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1화
“그래서 나와 비슷한 충격, 공포, 슬픔, 증오, 분노 및 여타 자잘한 부정적 감정을 느끼고 있는 너를 위해 조언을 해줄까 해.”
지크의 마음 씀씀이는 고마웠지만 라일라는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브레이브가 싫어?”
‘나와 비슷한’이란 말을 썼으니 아마도 저 장황한 부정적 감정들은 지크가 직접 느끼고 있는 감정들일 터.
대체 얼마만 한 절망과 좌절이 들이닥쳐야 저런 감정들을 모조리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실의에 빠져 있는 지금의 라일라도 저런 감정들을 모두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응.”
여타의 수식어 없이 그저 단 한 음절로만 이루어진 말. 하지만 라일라는 지금까지 들었던 지크의 말 중 그 한 음절이 가장 진실성 있는 말로 느껴졌다.
굳건한 신념으로 빛나는 지크의 눈이 설득력을 더했다.
라일라는 입을 다물었다.
“불쌍한 라일라. 지금의 자신과 반대되는 그런 끔찍한 기억을 떠올려서 슬펐지?”
이제 지크는 숫제 라일라를 불쌍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지크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고 타인을 불쌍하게 생각하다니.
‘대체 브레이브를 얼마나 싫어하는 거야!’
지크의 사고를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됐다고 여겼던 라일라였지만 그녀의 자신감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라일라의 심정이 어떻든 지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인간은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거야.”
“…내가 아니라니. 그건 분명 나였어.”
파이넬의 기억으로 똑똑히 봤다. 그녀의 눈에 비친 공주의 모습은 분명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라일라의 부정에 지크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 봐.”
“알아, 네가 무슨 말을 할지. 과연 기억, 추억, 사고, 행동양식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을, 육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동일인으로 취급할 것인가를 말하는 거지? ‘사람의 본질은 무엇인가’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사람’ 그 자체에 의문점을 던져 해답을 구하자는 거잖아.”
라일라가 조금 의외라는 눈빛을 지크에게 던졌다.
“설마 네가 이런 철학적인 방법을 해결책이라고 내놓을 줄은 몰랐어. 하지만 미안해. 아무리 그런 방법으로 그녀와 날 다른 인물로 보려고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과연, 그런 방법도 있었군. 확실히 마법사는 마법사라는 건가. 상당히 논리적인 방법이야.”
“…그 방법이 아냐? 그럼 네가 생각한 방법은 뭔데?”
“간단해. 그 녀석이 정말 정말로 싫잖아? 눈앞에 있으면 당장 심장에 검부터 꽂고 말을 걸 정도로 싫잖아? 그리고 지금의 자신은 그 녀석과 완전히 다르잖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소름 끼치는 놈이 나일 리가 없잖아? 그래, 그건 나일 수가 없는 거야.”
지크의 눈에 침착한 광기가 소용돌이치는 것을 라일라는 볼 수 있었다.
“알겠어, 라일라? 그것과 내가 동일 인물이라니. 애초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그걸로 고민하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 결론에 다다르면 돼.”
“…적어도 네가 지크 브레이브란 존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아.”
“실제로 나는 그 녀석을 나와 동일 인물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아. 인정할 수 없어. 용납할 수 없어. 납득할 수 없어.”
“으, 응. 알았어.”
어쩌면 지크 브레이브란 존재는 그렌 제너드를 넘어선, 지크의 최대 숙적일지도 몰랐다.
“반응을 보자면 이 방법도 너한테는 어려운 모양이군.”
“솔직히 그래.”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만. 감정의 원인 그 자체를 제거하는 방법이니까. 동일 인물이 아니니 더 이상 그것과 관련된 걸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지.”
“하지만 그건 너도 불가능한 방법이잖아.”
브레이브란 단어만 나오면 길길이 날뛰는 지크의 태도를 보건대, 지크도 그 방법을 잘 이행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나라도 불가능한 것쯤은 있어. 난 내가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는 아니니까. 오히려 무척이나 겸손한 사람이지.”
겸손의 정의를 약 20만 자의 글자로 정리해 그의 뇌리에 때려 박아 주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통할 녀석이 아니기에 라일라는 입을 다물고 무시하는 걸 택했다. 그리고 그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감정의 원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시간에 맡기는 수도 있어. 사람의 기억이란 무척이나 편리하지.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이라도 시간이라는 마법은 그걸 무디게 만드니까. 하지만 그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태도를 보면 너도 그 치료법을 원하는 건 같지 않군.”
“맞아.”
“그럼 가장 효과적인 건 자기 위안이지. 어떤 행동이나 생각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거야.”
“자기 위안.”
라일라가 중얼거렸다.
“뭐, 자기 죄를 정면으로 마주 볼 배짱도 없는 나쁜 놈들이 위선질을 할 때 써먹는 방법이기도 하다만, 그렇다고 평가 절하할 필요도 없어. 실제로 마음을 다스릴 때 꽤 유용한 방법이니까. 어감이 안 좋다면 속죄라고 생각해라. 난 둘을 똑같이 생각하니까. 정확히 말해서 자기 위안의 한 방안이 속죄지.”
“…만약 한다면 뭘 하면 좋을까?”
“굳이 찾을 필요가 뭐 있어. 이미 우리가 열심히 하는 게 하나 있잖아.”
라일라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착한 일.”
“바로 그거야.”
지크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파이넬에 대한 동정이든 기억도 하지 못 하는 시간에 행한 악행이든, 앞으로 할 착한 일로 덮어버려.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자세하게 알려줄 테니까. 그 분야에서는 내가 완전 선배 아니냐.”
지크의 너스레에 라일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그렇네. 네가 선배지. 스녹도 그렇고.”
“게다가 착한 일 중에서도 우리가 하는 일은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일이잖아. 어떻게 보면 마왕 라일라를 막는 것과 같은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더 편해질 수도 있다.”
“지크 브레이브처럼?”
“…네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타입인 줄은 몰랐는데.”
라일라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분명 아까보다 커다랬다. 아직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분명 기운이 솟은 것도 분명했다.
“위안이 됐냐?”
“조금은. 좋아, 지크. 네 말을 따를게. 적어도 나에겐 다른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으니까.”
“탁월한 선택이다.”
“앞으로 도움을 줄 거지? 선배로서 말이야.”
신뢰 가득한 눈길로 라일라는 지크를 쳐다봤다. 지크도 그 신뢰를 정면으로 마주봤다.
“물론이지. 어떻게 하면 적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 있는지 내가 완벽하게 교육해주마.”
“그건 필요 없어.”
이해할 수 없다고 지크가 투덜거렸다.
그렇게 라일라의 감정에 대한 의논이 일단락되고 지크와 라일라의 대화는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새로 얻은 기억들이 있어.”
“파이넬이 주입해준 기억 말고 말이야?”
“응. 내가 잃어버린 기억들이야.”
이건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전부 찾은 거냐?”
라일라가 기억하고 있는 일부의 기억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많은 기억을 갖고 있는지 능히 유추할 수 있다. 그녀가 정말로 기억을 모두 되찾았다면 앞으로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그렌 제너드의 본모습을 들춰내는 데 말이야.’
“그건 아니야.”
조금은 실망스러운 답변. 하지만 지크는 개의치 않고 라일라의 얘기를 계속 들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기억 장치일 뿐. 내 기억을 출력하는 장치는 아마 따로 있을 거야. 내가 기억을 온전히 하지 못하는 건 그것 때문이고. 하지만 이번에 파이넬이 내 기억을 보겠다고 머리를 뒤흔들어서 어느 정도는 기억이 났어. 정확히는 파이넬이 빼간 정보들은 나도 기억해.”
“그 녀석이 전부 빼가진 못했나 보지?”
“아마도 빼가는 도중에 너에게 방해를 받은 모양이야.”
“그럼 아쉬워할 필요는 없겠군.”
정보의 대가가 라일라 신변의 위협이라면 그런 정보는 필요 없다. 지크가 한 말의 뜻이었다. 그리고 라일라 또한 어렵지 않게 그 뜻을 알아차렸다.
“…….”
“뭐야?”
“아, 아무것도 아냐! 그것보다 정보, 정보 얘기를 하는 중이었지?”
라일라가 급히 말을 돌렸다.
“기억이라고 해도 회귀 전에 일어난 모든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아냐. 나를 만들 때 나름의 처치를 했겠지만, 그래도 회귀 전의 모든 기억을 넣지는 못할 테니까. 이웃 나라 개미 한 마리가 지나간 길까지 전부 기억으로 보존된다고 생각해 봐.”
“쓸모도 없고 괜히 기억력만 소모되겠지.”
“맞아. 게다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란 존재는 어디까지나 저장 장치일 뿐이야. 기억을 꺼내려면 따로 출력 장치가 필요하고. 반대로 내게 기억을 넣으려면 입력 장치가 필요하지.”
“그 입력 장치로 주입한 기억만 너에게 저장된다는 거군.”
“그래.”
“그 입력 장치는 뭐지?”
“에스텔레이드와 토르니움.”
무척이나 낯익은 이름이 튀어나왔다. 지크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통로의 끝, 나무가 있는 방에 아직 한스가 있다. 그리고 그의 허리춤에는 에스텔레이드가 여전히 매달려 있을 것이다.
“그 두 검의 근처에 있는 정보가 자동으로 내 머릿속에 저장이 돼.”
“그래서 네가 기억을 잃었어도 나와 그렌 제너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기억을 하고 있던 거군.”
지크는 토르니움을 사용했고 그렌은 에스텔레이드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두 사람의 행적을 따라 라일라의 기억이 입력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다른 기억도 없는 건 아니지만, 너와 그렌 제너드에 대한 기억이 확실히 많아. 그래서 말인데, 지크.”
“응?”
“되찾은 기억 중 그렌 제너드가 관련되어 있는 정보가 하나 있어.”
그렌 제너드에 대한 정보는 뭐든 환영이다. 지크는 얼른 말해보라 눈빛으로 재촉했다.
“우리는 그렌 제너드가 로브 녀석들을 움직이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잖아?”
“지금은 거의 확신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지.”
“맞아. 그것들을 움직이고 있던 자는 그렌 제너드야.”
“역시 그랬군!”
아무리 확신을 하고 있다지만 증거는 많을수록 좋다. 특히 확신에 마지막 못질을 해줄 수 있는 증거라면 더더욱.
지크는 씨익 웃었다.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가 위협스럽기 짝이 없다. 당장이라도 그렌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주 용사의 탈을 뒤집어쓰고 온 세상을 속였다 이거지? 어디 그 잘난 낯짝이 드러난 후에도 똑같은 반응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그 날을 상상하며 지크는 신이 나 낄낄거렸다.
“뭘 봤는지 설명해 주겠어?”
“그렌 제너드가 어떤 남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어. 그리고 그 주변에 로브 놈들이 모여 있었고.”
“흐음, 남자라. 부두목이나 관리자 쯤 되는 작자인가?”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게 있었어. 그렌은 그 남자에게만 명령을 내렸거든. 그렌의 명령을 받은 그가 새로 명령을 내려서 로브들을 움직였어.”
“그 남자가 관리자라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냐. 그 정도 조직쯤 되면 우두머리가 말단 하나하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게 더 웃긴 일이지.”
“역시 그런가?”
“하지만 네가 이상하게 느낄 정도라면 뭔가 다른 중요한 게 있을 수도 있겠어.”
지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혹시 주변 로브들이 그렌 제너드보다는 남자에게 충성을 한다는 느낌을 못 받았어?”
“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조직을 만든 건 그렌 제너드가 아닐지도 몰라.”
“그게 무슨… 아!”
라일라도 지크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조직은 남자의 것이고 그렌 제너드는 그저 남자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지?”
“맞아. 어쩌면 그게 더 가능성이 높을 수 있겠어. 일단 회귀를 하면 자기가 만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가. 그건 그렌 제너드도 마찬가지겠지. 한데, 그런 거대한 조직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만든다? 글쎄, 불가능하다고 하진 않겠지만 회의적인 것도 사실이지.”
“즉, 회귀를 거치다 그 조직을 알게 되고 그 우두머리를 부하로 삼았다 이거지?”
“그래. 물론 아직 확인은 더 해봐야 해. 하지만 새로운 등장인물이 대두한 것도 사실이지. 그리고 동시에 놈의 낯가죽을 벗겨낼 단서 하나가 새로 생긴 것이기도 하고.”
히죽거리는 지크의 얼굴을 보건대 그는 분명히 무척 즐거워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