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9화
다음 날. 지크 일행과 마릴린은 도시 근처의 인적 드문 산속으로 들어왔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이 청명한 하늘을 가로막고 있다. 위에서 본다면 오로지 녹색의 향연뿐,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녹색의 바다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쿠웅!
또 하나의 나무가 넘어간다. 지크는 넘어진 나무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려 집어 던졌다.
쿵!
나무가 떨어진 곳에는 이미 지크 일행이 베어낸 나무들로 한가득이었다. 지크는 윈두르를 바닥에 거꾸로 꽂고 주변을 살폈다.
‘크기는 이 정도면 되겠군.’
“나무를 베는 건 이제 됐다! 스녹! 나무뿌리들을 전부 뽑아라!”
“네!”
“알겠습니다!”
지크의 명령에 열심히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러 나무를 베고 있던 한스가 행동을 멈췄고, 스녹이 지면에 손을 갖다 댔다.
흙바닥에 마치 돌멩이가 던져진 호수처럼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득!
나무가 꼿꼿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곳의 흙들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마치 끓는 물에 기포가 올라오는 것처럼 흙들이 표면으로 밀려나왔다. 그와 같이 나무뿌리도 땅 밖으로 끌려 올라왔다. 지크와 한스가 그것들을 한쪽으로 휙휙 집어 던졌다.
곧 커다란 공터 하나가 생겼다.
지크가 손짓을 하자 한스와 스녹, 엘레나가 공터 가장자리로 비켜섰다. 공터 중앙엔 지크와 라일라, 마릴린만이 남았다.
“각자 준비는 됐죠?”
“네!”
마릴린이 지팡이를 꼭 잡으며 말했다.
“나도야.”
라일라도 대답했다.
“알고 있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마릴린의 실력을 보기 위해서 하는 대련일 뿐입니다. 둘 다 너무 흥분하지는 말아요.”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마릴린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라일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다 싶을 때는 내가 바로 끼어들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지크도 공터 가장자리로 물러나려 등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라일라에게 말했다.
“라일라.”
“응?”
“적당히 봐줘.”
“알았어.”
아무리 마릴린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라일라보다 강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아무래도 순수 정면 대결에서 저주술사는 약하기도 하다.
하지만 마릴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크 님은 제가 질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마릴린이 볼을 부풀렸다.
“아무리 라일라 씨가 영웅이라고 불리는 굉장한 마법사라고 하더라도 저도 한가닥 한다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얼버무려 상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시 지크는 달랐다.
“그래도 라일라가 더 강할 겁니다.”
어떻게 보면 굳건하게까지 보이는 믿음이다. 라일라의 얼굴에 훈풍이 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또 기분이 좋지?’
그에 비해 마릴린의 볼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지크는 신경 쓰지 않고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공터 중앙에는 둘만이 남았다.
마릴린은 아직 불만이 풀리지 않았는지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진심으로 화가 난 건 아니었는지 곧 생글생글 웃으며 라일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려요.”
“저도요.”
라일라가 마릴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지크 님의 말씀대로 살살 부탁드릴게요.”
“불만인 게 아니었나요?”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주제 파악을 못 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에요. 게다가 정통 마법사에 비해 저주술사는 정면 대결에서 약한 것도 사실이니까요. 그냥 어리광 한번 부려본 거예요.”
마릴린이 헤실헤실 웃었다. 정말로 잘 웃는 밝은 아이다. 라일라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걸렸다.
“정말로 지크를 좋아하는군요.”
“에헤헤,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푹 빠져 버렸어요.”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왜일까. 짓고 있던 미소가 약간 무너졌다.
“라일라 씨는 어떤가요?”
“…네?”
저도 모르게 되물어 버렸다. 마릴린이 비밀 얘기를 하듯 목소리를 죽이며 물어 온다.
“라일라 씨는 지크 님을 좋아하세요?”
마릴린의 얼굴에 진지함이 어린다. 라일라는 당장 부정하려 했다. 지크와 자신의 사이에 사랑이라니. 그런 건 어울리지 않는다. 지크도 아마 피식 웃으며 단칼에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왜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마릴린의 말은 계속됐다.
“아무래도 다른 일행분들과는 다르게 두 분의 사이는 조금 특별한 것 같아서요. 식사를 하면서도 그게 계속 신경 쓰였거든요.”
회귀, 클로원, 그렌 제너드 등등 둘만이 공유하는 비밀이 많은 터라 그렇게 보인 모양이다.
“그래서, 어떠신가요?”
마릴린이 약간 집요한 모습으로 물어왔다. 라일라가 대답하기 위해 입을 떼려 할 때였다.
“거리 벌려!”
공터의 가장자리로 간 지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라일라의 입이 닫혔다.
“대답은 나중에 부탁드릴게요.”
마릴린이 상큼하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 지크의 말을 따라 뒤로 걸었다. 잠시 그녀의 등을 바라보던 라일라도 몸을 돌려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일정 거리를 두고 몸을 세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아무리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가벼운 대련이라지만 진짜로 마법이 오고 가는 것이다. 두 사람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지크가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그건 긴 포물선을 그리며 라일라와 마릴린의 가운데로 날아갔다. 둘의 시선이 돌멩이로 쏠린다.
툭!
돌멩이가 바닥에 닿았다. 동시에 라일라와 마릴린이 움직였다.
퍼엉!
시작은 라일라였다.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주먹만 한 불덩이가 쏘아졌다. 영창은커녕 어떠한 준비 동작도 없는 엄청난 속도의 마법 시전. 마릴린의 얼굴에 놀란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앙!
직선으로 날아간 불덩이는 나무에 부딪쳤다. 허리가 통째로 꺾이며 나무가 넘어간다. 절단 부위에는 격렬한 불꽃이 타오르며 새까만 재를 흩날렸다.
퍼엉! 퍼엉! 퍼엉!
다시 라일라의 지팡이에서 불꽃이 쏘아졌다. 이번엔 세 개다. 하나는 마릴린을 향했고 나머지 둘은 마릴린이 피할 곳을 예측해서 날아갔다.
하지만 이미 마릴린도 자신의 마법을 완성했다.
그녀의 주변에 검은 안개가 서렸다.
스르륵!
검은 안개에 맞닿은 불꽃이 작아지더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라일라는 몇 번 더 불덩이를 쏘아 보냈다. 하지만 검은 안개를 출렁이게만 할 뿐, 불덩이는 마릴린에게 대미지를 입히지 못했다.
그사이 마릴린은 새로운 주문을 외웠다.
후웅!
검은 안개를 뚫고 녹색의 빛이 뻗었다. 마릴린의 특기라고 하는 저주였다.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맞았을 때 좋지 않은 건 확실했다.
라일라가 검지를 뻗었다.
콰르릉!
샛노란 뇌전이 녹색의 빛을 꿰뚫는다. 날아오던 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앗!”
검은 안개 속에서 마릴린의 비명이 들린다. 설마 라일라의 가벼운 마법 한 방에 자신의 저주가 말 그대로 지워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마릴린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그녀는 바로 새로운 주문을 외웠다.
우우우우웅!
수천 쌍의 얇은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검은 안개 속에서 또 다른 안개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안개가 아니었다.
“벌레군.”
한스가 그것을 주의 깊게 쳐다봤다. 벌레라는 소리에 옆에 있던 엘레나가 움찔했다.
한데 뭉친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소름 돋는 날개 소리를 내며 라일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생리적 혐오감 때문에 라일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뿐, 라일라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화르륵!
라일라의 발밑에서부터 솟아오른 불길이 지면을 마치 뱀처럼 기어간다. 벌레들의 근처까지 뻗어간 불길이 갑자기 몸을 키웠다.
퍼엉!
일대 공간에 거대한 불기둥이 뻗었다. 새빨간 불꽃은 주변의 모든 걸 살라 먹으려는 것처럼 붉은 혓바닥을 이리저리 뻗었다.
후욱!
불기둥이 사라진 자리에는 검은 그을음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당연히 벌레들도 마찬가지였다.
“칫!”
마릴린이 혀를 찼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도 라일라의 계속된 공격에 이미 무척이나 흐릿해져 있었다. 불덩이를 몇 개만 더 맞는다면 남은 안개마저 사라질 게 분명했다.
마릴린이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녀는 품에서 작은 병 몇 개를 꺼냈다. 라일라가 그것을 주시했다.
‘포션이네.’
신전에서 만드는 치료용 포션이 아니다. 아마도 온갖 상태 이상을 일으키는 저주들이 담긴 포션일 것이다.
까악!
하늘에서 커다란 새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올리니 열댓 마리의 까마귀가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그중 한 마리가 마릴린에게 내려앉았다.
덥석!
까마귀는 마릴린이 준 포션들을 발로 꽉 쥔 후 다시 날아올랐다. 라일라가 까마귀에게 마법을 쏘려 한 순간 다시 한번 벌레들의 무리가 날아들었다. 이번엔 다섯 무리였다.
“어느 정도 준비운동은 됐으니 슬슬 본격적으로 갑니다!”
다시 검은 안개 속으로 숨은 마릴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일라는 지팡이를 지면에 콱 찍었다. 그리고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든지요.”
퍼어어어어엉!
다시 한번 라일라의 발밑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번 불길의 규모는 방금 전, 벌레 한 무리를 태웠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벌레들의 무리가 급히 불길을 피해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먹이를 쫓는 독수리처럼 불길은 벌레들을 향해 쏘아졌다.
화르륵!
다섯 무리의 벌레들이 다시 한번 잿더미가 됐다. 그러나 마릴린은 굴하지 않고 벌레들을 더 불러들였다.
동시에 까마귀들이 라일라의 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상황을 봐 포션을 라일라에게 끼얹으려는 것이다.
‘좀 성가시네.’
라일라가 일단 까마귀들을 떨어뜨리려 생각할 때였다. 라일라는 자신의 몸이 무거워진 걸 느꼈다.
‘저주인가.’
그녀의 눈이 마릴린이 있을 검은 안개를 쳐다봤다.
“약한 저주는 원거리에서도 바로 걸 수 있거든요!”
마릴린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렸다.
라일라는 몸에 몇 가지 이상이 더 생긴 것을 알아챘다. 오감이 감퇴하고 마력의 흐름이 꼬였다.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지금이 전투 중인 것을 감안하면 쉽게 볼 일도 아니다.
그 틈을 노리고 마릴린의 파상공세가 시작됐다.
우우우웅!
벌레들이 자신들의 몸을 사리지 않고 라일라를 향해 달려든다.
주르륵!
위에서는 까마귀들이 포션의 뚜껑을 따 액체를 아래로 쏟아낸다.
퍼엉! 퍼엉!
검은 안개 속에서는 마릴린의 녹색의 저주가 튀어나왔다. 방어를 더 단단하게 하려는지 검은 안개는 더욱 그 크기를 확장해, 라일라의 근처까지 뻗었다.
아무리 라일라라도 이 공격에는 당할 것 같았다. 한스와 스녹이 긴장된 눈으로 전투를 주시했고 엘레나는 두 손을 꼭 모았다. 오로지 지크만이 무덤덤했다.
라일라가 처음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어마어마한 속도의 주문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콰아아아아앙!
그것은 불꽃의 폭격이었다. 라일라를 중심으로 일어난 커다란 불꽃의 기둥이 떨어져 내리는 포션과 머리 위를 돌던 까마귀를 말 그대로 증발시켜 버렸다. 덤벼들던 벌레들도 시뻘건 화염에 삼켜졌고 저주의 빛들은 화염을 뚫지 못했다.
불기둥이 꺼졌을 때, 남은 건 검은 안개뿐이었다.
“이야아아아앗!”
갑자기 검은 안개에서 마릴린이 튀어나왔다. 지팡이를 높이 든 그녀가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라일라의 근처까지 확장된 검은 안개를 이용한, 나름 훌륭한 기습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일격을 허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라일라였다.
툭!
라일라는 내려쳐지는 지팡이를 흘려낸 후 그대로 마릴린의 옷깃을 잡았다.
“어? 어어?”
라일라의 손에 끌려가는 마릴린. 이렇다 할 반항도 못 한 채 그녀는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악!”
등허리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눈물이 핑 돈다. 마릴린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앞에는 라일라의 지팡이가 겨눠져 있었다.
“내가 이겼죠?”
라일라가 담담하게 승리 선언을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