 들고 있어야 하는 에스텔레이드를 들고 있다.
덧붙여 이 도시에서 태양의 용사라는, 원래 그렌에게 붙어야 하는 이명이 붙었고 그것이 주변으로 퍼지고 있다.
조직에서도 파악 못 한 전혀 새로운 인물이지만, 그 에스텔레이드의 사용자라는 것만으로도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스녹은 어떤가. 회귀 전 ‘대지의 폭군 노웸’으로서 나라 하나를 멸망에 이르게 했던 자다.
그를 마인으로 만든 대지의 환수가 그에게 딱 붙어 있는 걸 보면, 미래에 충분히 마인급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엘레나 드웨인. 그 그렌 제너드가 동료로 점찍어 두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마법 인재다. 그런 인재가 라일라에게 교육까지 받고 있으니.
‘한 명 한 명은 내가 이길 수 있겠지만, 둘만 모인다고 하더라도 내 승산은 급격히 낮아져.’
정말로 5인 파티라고 하기에는 과한 위력의 파티였다.
‘정면승부는 절대 불가능해.’
지크 한 명만 해도 충분히 그녀의 저주를 무시하고 머리를 두 쪽으로 조각낼 수 있으리라.
‘일단 정보를 모으자.’
마릴린은 브뤼셀 시스템을 중단시킬 수 있는 방안을 알아냈다는 말을 툭 내뱉고는 자신의 식사를 하고 있는 라일라에게 질문했다.
“브뤼셀 시스템을 중단하는 법말이야?”
“응. 흥미 있어?”
라일라가 스프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당연히 흥미가 가지. 고대 찬란했던 제국의 황제 무덤에서 계속 언급되는 시스템인데. 대단한 고대 마도의 단서일 수도 있고,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정치 체제일 수도 있잖아.”
“아마도 마도 관련일 가능성이 커. 저 나무에 관한 이야기 같았거든.”
입에서 뺀 숟가락으로 그녀가 피라미드 위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까?”
“그래. 대단히 긴 이야기는 아니니까.”
밥을 먹는 와중 계속 말을 거는 마릴린이 귀찮을 만도 하건만 라일라는 순순히 그녀의 의문에 대한 답을 줬다.
“브뤼셀 시스템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나무를 기반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인 것 같아. 즉, 저 나무의 마력 그 자체를 사용하는 거지. 피라미드 안의 초록 나무는 저 나무의 힘을 제어하는 시스템인 거고.”
그건 이미 조사 때 오고 간 내용이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이라 마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재촉했다.
“하지만 더욱 마력을 제어하기 쉽게 초록 나무의 힘을 강하게 만들어버리면 브뤼셀 시스템에 공급되는 에너지 자체가 줄어들어 시스템이 무너져 버린다고 하더라. 다시 시스템을 작동시키려면 어마어마한 준비와 기간이 필요하니 만약 제어 나무의 출력이 불안정해진다면 억제기를 파괴하라던데? 그게 차라리 낫다고.”
호기심이 잔뜩 깃든 얼굴로 라일라의 설명을 듣는 마릴린. 하지만 순수한 호기심만을 보이는 외관상과는 다르게 그녀의 머리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혹시 그 설명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을까?”
다른 뜻 없이 어디까지나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뉘앙스로 마릴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모르겠어.”
“네가 해석한 거잖아?”
“말했잖니. 해석에 시간을 오래 끌지 않을 거라고. 원래라면 어느 석실 어딘가에서 어떤 구절을 발견했는지 일일이 기록해 놨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도 여유도 없잖아. 글자들을 훑어보다가 중요한 글귀가 나온다 싶으면 받아 적은 후에 바로 다음 작업으로 들어가서 어느 석실에 있는지는 몰라. 뭐, 그래도 적어놓은 글귀의 위치를 보면 조사 중반에 들어간 석실일 거야.”
중반에 들어간 석실이라는 말만으로는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조금 더 자세하게 물어볼까.’
하지만 여기서 더 캐물었다간 쓸데없는 의심을 살 가능성이 있다. 마릴린의 눈에 라일라가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켜는 게 보였다.
“대체 뭐가 그렇게 중요한 시스템이길래 저렇게 존재가 계속 언급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해석은 끝났으니 나도 다시 나무의 조사에 착수할게.”
“결국 문자 번역은 헛수고로 끝났군.”
“내 말이.”
지크의 말에 라일라가 투덜거렸다.
“그 브뤼셀 시스템이란 게 뭔지는 전혀 모르겠고?”
“몰라. 그나마 생각나는 건 이 무덤에 마력을 부여하고 있는 시스템일지도 모른다는 정도? 역대 황제들의 무덤이기도 하고. 제국의 사후세계는 이런 시설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황제들의 넋이 천국에 간다고 믿었을지도 모르니까.”
“아니면 우리가 상대하던 석상들과 그림자들이 그 브뤼셀 시스템일 수도 있겠군. 무덤의 방위 시스템이라든가 말이야.”
“그것도 가능성이 있네.”
지크와 라일라가 동시에 피라미드 위를 쳐다봤다.
“그럼 살짝 중단시켜 봐도 되지 않을까?”
마릴린은 깜짝 놀랐다. 만약 라일라의 말이 사실이라 가정했을 때, 브뤼셀 시스템이 중단되는 사태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강하게 제지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의심만 사게 된다.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경악스러운 외침을 억누른 그녀는 나름 논리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내려 했다.
그러나 라일라가 먼저였다.
“뭔지도 모르는 걸 함부로 중단시키겠다고?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그때 마릴린은 라일라가 정말로 여신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크도 만만치 물러서지 않았다.
“우리는 시간이 없어, 라일라. 여기서 평생 시스템을 연구할 수 없다고. 너도 알잖아. 게다가 시스템을 발동시키는 게 아니라 중단시키는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기보다는 사라지겠지.”
“그 사라진 현상 때문에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생각해야지. 예를 들어 이 거대한 공간이 유지되고 있는 게 그 시스템 때문이라면 어쩌게. 여기가 무너진다면 당연히 비올루윈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을 거야.”
“제 생각도 그래요.”
마릴린이 얼른 끼어들어 라일라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 둘이 반대하자 지크는 한발 물러섰다.
“너희 의견이 그렇다면야.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건대 여기서 영원히 있을 순 없어. 너희가 연구를 포기하든가 아니면 시스템을 중지시켜 보든가 선택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을 거야.”
“알아. 나도 무턱대고 반대를 하는 건 아니야. 적어도 두 개의 나무를 조사해서 마력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볼게. 이 무덤을 유지하는 게 그 시스템이 아닌 걸 밝혀낼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행운을 빌지.”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을 때, 마릴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