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4화
“수?”
“그래.”
지크는 품속에서 뭔가를 빼냈다. 그것은 나오자마자 화끈한 마력을 뿜어내며 자신의 존재를 주변에 알렸다.
“화염의 눈물? 그걸로 뭘 하려고?”
라일라가 눈을 끔뻑였다.
화염의 눈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마력을 품고 있는 보물이다. 분명 쓰려면 여러 용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도 아닌 지크가 그걸로 뭘 하려는지는 판단이 가지 않았다.
‘어감을 보면 자기 실력을 늘리는 데 쓰려는 것 같은데.’
“이 녀석의 마력을 흡수해서 내 마력과 충돌시킬 거다.”
“뭐!”
라일라가 기겁을 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죽으려고 작정을 했어? 네 몸 내부가 완전히 불타 버릴지도 몰라! 아니, 시도한 순간 시체도 못 남기고 잿더미로 변할 가능성이 더 커!”
슈트올로 돌아오는 동안 화염의 눈물을 살피는 게 마치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보이더니, 생각마저 어린아이로 퇴보해 버렸던 말인가.
“자자, 일단 내 말부터 좀 들어봐. 아무렴 내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런 생각을 했겠어?”
여전히 씩씩대는 라일라였지만 일단 말이라도 한번 들어보기로 정했는지 팔짱을 꼈다. 헛소리를 한다면 막대한 잔소리를 쏘아붙여 주겠다는 의지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내 마력은 지금 꽤 많이 풀렸어. 그래도 아직 풀리지 않은 마력이 더 크지. 그 정도로 내 마력은 크니까. 아마 모든 마력을 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회귀 전의 실력과 기억을 바탕으로 경악할 속도로 마력을 풀어가고 있는 지크였지만 아직 전성기의 실력을 찾기는 요원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의 마력을 내 안으로 흡수한 다음 내 마력과 충돌시켜 억지로 깨우는 거지.”
에너지 드레인. 예전 밸르의 주조각상의 핵에 들어 있던 밸르의 기운을 이용해 마력을 깨우는 것과 같은 짓을 또 하려는 것이다.
단, 당시의 밸르의 기운과 지금의 화염의 눈물의 마력은 비교를 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후자가 압도적이란 것이 차이일 뿐.
“그러면 한층 빠르게 내 본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저승행 날짜도 훨씬 더 단축되겠지. 그걸 생각이라고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거야?”
라일라는 납득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호수의 눈물이었다면 조금쯤은 고민을 했을 거야. 물의 마력은 얌전한 편이니까. 하지만 그게 품고 있는 건 화염의 마력이라고! 다루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마력! 파괴적이고 폭급한 마력이잖아!”
“그렇기 때문에 효과는 더 좋을 거야. 생각 같아서는 번개의 마력이 효과는 더 있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잖아. 갖고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
“지크!”
라일라의 강한 반발에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반대할 거라는 생각은 했다만, 생각 이상이로군. 왜 그렇게 과민 반응하는 거야? 그렇게 내 몸이 걱정 돼?”
“다, 당연하지! 동료의 몸인데 걱정을 안 할 수가 있을까!”
“그렇다기엔 묘하게 반응이 격한 것 같은데?”
“그런 것보다 화염의 눈물의 얘기나 해!”
라일라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어쨌든 난 반대야! 너무 위험해!”
“나도 죽고 싶은 생각은 없어.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시도하려는 거야. 너도 내 마력 컨트롤 알잖아. 아무리 불 속성에 내 것이 아닌 마력이라고 해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굳이 그렇게 서두를 필요 있어? 언젠가는 전부 풀릴 마력 아니야. 그것도 너라면 평범한 마력을 가진 사람들보다 훨씬 더 빨리 풀어낼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기다리면 안 돼?”
“지금 확실하게 말하건대, 라일라. 우리는 지금 시간이 없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지크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라일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렌 제너드가 회귀 능력을 가졌단 걸 알게 된 지금, 우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 위를 걷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지금의 시간대는 너와 나에 의해서 많은 것이 바뀌었지. 그리고 아마 그건 그렌 제너드가 원한 바가 아닐 거야. 아직 자신이 원하는 미래로 유도할 자신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사건을 경험해 보기 위한 것인지 시간을 돌리지 않고 있지만, 녀석의 생각이 바뀌기라도 하는 순간 우리는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리가 행한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
라일라는 대답할 수 없었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도 어쩌면 회귀가 끝난 직후일지도 몰라. 시간, 기억 등등 모든 것들을 의심해야 하는 순간이 되어버린 거야. 그걸 없애기 위해서는 시간 회귀를 막아야 해.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의심되는 것들을 모두 해봐야 하고 말이야. 최대한 신속히.”
지크는 심각한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다시 본래의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렌 제너드 그 놈을 그냥 줘패버리고 싶지만 녀석의 회귀 조건이 뭔지를 모르니 당분간은 무리겠지. 어쨌든 내 의견은 그래.”
“…알았어.”
“그럼 네 의견은?”
“…찬성이야.”
“이해해 줘서 고마워.”
지크가 씨익 웃었다.
라일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신 나도 도울게. 네가 할 일, 조금 더 안정적으로 만들어 보겠어. 그러니 화염의 눈물을 당분간 빌려줘.”
“그래주면 고맙지.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릴 순 없어.”
“걱정 마. 나도 오래 끌 생각 없으니까.”
라일라는 지크에게서 화염의 눈물을 건네받았다. 화염의 눈물이 내뿜는 붉은빛이 라일라의 눈을 간지럽혔다. 마치 ‘네가 나를 다룰 수 있겠느냐’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라일라의 눈빛은 화염의 눈물에서 나온 빛에 밀리지 않았다.
“적어도 일주일 안에 답을 찾아낼게.”
라일라는 화염의 눈물을 품속에 넣었다.
* * *
그 날을 기점으로 라일라는 자기 방 안에 틀어박혔다. 식사하러 나오지도 않아 밥도 자기 방 안으로 가져다줘야 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그녀가 나왔다.
“완성했어.”
“수고했다.”
지크가 라일라에게 과즙 음료를 건넸다. 몇 날 며칠을 갈증에 시달리다 오아시스를 만난 낙타처럼 그녀는 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꼴이 말이 아니군.”
지크의 말처럼 라일라의 행색은 거의 병자 수준이었다. 부스스한 머릿결과 길게 내려온 다크서클. 안색도 새하얀 게 절대 좋은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라일라는 자신의 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자신이 낸 성과가 중요했다.
“다시 물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자. 이건 그곳에서 해야 효과가 커.”
“좋지. 하지만 그 전에 하루 정도는 푹 자라.”
“…그렇게 심각해?”
라일라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지크는 단호하게 말했다.
“좀비가 말을 하는 것 같다.”
솔직히 좀 아니, 무척 과장된 말이었다. 하지만 라일라를 설득시키기엔 충분했다.
“…알았어. 딱 하루만 잘게.”
“그래.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 괜히 서두르다 일을 망치는 것보다 쉴 때 쉬는 게 일이 더 빨라.”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하루 종일 꿀 같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 * *
지크 일행은 다시 물의 나무가 있는 곳으로 왔다. 나무는 여전히 푸른 물줄기와 함께 많은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기는 물의 마력이 충만해.”
라일라가 마법 상자에서 화염의 눈물을 꺼내며 말했다.
“화염의 마력을 억누르기엔 아주 좋은 장소지. 물의 마력을 직접 이용하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야.”
“물의 나무를 이용할 생각은 아니겠지?”
“미쳤어? 파이넬의 그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그냥 이 공간 안에 있는 마력을 조금 이용하는 것뿐이야.”
그렇게 말하고 라일라는 마법 상자에서 또 뭔가를 꺼냈다. 그건 주머니였다. 주머니의 끈을 끌러 입구를 개봉하고는 손을 넣어 은빛의 가루를 꺼낸다. 미스릴을 곱게 간 가루였다. 예전 마탑에서 구입한 것이다.
그녀는 그걸 물의 나무 바로 옆쪽에 살살 뿌리며 어떤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복잡한 선들의 교차와 꼬불거리는, 알아보지 못할 문자들이 서로 이지러지며 점점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났다.
“우와!”
곁에서 스승이 하는 일을 구경하던 엘레나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가 보기에 라일라의 마법진은 대단한 것을 넘어선 일종의 예술이었다.
“나중에 연구하게 해주마.”
“정말이죠!”
라일라의 말에 엘레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라일라는 마법진을 완성시켰다. 직경 3m 정도의 그것은 누가 봐도 무척 정교해 보였다. 게다가 마법진을 이루고 있는 것이 미스릴 가루이니, 그 가격 또한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됐어!”
라일라가 팔을 허리에 댄 채 자신의 작품을 내려다봤다. 혹시라도 오차가 난 곳이 있을까 다시 한번 꼼꼼히 살폈지만 마법진은 완벽했다.
라일라가 지크를 쳐다봤다.
“에너지 드레인이라고 했지? 이 안에서 하면 돼.”
라일라의 손가락이 마법진 중앙을 가리켰다.
“주변에 떠도는 물의 마력을 안쪽에서 소용돌이치게 해놨어.”
“그래, 느껴진다.”
“저 정도의 물의 마력이라면 화염의 마력의 파괴적 성향도 어느 정도는 줄여줄 거야. 그럼 너에게 도움이 많이 되겠지.”
“확실히 그럴 것 같군. 고맙다, 라일라.”
“고마운 줄 알면 조심해. 덜컥 죽어버리지 말고.”
“명심하지.”
지크가 마법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루가 흩날리지 않게 조심스레 발을 디뎌 마법진 중앙에 도착했다. 라일라는 마법진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한스와 스녹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은 표정만으로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두 분의 거리, 왠지 가까워진 것 같지 않냐?’
‘그러게요.’
두 제자의 발칙한(?) 상상을 모르는 두 사람은 계획을 계속 진행했다.
지크는 마법진 중앙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화염의 눈물을 손에 꽉 쥐었다. 화끈한 기운이 손바닥에 느껴진다. 지크는 눈을 감았다. 라일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이들도 긴장한 모습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에너지 드레인.’
우웅!
화염의 눈물의 마력이 움직였다. 메마른 초원을 내지르는 거친 불길처럼 그것은 지크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큭!”
지크의 입에서 신음이 비집고 나왔다. 일행은 주먹을 꽉 쥐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쇼크사를 할 만한 부상에도 태연한 지크가 한순간이라지만 신음을 참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일행은 지크가 지금 얼마만 한 고통을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힘들군.’
지크는 몸에 들어온 불의 마력을 컨트롤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성문을 뚫은 침략군처럼 불의 마력은 이리저리 날뛰며 지크의 몸을 찢으려 들었다.
‘그래도 라일라가 준비해준 게 도움이 되고 있어.’
주변에 있는 물의 마력은 기세등등한 불의 마력을 저지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그것들을 방해하고 있었다.
지크는 천천히 마력을 이동시켰다. 지크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크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미 외부의 감각은 거의 차단된 상태. 지크는 그만큼 집중하고 있었다.
몸에 별다른 상처를 주지 않고 지크는 불의 마력을 자신의 마력이 있는 곳까지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지금부터였다.
‘정신 꽉 차리자.’
지크는 새삼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불의 마력을, 마치 언제까지고 무너지지 않을 요새처럼 꿈쩍도 않고 있는 자신의 마력에 부딪쳤다.
콰아아앙!
오로지 지크에게만 들리는,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 같은 게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