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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357화 (357/628)
  • 제357화

    시체가 가득한 들판. 오로지 죽음의 기운만이 넘실거리는 그곳에서, 지크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욕을 넘어 아예 수영까지 하려 하는지 피 웅덩이의 크기를 넓히고 있는 요하임 드라큘.

    자신이 수집한 미남의 머리를 이용해 최고의 미남을 탄생시켜 보겠다며 여러 개의 머리 부속을 짜 맞추고 있는 이블린 루즈.

    지난 전투 때 조금이라도 기분을 나쁘게 한 시체를 찾아 곱게 갈아버리고 있는 팀 플랫.

    하나하나가 지크의 스트레스를 저 하늘 높이 치솟게 만드는 부하들이었다.

    ‘아니, 부하들도 아니지. 세상 어떤 부하가 자기 우두머리에게 이딴 스트레스를 받게 하냐고!’

    자신의 업보를 청산하면 혹 이 스트레스 거리가 조금은 사라질까 착한 일을 하는 것까지 염두에 둘 정도로 지크는 골치가 아팠다.

    ‘가만. 저 녀석들은 나쁜 놈이니까 저 녀석들을 쳐 죽이면 혹시 그게 착한 일 아닐까?’

    그럴 듯한 생각이었다.

    ‘그래! 쳐 죽이자! 착한 일도 하고 스트레스의 근원도 없어지고! 좋은 일뿐이잖아!’

    토르니움의 자루를 쥔다. 그의 충실한 마검은 당장이라도 피를 받아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아!”

    지크는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잠시 동안 진짜 살기까지 품었지만, 그렇다고 진심으로 부하들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녀석들과는 나름 정이 든 것이다.

    물론 그 말은 지금의 스트레스 거리를 계속 지고 가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어, 다시 한 번 두통이 엄습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말소리가 들린 것은.

    “어머! 우리 마왕님께서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팔에 부드러우면서도 물컹한 감촉이 느껴진다. 고운 팔이 자신의 팔뚝을 다소곳이 감싸고 있다.

    “마릴린이냐.”

    “네! 마왕님의 충직한 심복! 마릴린 프릴입니다!”

    지크의 네 번째 측근이자 위치라는 이명을 가진 여자. 크게 뻗은 챙이 인상적인 모자 아래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드러나 있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요?”

    “내 걱정거리라곤 하나뿐이지 않겠냐.”

    지크가 턱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마릴린은 지크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랑스러운 동료들이네요!”

    “자랑?”

    ‘역시 이 녀석도 맛이 갔어!’

    하늘은 마지막 구원마저도 앗아가 버렸다. 지크는 정말로 오랜만에 진심으로 절망했다.

    마릴린은 동료들의 정신 나간 행동을 보며 꺄르르 웃었다. 하지만 지크와 끼고 있는 팔짱은 절대 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몸을 붙였다.

    “답답하다.”

    “에이, 천하의 힘의 마왕님께서 그러시려고요.”

    마릴린은 능청스럽게 지크의 말을 받아넘겼다.

    “답답하다니까!”

    지크가 마릴린의 이마에 손을 대고 밀었다.

    “우으으으윽!”

    하지만 자기가 무슨 인간 거머리라도 되는 양 마릴린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안…떨워…줘여으으으…!”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며 지크의 막대한 힘에 반항하는 마릴린.

    물론 위치인 그녀가 힘의 마왕이라고까지 불리는 지크에게 육체적 능력으로 대적할 수 있을 리 없다.

    당연히 지크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릴린이 필사적으로 지크에게 엉겨 붙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지크가 포기했다.

    “그렇게 좋냐?”

    “그럼요, 헤헤!”

    지크의 팔에 볼을 비벼대는 폼이 영락없이 주인의 다리에 얼굴을 비비는 강아지다.

    ‘뭐, 조금은 괜찮나.’

    마릴린은 지금 시체 밭을 뒤지며 실시간으로 지크의 스트레스 수치를 올리는 다른 셋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무식하게 때려 부수는 것밖에 모르는 다른 셋과 달리 뛰어난 머리로 자신의 참모 역할까지 맡고 있는 자가 아니던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마왕님의 곁에 있는 걸요! 좋지 않을 리가요!”

    기특한 말도 할 줄 안다. 지금껏 잔뜩 찌푸려져 있던 지크의 표정이 처음으로 펴졌다.

    그러나 그건 오래 가지 않았다.

    “그래, 좋아요. 좋아 죽겠어요. 이 시간이 계속 됐으면 해요. 마왕님만 곁에 있으면 돼요. 다른 것들은 필요 없어요.”

    “…어이.”

    갑자기 등 뒤에 흐르기 시작한 식은땀에 지크가 다시 팔을 빼려고 했다.

    꽈악!

    그러나 팔은 빠지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 마릴린의 힘이 더 세진 것 같았다.

    “이거 뭐….”

    “방해하는 것들은 전부 밟고 찢고 뭉개고 짓이겨서 치워버리죠. 그리고 위대한 마왕님의 위엄을 전 세계에 떨쳐 울리는 거예요. 감히 마왕님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는 놈들은 이 세계에 살 필요가 없어요!”

    “아니, 그러니까 팔을 좀…!”

    “그렇게 해서 세상이 깨끗해진다면 정말 좋을 거예요. 마왕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사라진 이상적인 세계. 아니, 생각해보면 마왕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도 나중에 배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역시 다른 놈들을 믿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전부 죽이죠.”

    “나는 나를 방해하는 놈이 아니면 굳이 죽이진 않….”

    “그리고 진정으로 마왕님과 마왕님을 따르는 측근들만 남는 거예요. 아니, 저 녀석들도 마왕님을 배신할지 모르니, 마지막엔 전부 죽이죠? 그리고 남는 건 마왕님과 마왕님의 진정한 측근인 저뿐.”

    그녀의 눈이 아련해진다. 광기가 소용돌이치는 침착하고 아련한 눈이라니. 그런 괴상망측한 눈 따위 지크도 처음 보는 것이다.

    “너무도 꿈같은 세상이에요!”

    “…그러냐?”

    지크는 더 이상 팔을 빼는 걸 포기했다.

    ‘낫기는 무슨.’

    자신의 부하 중 정상은 없다. 지크는 그 사실을 아주 절절히 깨달았다.

    “으음, 피가 좀 더 필요한데….”

    주변 시체를 핏줄기를 뻗어 끌어 온 후 말 그대로 쥐어짜 피를 빼내는 요하임 드라큘.

    “조금 더 오똑한 코는 없나?”

    주변에 늘여놓은 머리 하나하나를 비교해보며 자신의 이상적 미남 얼굴에 들어갈 코를 찾고 있는 이블린 루즈.

    “반항해 봐! 또 한 번 더 반항해보라고!”

    또 다른 시체를 말 그대로 분해하고 있는 팀 플랫.

    “헤헤헤, 우리의 환상 같은 미래가 눈에 선하네요.”

    마약이라도 한 것마냥 헤실거리는 마릴린 프릴까지.

    지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상에 강림한 지옥과는 달리 하늘은 푸르기 이를 데 없었다.

    ‘아아, 어디론가 가고 싶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지크의 혼탁한 눈동자를 내려다보는 하늘은 말이 없었다.

    * * *

    ‘위치, 마릴린 프릴이라….’

    라일라는 자신과 대각선 방향에 앉아 열심히 포크와 나이프를 놀리는 마릴린을 쳐다봤다. 그녀는 옆에 앉은 지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밝은 표정과 서글서글한 어투가 무척이나 친근한 인상을 준다. 성격도 적극적이어서 그녀는 벌써 다른 이들과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호기심이 많은지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해줄 수 없는 이야기가 많은지라 일행은 대답할 말을 잘 골라야 했다. 특히 한스와 스녹이 고생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녀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사람은 역시 지크였다. 그 때문에 한스와 스녹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새삼 생각하건데 역시 지크 님의 검의 모습은 이상하네요.”

    마릴린이 지크가 옆에 세워둔 윈두르를 요모조모 뜯어봤다.

    호기심이 이는 것도 당연하다. 지크 일행도 윈두르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가지기 일쑤였다.

    “보통 검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얻은 건지 알 수 있을까요?”

    “밝힐 수 없습니다.”

    “지크 님은 비밀이 많으시네요.”

    아쉬운지 마릴린이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곧 원래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떠벌였다.

    그녀는 지크에게 많은 걸 물었다. 대부분은 좋아하는 것이나 취미 같은 자잘한 것들이었다.

    지크가 좋아하는 것이자 취미는 자신의 적을 엿 먹이는 것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내뱉을 순 없었기 때문에 지크는 적당히 다른 취향과 취미를 말했다.

    거짓말들은 아니었다. 지크라고 적을 엿 먹이는 것만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음식이나 색깔 같은 취향도 분명 있었다.

    “와! 정말요? 저랑 똑같네요!”

    마릴린이 손뼉을 짝 쳤다. 그리고 더욱 이것저것 질문을 한다.

    그 모습을 라일라는 뚱하게 쳐다봤다.

    ‘알고 있어.’

    그래, 알고 있다. 파이넬의 수작으로 더욱 선명해진 기억에는 위치 마릴린 프릴에 관한 사항도 있었다.

    이른바 지크 모어의 광신도.

    지크의 측근들 중 가장 지크를 따른 자다. 그 충성심은 가히 처절이라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

    그리고 지크의 측근들 중 인성에 가장 문제가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각자 놔둬도 충분히 세계에 해악을 끼칠 뱀파이어, 서큐버스, 웨어울프와는 다르게, 위치는 혼자 있을 때는 그다지 세계에 위험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가 세계에 위험이 된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따른 것이 힘의 마왕 지크 모어였기 때문이다. 만약 지크 모어가 없었다면 그녀의 악행도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지크 모어를 따랐어.’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것도 로브 놈들의 계략이었겠지만, 그녀가 알기로 그녀가 지크를 따른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마릴린과 지크의 궁합이 지나치게 잘 맞는다는 것.

    “어머, 그 점도 저랑 똑같네요!”

    신이 나서 지크와 자신의 공통점을 확인해나가는 마릴린. 그녀는 지크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자신도 그렇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누가 보면 지크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아부를 떤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니었다. 라일라의 지식에 따르면 마릴린의 저 말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이거 참 우연이군요.”

    “이 정도면 운명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높았던 지크에 대한 마릴린의 호감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높아지는 것이 보인다.

    눈치가 더럽게 없는 한스와 스녹조차도 마릴린이 지크에게 보내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챌 정도였다.

    지크와 그녀가 만났을 때부터 이런 상황은 예견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게 어떤 때건, 라일라의 기억으론 마릴린은 지크와 만난 이후 그에게 반해 쫓아다녔다.

    게다가 지금 지크도 그녀에게 묘하게 상냥했다. 회귀 전 동료들에게 상당히 무른 지크였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더했다.

    ‘아마도 팀 플랫의 영향일 거야.’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버려 지크 자신이 직접 처리한 전 측근.

    마릴린은 그 이후에 만난 측근이니 아무래도 가슴에 품은 상념이 평소와 같을 수가 없으리라.

    ‘그래. 이해한다 이거야.’

    대체 어떤 우연의 일치로 마릴린을 비올루윈에서 만나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특성상 결국 지크에게 커다란 호감을 가지는 것은 자명했다.

    어떻게 보면 마릴린의 말처럼 그건 운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 이거 맛있네요. 지크 님,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자신의 앞에 놓인 요리 중 맛있는 부위를 지크의 앞에 옮겨놓으며 웃는 마릴린의 모습에 라일라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드리워졌다.

    달그락!

    “스, 스승님?”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엘레나가 라일라를 불렀다.

    라일라는 정신을 차렸다. 접시 위, 음식이 없는 공간에 의미 없이 포크를 내리찍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그, 무슨 일 있으세요?”

    “일은 무슨.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을 뿐이야.”

    그러고는 이번엔 제대로 포크로 음식을 찍어 입 안으로 가져간다. 하지만 엘레나는 그 모습에서 지워지지 않은 위화감을 느꼈다.

    지크와 마릴린을 보는 라일라의 눈빛이 뭔가 무서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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