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9화
‘하여간 저 녀석은!’
지크가 호수로 뛰어드는 걸 본 라일라는 지크의 생각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날 미끼로 썼겠다!’
아까의 감성적인 느낌은 일거에 날아가고 평소와 같은 감정이 일어났다. 짜증, 허탈, 체념. 항상 지크에게 느끼던 감정들이다.
분한 점은, 자신을 미끼로 쓴다는 지크의 작전이 분명 효과를 봤다는 것이다.
파이넬의 공격이 일순 잦아든 걸 라일라도 느꼈다.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잖아!’
그러나 돌아올 대답이야 뻔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설명하면 적이 알아 챌 수도 있다’, ‘이런 건 원래 아군도 몰라야 하는 법이다’ 등등.
그리고 전부 일리가 있는 말이란 게 라일라의 짜증을 더 부추겼다.
하지만.
‘나를 함부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니까.’
평소의 태도로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런 부상을 입고 나를 구하러 와줬잖아.’
방금 전 본 지크의 부상과, 절망에 빠져있을 때 자신의 손을 힘주어 잡아 주던 온기가 뇌리를 스쳤다.
결국 라일라는 짜증을 풀었다. 아니, 풀렸다. 뭔가 지는 것 같아 억지로 붙들려 해도 마치 손바닥 안의 물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흘러내려 버렸다.
라일라는 몸의 균형을 잡았다. 마법으로 몸을 띄운 후, 파이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증오스러운 얼굴이 눈에 잡힌다. 라일라의 마음이 일순 복잡해졌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주어진 기억으로부터 느낀 그녀의 절망이 아직도 가슴 한켠을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이 몸을 내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파이넬의 분노는 자기 몸 하나 차지한다고 가라앉을 것 같지도 않았다.
라일라는 마법을 시전했다.
콰앙!
빛과 폭음, 그리고 강렬한 에너지가 공간을 뒤덮었다. 확실하게 미끼 역을 자초하려는 마음으로 화려하기 짝이 없는 번개의 마법을 구현한 것이다.
물론 파이넬에게 유의미한 대미지를 주진 못 했다. 그녀의 단단한 장벽에 라일라의 마법이 막혔다.
하지만 라일라는 계속해서 마법을 쏴댔다. 미끼란 역을 철저하게 완수할 생각이었다.
물론 파이넬도 그런 의도를 알고 있었다. 라일라의 마법을 막으면서도 그녀는 지크를 계속 신경 썼다.
후웅!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호수가 출렁였다. 새로 떨어진 액체 괴물들도 호수 위를 달리는 지크를 덮쳤다.
분명 힘이 떨어지고 라일라의 견제가 있다지만 그래도 파이넬은 여전히 녹록치 않았다. 라일라가 시간을 끌어주는 것도 오래 가지는 못 할 것이다.
지크는 반쯤 우격다짐 식으로 액체 괴물들을 돌파했다. 하지만 물가에서의 녀석들의 기동력은 역시 어마어마했다.
호수를 매개 삼아 그것들은 다시 지크를 포위했다.
‘지금!’
액체 괴물들을 피해 지크가 살짝 호수에서 몸을 띄우는 순간, 파이넬이 눈을 빛냈다.
콰앙!
파이넬이 쏘아 보낸 번개가 지크를 향했다. 그 때문에 자칫하면 라일라의 공격을 허용할 뻔했지만, 그럴 만한 성과는 있었다.
첨벙!
틈을 찔린 것일까. 지크가 마법을 맞고 호수 안으로 떨어졌다.
“지크!”
라일라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그에 비해 파이넬의 입가에는 웃음꽃이 폈다. 하지만 그녀는 서둘러 기쁨을 잠재웠다.
‘저 독한 놈이 고작 저런 것에 죽을 리 없어!’
이제는 완전히 지크를 신뢰(?)하게 된 파이넬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신뢰는 배신당하지 않았다.
퍼엉!
호수의 수면이 폭발했다. 그 안에서 지크가 뛰어 올라왔다.
-그럴 줄 알았다!
그녀의 예상이 적중했지만 왜일까. 그녀의 말에 기쁨이라곤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가 다 닳아 없어질 정도로 바득바득 가는 것도 모자라 잇몸까지 갈아 없애버릴 것 같은 절절한 증오만이 느껴질 뿐.
파이넬은 잠시 라일라에 대한 견제를 완전히 포기했다.
‘저 녀석이 접근하면 위험해져!’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한 방 정도는 괜찮아.’
라일라는 견제라는 역할에 충실해 주문을 생략한 마법을 주로 날리고 있었다. 그 정도면 맞더라도 몇 방 정도는 버틸 수 있다.
‘일단 저놈이야!’
파이넬의 두 손에 마법이 가득 맺혔다. 그 순간이었다.
“흡!”
지크가 몸을 활처럼 휘었다.
“하아아앗!”
기합을 크게 지르며 윈두르를 던졌다. 윈두르가 화살처럼 쏘아진다. 파이넬을 노리는 것일까. 하지만 윈두르의 궤도상에 파이넬은 없었다.
윈두르는 나무뿌리를 노리고 있었다.
누구도 예상 못 한 일격. 하지만 놀랍게도 파이넬은 예상했다는 듯 움직였다.
콰아앙!
그녀의 마법이 윈두르를 후려쳤다. 윈두르 자체의 놀라운 성능으로 잠시 버틸 수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나무의 마력을 등에 업은 파이넬의 마법을 전부 막아낼 순 없었다.
첨벙!
윈두르는 너무도 허망하게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다.
‘됐어!’
파이넬은 희열에 잠겼다.
애초에 그녀가 지크의 접근을 두려워한 이유는 근접전에서 지크에게 이리저리 휘둘린 경험 때문만이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지크와 나무의 공명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지크가 분명 다시 한번 그 공명을 이용하리라 생각했다.
‘라일라의 기억에 의하면 아마도 나무와 공명을 하는 건 저 검이야.’
검을 나무에 던졌을 때는 파이넬도 순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바로 대비를 할 수 있었다.
‘검이 호수에 빠졌으니 쉽게 되찾을 순 없겠지!’
호수 안은 바야흐로 액체 괴물들이 가장 높은 성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던가.
분명 호수 안으로 들어가든, 아니면 물러나든 지크의 접근은 차단했다고 생각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어?’
지크가 속도를 줄이지 않자 파이넬이 기겁했다.
퍼엉!
액체괴물의 방해를 피하기 위해서인 듯 지크가 호수 표면을 커다랗게 걷어차 몸을 띄워 일직선으로 파이넬에게 쏘아졌다.
‘서, 설마 검을 던진 것도 미끼?’
파이넬이 다급히 마법을 쏘았다. 이것으로 지크를 조금은 막을 생각이었다.
퍼억! 퍼억!
-뭣!
지크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두 개 뚫렸다. 마법 공격에 지크가 전혀 방어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모습에 파이넬은 안도보다 불안감이 먼저 들었다.
지크가 또 뭔 짓을 꾸민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크의 몸이 바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저 녀석의 일행에 신관 같은 건…!’
그러다 파이넬은 지크의 몸에 뚫린 구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나오는 걸 발견했다. 그와 더불어 피와는 다른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도.
-서, 설마 포션을 몸 안에 박아 넣었어?
그렇다면 상처를 입자마자 회복되는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지크가 자신의 몸에서 나왔을 때는 상처투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그 후에 포션을 박아 넣었다는 소리다.
‘언제? 난 저 녀석에게서 눈을 뗀 적이….’
그 때 자신의 공격에 맞아 지크가 호수에 빠졌던 게 기억났다. 오직 그 때만이 지크가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때다.
-저 독한 새끼!
그렇게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끄아아아악!
기가 질려 잠시 잊고 있던 라일라의 마법이 파이넬에게 명중했다.
무영창 주문이라지만 그래도 천하의 라일라의 마법이다. 위력은 웬만한 마법사가 일일이 주문을 외운 마법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크가 파이넬에게 달려들었다.
-끄으으으윽!
파이넬이 급히 장벽을 쳐 라일라의 마법을 막았다. 그 때는 이미 지크가 정말로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파이넬은 자신의 앞에도 장벽을 쳤다.
하지만 그게 패착이었다. 라일라의 마법을 막는 장벽을 친 상태에서, 더구나 급박하게 치느라 새로운 장벽은 고작해야 파이넬의 상체만을 뒤덮는 정도였다.
그러나 지크가 노리는 건 상체가 아니었다.
퍼엉!
손바닥에서 마력을 폭발시켜 지크가 궤도를 틀었다. 그의 몸이 뚝 떨어져 내렸다. 지크가 손에 마력을 한가득 실었다.
푸욱!
지크의 팔이 그녀의 고깃덩이 같은 하체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그뿐, 파이넬은 대단한 타격을 입진 않았다.
-멍청한 놈!
검을 잃은 탓일까. 하지만 상대의 공격이 하잘 것 없다는 사실이 파이넬에게 나쁜 건 절대 아니었다. 자신이 너무 지크에게 겁을 먹은 것일지도 모른다.
-죽어!
파이넬이 지크를 끝장내려 할 때였다. 지크가 씨익 웃었다.
“역시 여기 있구나!”
화끈거리는 무언가가 지크의 손끝에 걸렸다. 지크는 그걸 콱 잡았다.
-너 설마…!
그제야 지크의 의도를 안 것일까. 파이넬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서둘러 지크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지크가 한 발 빨랐다.
“흡!”
숨을 멈추고 팔 근육에 힘을 팍 준다. 지크는 손에 잡힌 무언가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려 했다.
-끄억!
파이넬의 손에 가득 맺혀있던 마력이 흩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보호하고 있던 장벽이 사라지고 지크를 향해 달려오던 액체 괴물들 또한 형체를 잃고 물로 돌아갔다.
뚜둑! 뚜두둑!
지크의 팔이 빠져나올수록 파이넬의 하체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렸다.
-아, 안 돼!
파이넬이 지크의 팔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저항은 무척이나 미약했다.
지크의 팔이 빠져나올수록 파이넬의 모습이 점점 이상해져 갔다. 마치 폭발하려는 화산을 억지로 억누르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녀의 몸 이곳저곳이 불룩불룩 부풀었다. 온몸에 핏줄이 터질 것처럼 피부 밖으로 드러났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지크는 이제 언뜻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그것을 쳐다봤다.
화려한 붉은색이 인상적인 그것은 꽤 눈에 익은 것이었다. 물론 지크가 아는 것의 색깔은 정반대였지만.
호수의 눈물.
아드로원 대수림에서 본 그것과 지금 지크의 손아귀에 있는 것의 모양이 정확히 같았다.
그걸 눈치챈 것은 처음 파이넬과 맞붙어 그녀의 하반신을 날려버렸을 때였다.
피부 속에 박혀 조금 드러난 그것을 지크는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했었다.
‘이상하긴 했지.’
지크가 알기로 나무의 마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걸, 아무리 클로원과 관계가 있는 존재라지만 혼자서 나무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당연히 뭔가 수단이 존재할 수밖에.’
-기, 기다려! 기다려줘!
파이넬의 모습은 기괴했다. 몇 달간을 두들겨 맞기만 한 만큼 온 몸이 부풀어 오른 형상.
저번에 봤던, 부풀어 오른 고깃덩이의 모습과도 다르다. 나무의 마력이 폭주한다는 증거였다.
“응? 이제 와서 목숨 구걸이야?”
-나, 난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 차라리 날 데려가! 내가 동료가 되어줄게!
파이넬의 음성은 다급했다.
-어차피 공주와 넌 신뢰로 묶인 것도 아니잖아! 적으로 만났다가 우연찮게 동행했을 뿐이지!
‘나름 잘 아네?’
파이넬이 라일라의 기억을 빼앗은 걸 모르는 지크로서는 조금 놀랄 일이었다.
-하지만 저 녀석은 기억을 잃기 전에 온갖 학살을 저지른 녀석이야! 너도 꿈으로 봤다며! 저 녀석이 슈트올에 한 짓을!
근처로 다가와 있던 라일라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보면 파이넬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응? 나쁜 거래는 아니지? 나라면 저 녀석보다 더 잘할 수 있어. 저 녀석처럼 너보고 마왕이 되지 말라는, 분수에도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아. 네가 가는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지도 않을 거고. 내 실력이 저 녀석에 밀리지도 않을 거야! 그럼 저 녀석 대신 내가 들어가도 괜찮잖아!
마지막의 파이넬의 목소리는 거의 우는 것 같았다.
지크는 알 수 있었다. 지금 파이넬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그저 살고 싶어서 말을 하는 것뿐.
라일라 대신 그녀를 끌고 다닌다면 여행도 훨씬 수월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크의 대답은 손에 힘을 주는 것이었다. 파이넬도 그걸 알아챘다.
-어, 어째서….
“간단한 이야기야.”
지크는 한 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넌 라일라가 아니잖냐.”
뚜두둑!
지크는 붉은 물체를 밖으로 뜯어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