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4화
나타난 통로는 사람 세 명이 나란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컸다. 지크는 그사이 자신의 곁에 모두 모인 일행을 보고 말했다.
“들어간다.”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는 입구 안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이곳도 무덤 안과 같이 천장에서 마력빛이 새어나오고 있어 시야확보에는 문제가 없었다.
저벅! 저벅!
통로에 얼마만인지 모를 묵직한 발소리가 울렸다. 통로 안에는 무덤 입구처럼 많은 벽화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입구의 벽화와는 그 성격이 조금 달랐다.
입구의 벽화가 허가받지 않은 침입자들을 겁박하는 분위기였다면, 이곳의 벽화는 들어온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분위기였다.
“제대로 찾은 모양이야.”
지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통로는 입구로부터 아래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구조상으로 보아 피라미드 중심부 쪽으로 이동하는 모양새였다.
혹시 함정 같은 것이라도 튀어나올까 긴장을 바짝 하고 움직이는 일행.
그들이 확 트인 공간에 도착한 건 그로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들이 도착한 네모난 방은 상당히 규모가 컸다. 차곡차곡 쌓은 벽돌들을 섬세하게 깎아 만든 벽이 매끈거린다.
하지만 그들의 눈을 사로잡는 건 매끈거리는 벽 따위가 아니었다. 지크는 고개를 꺾어 천장에서 튀어나온 것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저게 나무의 줄기로군.”
방의 천장을 뚫고 커다란 나무의 줄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갈색의 거대한 그 나무줄기는 기분 탓인지 굉장히 딱딱해 보였다. 마치 돌처럼.
“지크! 윈두르!”
라일라가 급히 외치자 지크도 서둘러 마법 상자 안에 윈두르를 넣어놨다. 그리고 힐끔 나무를 본다. 다행히 나무에서 별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랐네. 여기서 갑자기 나무가 튀어나올 게 뭐야.”
윈두르를 꺼내놓음과 동시에 마법 상자에 넣었었던 예비용 검을 다시 꺼내며 지크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원하던 걸 찾은 것 같긴 하잖아.”
“그도 그렇군.”
천장을 뚫고 나온 나무줄기의 아래 바닥에는 또 하나의 나무가 자라 있었다. 그건 천장의 나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위를 향해 똑바로 뻗은 줄기.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이라도 하듯 그것은 짙은 초록빛을 뽐내고 있었다.
그 초록 나무는 방 천장까지 가지를 뻗쳤다. 그리고 마치 갈색 나무를 제압이라도 하듯, 그 초록 가지로 갈색 나무의 가지를 칭칭 휘감고 있었다.
누가 봐도 초록 나무가 갈색 나무를 제압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것도 그 무지막지한 나무들의 일종은 아니겠지?”
지크가 초록 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닐 거야. 아마도 호수의 눈물이나 화염의 눈물과 비슷한 거겠지.”
“하긴, 느껴지는 마력이 빈약해 보이긴 했어.”
물론 초록 나무의 마력도 대단하긴 하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까지 보아온 화염의 나무나, 물의 나무, 그리고 이 무덤에 있는 대지의 나무에 비교한다면 그 마력에 흠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흠이라고 할 정도가 아니다.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저 나무를 죽이면 되는 건가?”
“그 전에 조금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아.”
기세등등하게 당장이라도 검기를 날리고 볼 것 같은 지크를 라일라가 말렸다.
“우리가 알던 구슬 형태의 물건이 아니니까. 죽이려 든다고 해서 곱게 죽어 주리란 보장도 없고.”
“그것도 그렇군.”
물론 라일라의 제지는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한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개의치 않았다. 어쨌거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도 사실이다.
“당장 조사를 할 거냐?”
“그래야지.”
“천천히 해. 서두르면 될 것도 안 되니까.”
“걱정 마. 나도 그럴 생각이야.”
하지만 눈을 반짝이는 라일라의 모습을 보건대, 아마도 당분간은 계속 초록 나무에 매달릴 것 같았다.
“…아무쪼록 열심히 해 봐.”
지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말했다.
* * *
라일라는 당장 초록 나무의 연구에 뛰어들었다. 엘레나, 마릴린도 그녀를 거들었다.
마법사 3인조가 당장이라도 초록 나무를 해체할 의지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마법사들이 있는 방에 머물렀다. 혹시라도 나무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한다면 바로 그녀들을 보호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연구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지크는 한스, 스녹과 번갈아가며 한 명은 방을 지키고, 두 명은 무덤을 계속해서 뒤지기로 했다.
혹시나 자신들이 모르고 지나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일행은 역할 분담을 해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세 마법사는 정말로 눈에 불을 켜고 초록 나무를 조사했다. 마력의 속성을 느끼고 근원을 찾아내며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아냈다.
최고 수준의 마법사인 라일라, 훗날 지크의 측근 중 한 명이 될 만큼 실력 있는 저주술사 마릴린.
그리고 회귀 전 지크를 토벌한 용사 파티 일원 중 한 명이자 이론만큼은 굉장히 정통해 있는 엘레나의 힘이 합쳐지자 조사는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무래도 초록 나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이 착수한 것인지라 조사가 끝나는 시기가 언제일지는 누구도 확답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연구에 미쳤다고 해도 사람인 이상 쉴 시간은 있어야 하는 법. 세 마법사는 번갈아가며 눈을 붙이거나 식사를 하거나 하며 쉬었다.
“후우!”
잠시 눈을 붙이려는지 라일라가 피라미드에서 나왔다. 그녀는 둥실 몸을 띄워 피라미드 아래에 만들어져 있는 캠프로 내려왔다.
캠프에는 지크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
“쉬러 왔냐?”
“응.”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라일라의 안색이 스튜의 냄새를 맡고 조금 밝아졌다.
그녀가 쪼르르 달려와 커다란 냄비 옆에 섰다. 냄비에는 많은 양의 야채와 고기가 푹 익고 있었다.
“예전에도 생각했지만 너는 의외로 이런 걸 잘 한단 말이야.”
“다른 녀석들과는 경험치 자체가 다르잖냐.”
국자로 냄비를 한 번 휘저은 후, 소금을 뿌려 간을 했다. 그다음 스튜를 조금 퍼 접시에 담아 맛을 봤다.
“음, 괜찮군.”
지크는 스튜를 그릇에 담아 라일라에게 건넸다. 그녀는 넙죽 받아 숟가락을 들었다.
입에 스튜의 향미가 팍 퍼진다. 듬뿍 들어간 고기에서 흘러나온 기름기가 혀끝에 맴돌며 식욕을 돋웠고 여러 가지 야채에서 나온 향이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맛을 뿜어냈다.
거기에 적절히 첨가된 소금이 감칠맛을 불러왔다. 잘 익은 고기와 채소의 식감이 이 사이에서 톡톡 터지자 절로 숟가락을 들어 다시 스튜를 입에 넣게 됐다.
“맛은 괜찮냐?”
“응, 맛있어!”
안 그래도 연구 때문에 허기가 진 상태였다. 그녀는 허겁지겁 스튜를 퍼먹었다.
“올라갈 때 다른 두 사람의 몫도 갖고 올라가. 지금 보초를 서고 있는 게 한스였나?”
“맞아.”
“그럼 한스의 몫까지 세 그릇.”
“알았어.”
대답을 하면서도 라일라는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지크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먹으면서 들어.”
라일라가 우물거리면서 지크를 쳐다봤다.
“앞으로 마릴린이 하는 모든 행동을 감시할 예정이야.”
뚝!
예상도 못 한 지크의 발언에 라일라의 숟가락질이 멈췄다. 입가에 묻은 스튜의 흔적을 손으로 스윽 훑으며 그녀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앞으로 마릴린을 감시하겠다고. 너도 녀석이 나무에 어떤 일을 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 봐.”
라일라는 당황했다. 언제나 자신의 회귀 전 측근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른 태도를 보이는 지크였다.
때문에 이번에 마릴린을 일행에 쉽게 합류시킨 것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지크의 분위기는 무척 서늘했다. 적어도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알기 쉽게 얘기해주겠어?”
라일라가 스튜 그릇을 바닥에 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먹으면서 들으라니까.”
“이게 먹으면서 들을 얘기니? 딴소리 하지 말고 설명해 봐!”
지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한 번 젓고는 입을 열었다.
“생각은 예전부터 있었어. 정확히 말해서 그렌 제너드가 내 인생을 뒤틀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부터지.”
그렌의 얘기를 하며 지크의 눈꼬리가 절로 찌푸려졌다. 그가 그렌 제너드를 얼마만큼 싫어하는지 알려주는 증거였다.
“녀석이 나를 마왕으로 키운 후에 토벌할 생각이었다면, 내 행동을 컨트롤하는 편이 좋았을 거야. 그리고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세력에 자기 끄나풀을 집어넣는 거지.”
“…마릴린 프릴이 그 끄나풀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지크는 자신 몫의 스튜를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마릴린은 우리 세력에서 참모의 역할을 맡았어. 머리가 좋았거든. 아직 힘이 약했을 때는 머리도 곧잘 썼던 나지만, 마력이 차츰 풀려 점점 거대한 힘을 휘두르게 될수록 머리보다는 힘에 의존하게 됐어. 그게 가능했을 정도로 내 마력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고, 마력을 사용할 수 없어 집안에서 쫓겨난 울분이 투영됐기 때문이기도 했지.”
라일라는 조용히 지크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 세계와 맞짱을 뜨기 시작했을 때까지 머리를 쓰지 않을 순 없었지. 화력은 우리가 위였지만, 그만큼 적도 물량이나 함정을 동원하기 시작했으니까.”
“그 때 마릴린이 참모 역할을 하기 시작했구나.”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릴린은 눈치가 좋고 머리 회전도 빨랐어. 적들의 의도도 잘 읽어냈지. 당연히 함정들도 잘 회피했어. 당연히 녀석이 들어온 후에 난 머리 쓰는 건 일절 배제하고 녀석이 만들어준 전장에서 날뛰는 데 주력했고. 성과는 좋았다. 때문에 우리는 점점 마릴린의 작전에 의지했지.”
“…네 말대로 마릴린이 배신자였다면 최악의 선택이었네.”
“그렌 제너드와 마지막 전투를 하기 전, 우리는 상대의 계략에 휘말려 갈가리 찢겼다. 그리고 네 측근들은 모두 각개격파당했지. 요하임, 이블린, 팀 그리고 마릴린까지. 하지만 요하임과 이블린, 팀은 모두 그렌 제너드와 당시 동료였던 자들의 협공으로 목숨을 잃었어. 그런데 마릴린만은 달랐지.”
탁!
스튜를 휘휘 젓던 숟가락이 그릇의 바닥을 치고 멈춰 섰다.
“녀석은 그렌 제너드 혼자 토벌했다고 전해졌거든.”
“…그렌 제너드의 다른 동료는 마릴린 프릴의 죽음을 보지 못 했다는 거네.”
정황증거가 척척 들어맞자 라일라도 심각해졌다.
“하지만 그 애가 보이는 너에 대한 애정은 진짜…잖아?”
애정이라고 할 때 라일라가 조금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아직까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지 못 하고 있었다.
“맞아. 그건 회귀 전에도 그랬어. 아마 나에 대한 녀석의 감정에 거짓은 없을 거다.”
“그럼 역시 뭔가 착각한 거 아냐?”
“나라면 말이야, 라일라.”
지크는 이제는 식어버린 스튜를 한 쪽에 놓았다. 그리고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냄비의 스튜를 국자로 저었다.
“수천수만 번의 기회가 있어서 상대의 성향을 완벽하게 알 수 있고 그 상대의 밑으로 스파이 하나를 심어야 한다면, 부하 하나를 철저하게 교육시킬 거야.”
교육. 그 한 단어가 라일라는 무척이나 섬뜩하게 들렸다.
“완벽하게 상대의 취향에 맞춘 후에 그 밑으로 들여보내는 거지. 상대가 그 부하를 무척이나 총애할 수 있게끔 말이야.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부하에게도 감정을 심을 거야. 그 상대를 사랑하게끔 말이야. 사랑 그 자체는 진심이니, 아무리 눈치가 빠른 자라도 그 부하를 의심하지는 못하겠지. 그렇게 하면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대에게 맞춘, 사랑스러우면서도 치명적인 독이 완성되는 거다.”
라일라의 머릿속으로 예전 마릴린의 모습이 지나갔다. 지크를 ‘운명의 상대’라고 부른 그녀의 모습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