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2화
그렌의 새로운 동료에 대한 화제가 지난 후, 둘은 자잘한 대화를 나눴다.
“입력 장치 중에 이 녀석은 없었어?”
지크가 윈두르를 라일라에게 들이밀었다.
“없었어. 떠오른 기억 중에서도 윈두르에 대한 건 없어.”
“이 녀석만 아직까지 정체가 미스터리네.”
고대 제국 클로원부터 시작해서 라일라, 에스텔레이드, 토르니움 등등 많은 의문점들이 해소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를 새로운 시작으로 이끌었다고 의심되는 윈두르에 관한 것만큼은 아직도 많은 점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라일라가 말했다.
“클로원 황제의 검이라고 하지 않았어?”
“딱 거기까지지. 그 외에는 알 만한 게 없잖아.”
“하긴.”
지금 지크 일행 중 가장 정체 모를 물건이 되어버린 검을 지크와 라일라가 쳐다봤다. 하지만 당사자는 여느 때처럼 조용히 침묵하며 시치미를 떼고 있을 뿐이었다.
“쳇! 얄미운 녀석 같으니. 형태 변화도 꼭 필요한 상황일 때에만 하고 말이야. 그걸 보면 어느 정도 의지는 있는 것 같은데 새침을 떨고 앉았으니.”
“그 주인에 그 검이지. 둘이 잘 어울려.”
“젠장!”
지크는 혀를 차면서도 윈두르를 등에 멨다.
“그러고 보니 파이넬과 예전 연구소에서 봤던 고깃덩이의 연관관계는 뭐야? 그 연구소에 있던 것도 파이넬의 자매였나?”
“그건 아닌 것 같아. 파이넬은 분명 반란군의 연구결과를 제국에서 빼앗아 완성시킨 거라고 했었잖아.”
“옳거니. 그 연구소는 반란군의 연구소였다는 거군.”
“난 그렇게 생각해. 아마 연구 중에 폭주한 게 아닐까?”
“하긴, 그건 도저히 완성품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지.”
지크는 유적 전체를 휘감고 있던 고깃덩이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슬슬 돌아가볼까. 녀석들도 걱정하고 있을 테고.”
지크가 나무가 있는 방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마지막으로 질문. 혹시나 네가 그 공주님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있는 건가?”
“나도 그 생각을 해보긴 했어.”
라일라로서는 굉장히 끔찍한 상상이다. 지금의 라일라라는 자아가 소멸하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새로운 마왕이 강림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
그러나 그 위험성에 비해 라일라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클로원을 재건하고 싶어 한 그녀의 욕망은 그녀가 겪고 학습한 과거로부터 나온 거야. 하지만 그 과거가 통째로 날아갔으니. 아마 그녀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야. 네 말대로 따르자면 죽은 거지.”
“공주의 기억은 전혀 없나보지?”
“없어. 아직 남은 기억이 꽤 많지만 그 곳에도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해. 파이넬의 말처럼, 내 기억은 완전히 리셋된 거야.”
“그것으로 공주가 죽고 네가 태어난 거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기억이 왜 리셋됐는지는 알고 싶군.”
“앞으로 조사하면 알게 될 거야. 지금껏 우리가 많은 의문들을 풀어왔듯이 말이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것으로 따로 떨어져서 할 대화는 대부분 끝났다. 지크는 라일라가 되찾았다는 기억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건 나중에 해도 될 일이다. 다른 일행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는 것도 그다지 좋지 않다.
지크는 다시 나무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의 발걸음을 라일라가 막았다.
“잠깐만, 지크.”
“응? 뭐 또 할 말 있어? 중요한 게 아니면 다음에 하는 게 어때?”
“중요한 일이야.”
굳은 얼굴의 라일라를 보고 지크는 반쯤 회전시켰던 몸을 도로 돌렸다.
“무슨 일이야? 그렌 제너드나 파이넬에 대해서 뭔가 새로 떠오른 거라도 있어?”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주제는 아냐.”
그녀가 지크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녀의 눈은 뭔가 굳건한 결심을 담고 있었다.
“먼저 사과를 할게. 미안해.”
그녀가 고개를 숙인다. 지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사과를 받을 만한 일이 있나? 원한은 웬만하면 잊지 않는 나지만 뚜렷이 생각나는 건 없는데?”
“지금껏 너 보고 자꾸 마왕이 되지 말라고 감시하며 닦달한 것 말이야. 그걸 사과하고 싶어. 마치 미래의 악당이 될 자를 막으려는 사람처럼 굴었지만, 나도 너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지. 그런 말을 할 자격은 내게 없었어.”
‘조금 다르다고 생각은 하지만….’
방금 나눴던 대화의 주제처럼 기억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크와 라일라가 지크 브레이브, 클로원의 공주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정도로.
지크는 회귀 전 기억이 있지만 라일라는 없다. 어느 쪽이 마왕의 길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은지는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의 나는 마왕 지크 모어의 연장선이지만 라일라는 마왕 공주와 완전히 연결이 끊겼지.’
즉, 라일라의 잔소리는 근거 없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충분히 할 만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논리적인 마법사로서 라일라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리 없다.
이렇게 사과를 하는 건 생각으로써는 정리가 된다고 하더라도 감정의 정리는 되지 않았다는 것.
지크가 갑자기 라일라의 뺨을 꼬집었다. 그리 세게 꼬집은 건 아니라 통증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이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며 햬?”
입술이 당겨져 발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지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뺨까지 쭈욱 잡아당겼다.
“며 햐냐니꺄?”
여전히 대답은 없다. 손을 위로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기도 하고 앞뒤로 움직이기도 하며 빙글빙글 돌리기도 한다.
지크에 대한 죄책감과 그가 갑자기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라일라는 한동안 그가 하는 짓을 내버려뒀다.
하지만 그가 한 마디도 않고 오로지 그녀의 볼을 꼬집는 데에만 열중하자 점점 라일라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왔다.
“냐아!”
“눃으랴니꺄!”
“얀 들려!”
몇 번을 말해도 통하지 않고 지크의 손목을 잡고 뿌리치려 해도 마법사의 근력으로는 지크의 무지막지한 완력을 당해낼 수 없다.
퍼억!
결국 라일라가 정강이를 걷어차고서야 지크가 떨어졌다.
빨개진 볼을 두 손으로 문지르며 라일라가 도끼눈을 떴다.
“방금 전의 행동은 무슨 의미야?”
“네 반응을 보려고 했던 거야.”
지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는 과거에 마왕 짓을 했던 것 때문에 상당히 죄책감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전직 마왕으로서 충고하자면, 보통 마왕이란 것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짓을 당한 순간부터 당장 칼부림부터 일어나는 인간들이야. 그런데 너는 그 오랜 시간을 참았지. 내가 확언하건대 넌 마왕 소질 없어. 그러니까 네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니 운운은 그만 둬. 마왕으로서 프라이드가 상처 입는다.”
“…넌 그런 프라이드 없잖아.”
“이럴 땐 말 좀 맞춰라. 하여간 분위기를 모르는 녀석 같으니.”
지크가 투덜댄다. 반대로 라일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라일라가 지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들었다.
쭈욱!
“…며 햐냐.”
볼살이 쭈욱 늘어난 지크가 어이없어 했다.
하지만 라일라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지크의 뺨을 이리저리 늘려댔다. 방금 전의 지크가 한 것과 똑같이.
“뵤뵥이냐?”
“은혜렬 원슈료 걒는 겨야?”
“먈을 햬뱌.”
그러나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는다. 결국 지크가 라일라의 손목을 잡고는 억지로 떼어냈다. 그제야 라일라도 순순히 팔을 거뒀다.
“이유는 있냐?”
완벽한 발음으로 지크가 묻는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어처구니없어 하는 기색이다.
“보통 마왕들은 이 상황에 칼부림부터 일어난다며? 그런데 너도 참았구나?”
“지금의 내가 마왕이라고 할 순 없지. 예전 마왕이었던 시절과는 확연히 다른 길을 가고 있으니까.”
“응, 정말 그래. 너는 마왕이 아냐. 더 이상은.”
“그걸 확인하려고 이 난리를 떤 거냐?”
지크는 볼을 문지르며 뚱하게 쳐다봤다.
“지크.”
“뭐야?”
라일라가 웃었다. 입꼬리가 살갑게 올라가고 눈가는 은은한 초승달을 그린다.
그 미소는 지금껏 라일라가 지었었던 그 어떤 웃음보다도 더 밝고 유려하며 아름다웠다.
라일라의 외모에 익숙해진 지크가 한순간 넋을 잃을 정도로.
“고마워.”
단 세 글자로 표현하기에는 그녀가 안고 있는 감정들이 너무도 방대하고 복잡했다.
하지만 어떤 수식어를 붙인다 해도, 어떤 미사여구로 꾸민다 해도 지금의 감정을 표현하기엔 불가능했다.
말이란 표현수단의 한계가 이때만큼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때문에 오직 다른 여타의 미사여구 없이 라일라는 심플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정말로, 여러 가지로, 고마워.”
목숨을 구해준 일, 과거를 찾게 도와준 일, 위로해준 일 등등. 지금껏 그가 해준 일들이 연속으로 머리를 지나갔다.
지크는 라일라의 어깨를 한 번 툭 쳤다. 그리고 대답했다.
“천만에.”
* * *
지크와 라일라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한스, 스녹, 엘레나는 물의 나무 앞에 모여 있었다.
엘레나는 뭐가 그리 궁금한지 물의 나무 주위를 빨빨대고 돌아다니며 그 모습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쏟아지는 물을 이마에 주름이 지도록 주시하는가 하면, 나무뿌리를 지팡이로 톡톡 쳐대다가 나무뿌리 아래를 지팡이로 파보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노웸의 행동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쏟아지는 물을 쳐다보다가 별안간 입을 벌렸다.
“아, 안 돼, 노웸!”
쿠?
“그게 뭔지 알고 마시려는 거야!”
스녹의 발 빠른 행동에 노웸의 행동은 저지됐다.
한스는 둘과는 조금 거리를 두고 나무의 웅장한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세 명의 관심이 전부 물의 나무에 쏟아지고 있다는 것은 공통됐다.
지크와 라일라가 그들에게 합류했다. 다가오려던 셋을 지크가 손짓을 해 하던 것 계속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세 명은 다시 나무에 관심을 쏟았다.
지크도 나무를 바라봤다.
“이게 세 개째지?”
“맞아.”
“두 번째 게 불의 나무, 세 번째 게 물의 나무라. 첫 번째 나무는 정체를 알 수 없고.”
“난 대충 예상이 가.”
“과연 라일라. 대마법사의 이름이 어디로 가는 게 아니군.”
지크의 금칠에도 라일라는 별다른 내색 않고 말을 이었다.
“그건 땅의 나무라고 생각해.”
“이유는?”
“생각해 봐. 불의 나무와 물의 나무는 각자의 속성에 따른 물질을 가지에서 내뿜고 있어. 그렇다면 땅의 나무는 어떨까?”
“바로 생각나는 건 흙이나 바위를 가지에서 내뿜는 것일까.”
“그런 상상이 들겠지. 하지만 내뿜는다는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가지에 그 특유의 속성이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어. 우리가 무덤에서 봤던 나무를 생각해 봐. 가지보다는 뿌리처럼 생겼었지?”
“그렇지.”
“난 그게 진짜 그 나무의 뿌리가 아닐까 생각해.”
그 말을 듣고 지크도 라일라의 얘기를 알아챘다.
“과연.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땅 속으로 자라나는 나무란 거지?”
“그래. 땅의 나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아?”
라일라의 말이라면 분명 의문이 풀린다.
“확실히 설득력 있군. 좋아, 혹 부정적인 근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걸 땅의 나무라고 인식하자고.”
지크는 시원하게 결론지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이 녀석의 처리뿐인가.”
지크가 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지크가 빼앗은, 파이넬이 물의 나무를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던 물건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