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1화
마릴린이 지크의 팔짱을 끼는 것이 보인다. 지크도 그녀를 뿌리치지 않았다.
무척이나 익숙한 풍경. 라일라의 기억 속에 있는 힘의 마왕과 위치의 관계도 저러했으니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욱씬!
그러나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리는 가슴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며칠 뒤, 무덤으로의 출발을 하루 앞둔 날 절정에 이르렀다.
그때 라일라와 마릴린은 시장 바닥을 돌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날 꽤 위험한 모험을 떠나야 했기에 이것저것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웬만한 물품들은 마법 상자 안에 넣어 둔 일행이었지만 지금까지의 여행으로 꽤 많은 물자를 소비했다. 게다가 갈 곳이 갈 곳인지라 혹시라도 함정 같은 것에 빠져 강제 장기 체류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둘의 대화는 보통 마릴린이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하고 라일라는 그것에 답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마릴린은 정말 호기심이 많았다.
마릴린이 그 얘기를 꺼낸 것은 그렇게 또 한 번 질문을 쏟아낸 다음이었다.
“라일라.”
“왜, 마릴린?”
“나 정말로 지크 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
그녀의 눈이 마치 반짝이는 별로 바뀐 것 같다.
욱씬!
다시 한번 심장이 조인다. 하지만 라일라는 내색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무덤덤하게, 마치 별생각 없다는 듯 말했다.
“하루 이틀 일이니? 넌 만날 때마다 지크가 좋다고 노래를 불렀잖아.”
“혹시 착각 같은 것이 아닐까 했거든. 이래 봬도 나는 첫눈에 빠지는 사랑 같은 건 믿지 않는 편이니까.”
“네가?”
그럼 지금까지 보인 태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라일라의 믿기지 않는다는 투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릴린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설마 내가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렇게 빠져들 줄은 몰랐어!”
자신의 뺨에 손을 대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든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이다.
“…그래?”
묘하게 라일라의 대답이 늦었다.
“음, 마릴린.”
“응?”
마릴린이 라일라를 쳐다본다. 라일라는 태연한 척 말을 꺼냈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정말로 착각이 아닐까?”
말해놓고도 라일라는 후회했다.
‘뭐가 착각이야!’
원래 마릴린 프릴이란 사람은 지크란 자를 보는 것만으로 빠져드는 사람이다. 정말로 운명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걸 다 알면서도 착각이라고 하다니.
하지만 라일라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걸 믿지도 않았다며? 자기가 믿던 관념이 흔들리면서 그 착각이 조금 깊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도 않을까 싶어서.”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있네.”
의외로 쉽사리 마릴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라일라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이내 돌아온 마릴린의 대답은 라일라에게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감정을 조금 더 즐겨볼까 해. 솔직히 내가 당장 지크 님이랑 결혼한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결혼’이라는 단어를 내뱉고는 마릴린이 작게 부끄러운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라일라,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도와줘?”
“응! 그래도 나보다 네가 더 지크 님과 오래 다녔잖아. 파티의 부리더 포지션인 것 같던데.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지크 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것도 너였고.”
거기까지 말했을 때, 마릴린의 표정이 조금 걱정스럽게 변했다.
“혹시 라일라. 너도 지크 님을 좋아해?”
“좋아하긴 무슨.”
라일라가 손을 내저었다.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야. 굳이 따지자면 손 많이 가는 동생 같은 녀석이지.”
“하하! 라일라는 성실하니까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
마릴린이 짧게 웃었다.
“그러면 앞으로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좋아. 그 평범한 두 글자가 라일라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떠오르는 것은 여러 가지 핑계뿐. 그것도 무척이나 빈약한 핑곗거리다. 마법사의 뛰어난 머리도 지금은 무용지물이었다.
“나도 연애에 관해서는 잘 모르니까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겨우 내뱉은 말이 고작 그 정도의 말뿐이다. 하지만 마릴린은 강적이었다.
“그럼 이참에 서로 상의해 보자. 나도 연애 경험은 없거든. 설마 마법사 두 사람의 머리에서 좋은 생각이 안 나오겠어? 응, 생각해 보니까 좋은 방법 같아. 라일라는 지크 님과 오래 같이 다녀봤고, 나는 지크 님과 취향이 맞고. 둘이서 서로 보완을 해준다면 좋은 방법이 나올 거야.”
“…알았어. 도와줄게.”
결국 라일라는 그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고마워, 라일라! 넌 정말 좋은 친구야!”
자신의 두 손을 꼭 잡는 마릴린을 보며 라일라는 어색하게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 * *
무덤으로 출발하는 날이 왔다. 지크 일행은 비올루윈의 유적으로 향했다.
여전히 유적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크 일행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도시를 구한 용사’ 관련 관광업을 흥행시킨 비올루윈이지만 여전히 예전 관광지도 인기가 많았다.
지크 일행은 사람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곧 익숙하게 관광객 통제선을 넘어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들어와도 되는 건가요?”
마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지크가 웃으며 대답했다.
“안 되죠.”
“어라? 그럼 불법적인 일 아닌가요?”
“따지자면 그렇죠.”
마릴린이 눈을 깜박였다.
“왜요, 일행에서 빠지고 싶습니까?”
지크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영웅적인 일을 하려면 가끔 불법적인 일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법이죠.”
“과연 생각이 유연하시군요. 역시 우리 일행에 걸맞은 인재입니다.”
“퍽이나!”
라일라가 혀를 차며 두 사람의 등을 밀었다. 두 사람은 낄낄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정말로 마음이 잘 통하는 둘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통로를 걸었다. 상당히 복잡했지만 지크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길은 기억해?”
라일라가 물었다.
“물론이지.”
“다행이네. 잊어버렸다면 네 새침데기 검의 힘을 빌려야 했을 테니까. 아, 이번에는 가르쳐주지 않으려나? 네 검, 상당히 도도한 녀석이잖아. 한번 가르쳐 줬으니 충분하다면서 무시할지도 몰라.”
“현실성이 넘쳐나서 언짢아지는군.”
지크는 손가락으로 등에 메고 있는 윈두르를 툭 쳤다.
“하지만 그러면 네가 도와주면 되는 일이잖아.”
“그렇긴 하지. 물론 적절한 대가를 요구했겠지만.”
“부디 이 대단하고 잘난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감동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여신님.”
“스스로의 얼굴에 그렇게까지 금칠을 하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내가 공주님이나 여신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은근슬쩍 공주님 소리까지 끼워 넣는군. 역시 너도 자기애가 상당하다니까.”
라일라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물론 그런 공격 따위에 맞을 지크가 아닌지라 상체를 이리저리 비틀며 공격을 피해댔다.
아무것도 아닌 대화. 평소에 하던 대화다. 하지만 라일라는 웬일인지 이 별것도 아닌 대화가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으으….”
뒤에서 마릴린이 그 모습을 보고 신음을 흘렸다.
‘역시 아직 저런 친근감을 갖진 못하겠지?’
지크가 라일라를 대할 때와 마릴린을 대할 때의 차이는 분명 확연했다.
아직까지 지크는 마릴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물론 둘이 만난 후부터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 거리는 굉장히 가까운 것이었지만, 라일라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단순히 친한 것은 상관이 없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단순히 친한 것보다는 한 발짝 더 나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게 사랑이든 친애든.
‘지크 님은 몰라도 라일라는 확실히 사랑 쪽이야.’
지금도 자신이 지크에게 다가갈 때마다 움찔움찔거리는 게 대놓고 보인다. 다만 아직 자각을 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감정이 호의에서 사랑으로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연애 경험이 없어서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거나겠지.’
마릴린은 라일라를 쳐다봤다. 라일라가 지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어, 뒤에 서 있던 마릴린은 라일라의 옆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일라는 예뻤다. 마치 스스로 빛을 내는 것 같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 마릴린은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자신도 한 미모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라일라의 그것은 정말로 차원이 달랐다. 만약 그녀가 작정하고 유혹을 한다면, 넘어가지 않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크 님도 대단하시지. 저 라일라가 바로 옆에 있는데 저렇게 친구처럼만 대하시다니.’
혹시 동성애자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둘을 방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릴린은 기분을 억눌렀다.
‘너무 찢어 놓으려 해도 역효과야.’
지금도 충분히 과하게 달라붙고 있다. 여기서 괜히 라일라를 억지로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다가는 반감만 살 가능성이 높다.
마릴린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지크와 라일라를 뚱하게 쳐다봤다.
얼마 후, 지크 일행은 비밀 문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쿠쿠쿵!
예전과 같이 문은 지크 일행이 접근하자 저절로 열렸다. 마릴린은 그 모습을 보고 놀랍다는 듯 입을 벌렸다.
“비올루윈에 이런 곳이 있었어?”
“놀랐지?”
라일라가 말했다. 지크도 거들었다.
“솔직히 저희가 비올루윈에 다시 돌아온 건 이곳에 오기 위함입니다. 이 비밀 통로 너머에 볼일이 있거든요.”
“굉장해요!”
마릴린이 소리쳤다.
“이런 곳을 알고 계시다니! 역시 용사분들은 다르시군요!”
“용사와는 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만.”
지크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긴장하세요. 여기엔 예전에 저희도 당해내지 못한 위험한 것이 존재하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당해내지 못한 위험한 존재요?”
마릴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 그럼 들어가도 괜찮은가요?”
“걱정 마세요. 저희도 그때보다 실력이 상당히 올랐으니까요. 게다가 든든한 일행도 새로 생겼지 않습니까.”
마릴린이 눈을 깜박이다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혹시 저요?”
“이야, 설마 여기서 실력 있는 저주술사를 일행으로 들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운이 좋았죠. 아무래도 저희 파티가 화력 위주라 그게 회복이든 저주든 보조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아무리 봐도 제가 제 무덤을 판 것 같네요.”
“이젠 도망 못 갑니다.”
지크의 익살스러운 협박에 마릴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세요. 판 무덤에서 운명을 만났으니, 이 정도면 묫자리는 기가 막히게 정한 것 같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지팡이를 높이 쳐들었다.
“아무나 덤비라고 하세요! 멍청한 몬스터든 냄새나는 언데드든 정신 나간 악당이든 모조리 저주를 걸어줄 테니까요!”
“화끈하셔서 좋군요. 모쪼록 그 기세를 계속 이어나가 주세요.”
지크 일행은 비밀 문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마릴린이 신기한 듯 계속 주변을 살폈다.
“목적지는 먼가요?”
“아뇨, 다 왔습니다.”
지크의 대답에 마릴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위에는 그저 유적의 통로밖에 없던 까닭이다.
지크는 윈두르를 꺼냈다. 예전에 봤던 틈새를 찾아 윈두르를 찔러 넣었다. 그리고 돌렸다.
쿠쿠쿠쿠쿵!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새로운 비밀 통로가 드러난다. 그 모습을 마릴린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이 앞이 목적지입니다.”
지크가 드러난 문 안을 가리키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멍청하게 입구를 보는 마릴린을 조용히 직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