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화
식사 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친근감 있는 마릴린의 성격과 지크의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대응으로 인해 마릴린은 식사 자리에 빠르게 융화되었다.
간단한 일상의 대화가 오고 가고 나직한 웃음소리가 식탁 위를 몇 번이고 뒤덮었다.
“그럼 마릴린 씨는 혼자서 여행을 하고 계신 겁니까?”
어느새 마릴린을 이름으로 부르게 된 한스가 물었다.
“그래요. 아무래도 여행을 해서 견문을 높이는 게 실력을 높이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마법사라고 하셨죠?”
같은 마법사인 엘레나가 물었다.
“맞아요.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려한 마법과는 거리가 멀죠. 제 전문은 저주 쪽이거든요.”
“아!”
저주, 혹은 암흑 마법이라고 불리는 그것들은 꽤나 특별한 마법이다. 같은 마법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여 있지만, 그 본질은 일반 마법과 다르다.
신관들이 사용하는 신성 마법과 대칭되는 것.
일반 마법사가 신성 마법을 사용할 수 없듯, 암흑 마법도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건 지식만은 이 세상 모든 마법사들을 찍어 누를 수 있는 라일라조차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특성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미지가 그리 썩 좋은 마법이 아니기도 했다.
그래서 보통 저주술사들은 음침하고 타인에 대해 배타적이다.
하지만 그런 건 멍청한 사람들이나 믿는 고정 관념이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마릴린은 무척이나 쾌활했다.
“후후후, 알겠나요? 저를 화나게 했다가는 무서운 저주가 내릴 테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요.”
발톱을 세운 맹수가 덤벼드는 것처럼 손가락을 오므린 후 팔을 번쩍 들어 올리는 마릴린.
하지만 거기엔 위험성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엘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주의할게요.”
“어라? 왜 웃어요? 정말로 무서운 저주를 내릴 거라니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저주를 내릴 건가요?”
“잘 물어봤어요!”
마릴린이 헛기침을 하며 젠체했다.
“일단 제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은 전부 개구리로 만들어버릴 거예요! 그리고 온갖 독초를 넣은 커다란 냄비에 같이 넣어서…!”
“언제 적 저주술사 이미지인가요!”
엘레나가 참지 못하고 웃었다.
마릴린이 말하는 것들은 예전, 저주술사들이 이해받지 못하고 두려움의 온상일 때 사람들이 생각하던 이미지다.
“정말 그럴 거라니까요!”
마릴린이 억울한 표정으로 책상을 쿵쿵 두드린다.
그 모습이 익살스러워 엘레나의 웃음이 더 커졌다. 한스와 스녹도 웃었고 지크와 라일라도 피식 웃음 지었다.
쿠?
자신의 음식을 모두 거덜 내고 스녹의 수프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노웸만이 영문도 모른 채 주변을 둘러봤다.
도끼눈을 뜨고 웃는 사람들을 노려보던 마릴린이었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뭐, 지크 님의 동료이신 용사님들이시니 이걸로 봐드리겠어요.”
그녀의 밉지 않은 거만함에 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마릴린의 너스레에 라일라도 적잖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가라앉았던 그녀의 기분이 어느 정도 회복됐다
하지만 스녹이 던진 질문이 다시 한번 라일라의 기분을 떨어뜨렸다.
“그러고 보니 마릴린 씨는 지크 님에게는 ‘님’자를 붙이시는군요?”
“원하신다면 스녹 씨에게도 붙여드릴 수 있는데요.”
스녹이 손사래를 쳤다.
“제가 무슨 ‘님’자 소리까지 듣겠어요. 그저 지크 님을 무척 존경하고 있으시구나 할 뿐이에요.”
“물론이에요!”
마릴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야기를 듣고 이 도시를 구한 분들을 전부 존경하게 됐지만, 그중에서도 지크 님은 특별한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직접 뵀을 때, 그 추측이 확신으로 변했죠.”
그녀가 지크를 쳐다본다. 누가 봐도 사랑의 시선이 듬뿍 담겨 있다.
평소라면 자신의 인기를 보라며 떠들 지크였지만, 마릴린이 상대라면 이야기가 좀 달랐다.
‘이 녀석의 사랑은 너무 무겁단 말이야.’
회귀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언제나 자신의 곁에서 헤실대다가 지크의 옆에 웬 여자가 들러붙었다 하면, 그게 사랑이나 성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살기등등한 얼굴로 잡고 있는 지팡이를 까딱거려 댔었다. 모양새가 당장이라도 그 여자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그것 때문에 이블린과 충돌한 적도 꽤 많다.
‘물론 그것만 아니라면 좋은 부하, 좋은 동료였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릴린과의 이야기는 즐거웠다. 그건 회귀 전에도 그랬다.
그녀는 지크에게 있어 팀과 비슷하나 다른 존재였다.
본질적으로 죽이 잘 맞는 존재.
팀이 폭력적인 부분에서 지크와 죽이 맞았다면, 마릴린은 그 외 일상적인 취향들이 들어맞았다.
지크에 대한 마릴린의 감정만큼 크진 않았지만 지크도 마릴린과 지낼 때는 상당히 즐거워했었다.
달그락!
앞에서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난 곳을 쳐다보자 라일라가 떨어뜨린 숟가락을 줍고 있었다.
“새로 갖다 써.”
“괜찮아. 어차피 수프는 다 먹었는걸.”
라일라는 숟가락을 한쪽에 방치해두고 빵을 잡아 천천히 뜯기 시작했다.
마릴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이시는데, 혹시 저 때문인가요?”
“그런 거 아니에요.”
라일라가 손을 저어 부정했다.
“그저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뿐이에요.”
“그래?”
지크가 라일라의 얼굴 여기저기를 뜯어봤다.
“음, 확실히 안색이 안 좋군. 아까부터 실수도 묘하게 많이 하는 것 같고. 슬슬 식사는 끝낼까. 대충 다 먹을 만큼은 먹은 모양이니.”
지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자, 방까지 데려다줄게.”
“아냐, 정말 괜찮아! 오히려 식사를 하면서 기분이 좀 나아졌어!”
그녀가 급히 부정한다.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는 않다.
“하긴, 오히려 이렇게 여러 사람과 얘기를 나누는 편이 기분이 더 좋아질 수도 있으니.”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래도 혹시나 기분이 더 안 좋아지면 망설이지 말고 말해라.”
“응, 알았어.”
다시 자리에 앉는 지크를 보며 라일라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는 지크가 전 측근인 마릴린을 만나는 자리. 지크로서는 무척이나 기분 좋은 자리일 것이다.
‘그런 자리를 방해할 수는 없어.’
지크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입장으로서 이런 작은 이벤트 정도는 지켜줘야 했다. 아무리 기분이 조금 안 좋기로서니 분위기를 망칠 순 없었다.
‘어라?’
그때 라일라는 조금 이상한 점을 느꼈다.
‘기분이 좋아졌어?’
방금 전까지 가슴 한쪽을 짓누르던 욱신거림이 사라졌다.
라일라 스스로도 놀랄 이상 현상.
‘어째서지?’
까닭을 모르겠다.
지금 일어난 일이라고 해봤자 지크가 자신을 걱정해준 것뿐이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아졌으니 됐어.’
이유는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
지금은 괜히 자리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크와 마릴린이 다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걸 보고 그녀의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 모습을 옆에 앉은 엘레나가 힐끔힐끔 쳐다봤다.
“여러분이 왜 다시 비올루윈에 오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마릴린의 질문에 지크가 또다시 이야기를 지어냈다.
“관광도시에 들를 이유라고는 하나밖에 없죠.”
“관광 때문인가요?”
“그렇습니다. 예전에 처음 비올루윈에 들렀을 때는 몬스터 습격 사건이 있어서 제대로 된 관광을 하지 못했거든요. 두 번째도 결국은 시민들에게 들켜서 실패했고요.”
지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운명이 저희의 비올루윈 관광을 방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이쯤 되니 오기까지 생기더군요. 어떤 방해가 들어오더라도 반드시 비올루윈의 관광을 마치겠노라고 말이죠.”
“재미있는 생각이시네요.”
“세상은 원래 재미있게 살아가야 하는 법입니다.”
“동감이에요!”
마릴린이 웃으며 대답했다.
“전 혹시 또 비올루윈에 다시 몬스터들의 습격 징후가 있어서 여러분들이 오신 게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적어도 지금 저희가 아는 정보에 몬스터에 대한 준동은 없습니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아, 하지만 조금 아쉬운 점은 있네요.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여러분들과 협력해서 싸우려고 했거든요. 좋은 추억이 됐을 텐데요.”
그녀가 약간 꿈꾸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떠올랐는지 지크를 쳐다봤다.
“여러분의 여행 목적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목적은 착한 일을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멋진 목적이시네요! 역시 여러분은 용사님들에 어울려요.”
그녀가 갑자기 몸을 돌려 앉아 지크를 정면으로 쳐다봤다. 혹 구겨진 곳이나 더러운 곳이 없나 옷 이곳저곳을 살펴 단정하게 고친 후, 지크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혹시 일행 한 명 더 필요하지 않으세요? 적에게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줄 수 있는 저주술사인데요. 상대방에게 엿 먹일 존재로서는 환상적인 인재랍니다.”
순간 라일라는 보았다. 당장 허락의 말을 내뱉으려다 필사적으로 되삼키는 지크의 모습을.
‘하여간 저 녀석은….’
저건 마릴린이 마음에 들어서 당장 영입하려다 만 게 아니다. 아마도 마릴린보다는 그녀가 한 말에 더 끌렸을 터.
적에게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줄 수 있고 상대방에게 엿 먹일 존재라는 말.
‘저것만큼 지크에게 감명을 줄 수 있는 말은 없을 거야.’
지크가 만약 일행을 더 늘릴 생각이 있다면, 마릴린은 적어도 50% 이상 가까이 그 가능성을 올렸다.
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안 됐다. 지크가 급히 자신의 말을 막은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실력이 있어야 했다.
‘신뢰야 회귀 전 지크 모어 시절에 이미 광적인 충성으로 이름났던 녀석이니.’
지금이야 회귀한 후라서 충성심은 사라졌을 테지만, 아무래도 한 번 겪었던 만큼 그녀에게 다시 그 충성심을 심을 방법 정도는 알 것이다.
‘그 새싹이야 벌써 보이기 시작했고.’
물론 지금의 지크가 힘의 마왕 지크 모어가 아닌 이상 충성심까지는 필요 없다. 신뢰만으로 충분하다.
‘그럼 역시 실력이 문제란 건데.’
위치 마릴린 프릴이라면 실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다. 자그마치 그 힘의 마왕의 네 측근 중 한 명이지 않았는가.
저주술사라는 특성상 정면 대결에서는 약할지 모르지만 뒤에서 뿌리는 온갖 저주와 서포트는 말 그대로 상대방을 지옥 일보 직전까지 몰아붙일 것이다.
‘지옥에 밀어 넣는 건 당연히 지크의 몫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지크에게 마릴린은 정말로 탐나는 인재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를 일행에 넣는다면 자신의 손으로 팀 플랫을 죽인 것에 대해 조금은 위로를 받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신경 쓰고 있는 게 보이니까.’
라일라의 생각은 정확한 모양이었다.
“우리의 여행은 상당히 고달픕니다. 일정 이상의 실력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저는 상당히 실력이 있다고 자부해요.”
마릴린이 가슴을 쭉 폈다.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신다면 실력을 한번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시험이군요! 어떤 시험이든 자신 있어요! 시켜만 주세요!”
“자신감이 무척 보기 좋군요.”
지크가 라일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라일라.”
“응?”
“네가 마릴린 씨의 실력 확인을 좀 해줘.”
라일라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