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화
지크는 뒤를 돌아봤다. 황급하게 뛰어온 듯 허리를 숙이고 무릎에 손을 댄 채 숨을 고르고 있는 여성 한 명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샛노란 금발이다. 어깨 위로 깔끔하게 자른 머리가 숨을 고를 때마다 찰랑인다.
간신히 호흡을 정리한 그녀가 허리를 폈다. 검은색 눈이 지크를 직시했다.
그녀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볼에 박혀 있는 옅은 주근깨조차 일종의 매력으로 보였다.
“절 불렀습니까?”
지크가 물었다. 그녀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맞아요! 저기, 분명 지크 님이시죠? 비올루윈을 구하셨던…!”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이 메고 있는 가방을 뒤적여 돌돌 말린 종이 하나를 건넸다. 종이를 펴자 드러난 건 지크의 얼굴이었다.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용사들의 초상화라 하기엔 지크 일행의 본 얼굴과 너무도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그녀가 들고 있는 초상화는 무척이나 상세했다.
누구라도 그림만 보고 쉽게 지크를 특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거 굉장히 비싼 거거든요! 구하기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이것만큼 자세하게 그려진 초상화도 없을 거예요!”
그녀가 예쁘게 웃는다. 누가 봐도 정말로 만나고 싶던 사람과 만났다는 얼굴이다.
지크는 초상화를 봤다.
‘아무래도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그린 것 같군. 화가의 실력도 상당하고.’
아마 가격도 비싸고 희귀하기도 할 터. 지크는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용사라는 칭호는 부담스럽지만, 제가 예전 비올루윈이 몬스터에게 습격을 당했을 때 도움을 준 사람은 맞습니다.”
“역시!”
그녀가 두 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었다. 그 와중에도 지크의 초상화만큼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잡고 있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그녀가 허둥지둥 다시 가방에 손을 넣었다. 거기엔 펜과 잉크가 있었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기에 사인을 좀….”
어느새 자신의 손에 쥐어진 펜을 보고 지크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펜촉에는 이미 잉크까지 잔뜩 묻어 있었다.
지크는 자신 앞에 활짝 펼쳐진 초상화 오른쪽 아래에 유려하게 사인을 적어 넣었다.
“아래에 ‘마릴린 프릴에게’라고 적어주세요!”
“그게 이름인가보죠?”
“아! 제가 아직 이름도 가르쳐드리지 않았군요!”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걸 목격한 사람처럼 비탄 어린 비명을 지른 마릴린이 급히 자신을 소개했다.
“마릴린 프릴이라고 해요! 비올루윈을 구한 지크 님을 평소부터 존경하고 있었어요!”
“어, 프릴 양?”
“마릴린이라고 불러주세요!”
“마릴린 양. 일단 소리부터 좀 줄여주시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변장까지 하고 들어왔건만 이러다간 전부 헛수고가 되게 생겼다. 실제로 주변에서 이쪽에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크의 정체가 탄로 난 건 아니다. 그저 작은 소란이 일기에 사람들의 호기심이 생긴 것뿐이다.
하지만 마릴린을 이대로 둔다면 지크의 정체가 탄로 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아, 죄, 죄송해요!”
마릴린이 자신의 입을 막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확연히 줄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단, 지금처럼 소리만 조금 신경써주시면 됩니다.”
“네!”
그녀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했다.
“그런데 지크 님.”
‘님’이란 극존칭을 붙이면서 마릴린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크에게 한 걸음 더 붙었다. 초면의 남녀 사이의 거리라기엔 지나치게 가까웠지만 마릴린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다시 비올루윈에 오셨나요? 다른 일행분들은 어디 있으시고요? 아, 혹시…!”
마릴린이 뭔가를 깨달은 것마냥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다시 비올루윈에 몬스터 습격 전조가…!”
지크가 마릴린의 입을 막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제는 숫제 비명을 지르는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주변의 주목이 모였다. 주시하는 사람이 아까보다 훨씬 더 많았다.
지크를 알아본 것 같진 않다. 다만, 다행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범죄자,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상한 자를 보는 눈빛이군.’
조금만 더 소란이 일어난다면 경비병을 부를 기세다.
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지만, 이곳은 몬스터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은 도시다. 게다가 관광도시라서 치안도 다른 도시보다 훨씬 더 좋다.
지크는 마릴린의 입에서 손을 뗐다. 일단 강제로 여성을 납치하려는 납치범을 보는 시선부터 없애야 했다.
“제가 목소리를 낮춰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했네요!”
다시 마릴린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인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시선이 흩어졌다.
적어도 모르는 사람을 대낮에 납치하려는 모습은 아닌 것이 확인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시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단 장소를 옮기죠.”
지크가 말하자 마릴린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다른 용사분들을 뵐 수 있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녀는 라일라, 한스, 스녹도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지크의 사인이 들어간 초상화를 둘둘 말아 가방에 넣었다.
지크가 살짝 안을 들여다보니 세 개의 종이가 보였다. 뭔지는 익히 짐작이 갔다.
“음, 다른 일행에게 데려가는 건 좀 생각을….”
“네? 못 뵈는 건가요!”
다시 한 번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또다시 주변의 주목이 끌렸다.
지크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말했다.
“가도록 하죠.”
이 여자는 분명 계산해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크는 확신했다.
* * *
“우와! 우와! 우와! 우와!”
정확히 네 번. 자신의 앞에 있는 지크 일행과 자신이 들고 있는 초상화를 비교해 보며 마릴린이 감탄사를 내뱉은 횟수다.
그녀가 새로 본 용사(?)들은 세 명.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에 지크의 초상화를 꺼내 지크와 번갈아 보며 감탄사를 한 번 더 내뱉었다.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군.’
지크가 왕자병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평소 자신에 대한 찬양에 인색하지 않은 지크지만, 지금은 지크의 착각이 아니다.
마릴린은 이성에 대한 관심은커녕 당장 내일 놀거리를 찾아 헤맬 다섯 살짜리 꼬마조차 쉽사리 알아차릴 정도로 지크에게 높은 호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 일행이 한 명 더 느셨네요?”
마릴린이 엘레나를 보고 말했다.
“여행을 하다 보니 일행이 늘더군요.”
“그러니까 새로운 용사 후보라는 말이군요!”
“요, 용사 후보라니!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라일라 스승님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을 뿐이에요!”
엘레나가 급히 부정했지만 마릴린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새로운 용사 후보는 용사님의 제자로군요!”
“새로운 용사라니…. 그런 엄청난 이름값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전!”
“어머, 괜찮지 않나요? 분명 라일라 님은 비올루윈에서 이름 높은 용사이신 분이에요. 그런 분이 제자를 함부로 받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네요. 그러니까 성함이….”
“엘레나 드웨인이에요.”
“드웨인씨는 분명 훌륭한 용사님이 될 거예요. 다른 용사님들과 같이 여행을 다니고 있는 걸요.”
“그, 전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리라곤 생각이….”
“훌륭하신 스승님을 두고 계시잖아요? 전 분명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요.”
엘레나는 우물쭈물했다. 그녀의 평가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고평가의 근거가 존경하는 스승 라일라이니 섣불리 부정하기도 뭐했다.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엘레나를 지나친 마릴린이 본격적으로 용사라고 알려진 일행과 안면을 트기 시작했다.
“당신이 태양의 용사 한스 씨군요! 휘황찬란한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위력은 정말로 환상적이었답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나름 전투와 여행에 대해서는 원숙해졌지만 이런 노골적인 칭찬에는 아직 내성이 없던 한스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태양의 용사라는 별명도 낯간지러웠다.
그러나 기분은 좋았다. 그의 꿈이 점점 이루어지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스녹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두더지를 데리고 있는 분이 대지의 용사 스녹 씨고요! 대지를 떨어 울리는 그 능력은 정말로 가공했어요! 환수인 노웸도 너무 귀엽네요.”
“고, 고맙습니다.”
그의 반응도 한스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에 비해 노웸은 ‘쿠!’라고 크게 외쳤다.
“그리고 당신이 라일라 씨! 막대한 마법을 바탕으로 몬스터들을 섬멸한 마도의 용사! 거기에 엄청난 미인이기까지! 뭇 남성들이 당신을 보고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잠을 설쳤다고 해요!”
“감사해요.”
한스, 스녹과는 달리 그녀는 담담하게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옆에서 날아오는 반짝이는 제자의 눈빛만은 부담스러웠는지 그녀는 엘레나 쪽에는 결코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마릴린이 지크를 쳐다본다. 지금껏 반짝이던 그녀의 눈빛이 일순 수백 배로 증폭한 느낌이었다.
“이 용사 파티의 리더이자 막강한 힘으로 말 그대로 도시의 몬스터를 쓸어버린 용사! 그 이명도 자그마치 힘의 용사! 다른 세 명의 용사를 이끌고 위기에 빠진 비올루윈을 구한, 그림으로 그린 듯한 영웅!”
마릴린이 지크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지크 님!”
“음, 제가 지크가 맞긴 합니다.”
지크가 조금 질린 듯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에 대한 칭찬을 즐기는 데 망설임이 없는 지크지만 이번 칭찬은 받아들이기가 너무 괴로웠다. 자신을 용사로서 칭찬하고 있지 않은가.
‘구역질이 나는군.’
지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지크를 창백한 안색으로 뒷걸음질 치게 만든다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한 마릴린이었지만, 그녀는 정작 자신의 위업을 깨닫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저 사방을 둘러보며 무척 기쁘게 미소 지었다.
“비올루윈의 용사님들을 이렇게 직접 뵙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세상에, 이게 정말 꿈이 아닌지!”
그녀는 뺨을 꽉 꼬집었다. 상당히 힘을 줬는지 그녀의 볼이 금방 새빨개졌다. 고통이 상당하리라. 하지만 그녀의 싱글벙글한 얼굴은 변할 줄 몰랐다.
“역시 진짜예요!”
고통보다는 지금이 현실이라는 기쁨이 훨씬 더 큰 모양이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급히 가방을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일행의 초상화가 줄줄이 나왔다.
“여기 사인 좀 부탁드려요!”
잉크에 촉을 푹 담근 펜과 초상화가 내밀어지자 일행은 당황했다. 하지만 곧 조심조심 초상화 한쪽에 자신의 사인을 했다.
대부분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쓰는 것에 불과했지만 마릴린은 그것만으로도 무척 기뻐했다.
쿠!
스녹의 사인 옆에는 잉크에 발을 푹 담가 찍은 노웸의 발자국까지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녀는 엘레나의 사인도 받았다. 분명 다른 일행을 따라 훌륭한 용사가 될 것이니 미리 받아 놓아야 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모든 사인을 받은 마릴린이 그것들을 보고 히죽히죽 웃었다. 언뜻 광기까지 보이는 그 모습에 일행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목적은 다 이루셨습니까?”
“네, 그래요! 설마 제가 이런 엄청난 행운을 얻게 될 줄이야!”
“그렇게 저희를 만난 게 좋았습니까?”
“이를 말인가요!”
“그럼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시겠습니까?”
마릴린이 입을 막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생각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되는 일이 아니시라면 꼭 부탁드릴게요!”
“그럼 저녁 시간대에 맞춰 이곳에 오시겠습니까?”
“반드시 올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올게요! 팔다리가 모조리 부러지더라도 올게요!”
“그렇게까지 오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지크의 만류도 그녀의 열정을 가로막을 순 없는 것 같았다.
생애 최고의 선물을 받은 아이마냥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크 일행의 숙소에서 나갔다.
“무슨 생각이야?”
라일라가 지크에게 물었다. 지금의 행동은 자신들의 신분이 알려지는 걸 극명히 피하던 지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스와 스녹을 가리켰다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자신들이 한 선행이 어떤 반응이 되어서 돌아오는지 한번 겪어보는 것도 좋을 거야.”
한스와 스녹은 지금껏 자신들이 한 영웅적 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칭송을 제대로 느낀 적이 없다.
기껏 좋은 일을 해 주변의 호감이 최대치로 올라간다 해도 지크가 그들을 데리고 도시를 떠났으니까.
진짜 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건, 그들의 동기부여에 더욱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한스와 스녹이 쑥스러워했다.
“그것만이 아니지?”
라일라가 묻자 지크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이유가 더 있지. 그런데 그 이유는 너도 알 텐데?”
“그렇긴 하지.”
마릴린 프릴. 그녀는 지크와 라일라의 기억에 있는 인물이었다.
회귀 전, 마왕 지크 모어의 네 측근 중 마지막 한 명.
위치, 마릴린 프릴.
설마 지금 이곳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으리라곤 지크도 예상하지 못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