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8화
“살아 있냐?”
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라일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상황이 꿈인지 진짜인지 의심이 갔다.
혹시나 자신을 놀리기 위해 파이넬이 지크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 거친 손바닥의 느낌은 분명 꿈도 헛것도 아니었다.
“어이, 죽었냐? 체온을 보면 살아있긴 한 것 같은데. 기절했나? 아니면 이거 라일라가 아닌가?”
“아, 아냐! 나 라일라 맞아!”
혹시라도 자신의 손을 놓을까 라일라는 자신을 잡고 있는 손을 힘주어 잡으며 말을 내뱉었다.
“아, 라일라 맞군.”
퍼엉!
순간 라일라는 자신을 억누르던 고깃덩이의 더러운 감촉과 무게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났지만 그런 것 따위 라일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덕지덕지 붙어 있어?”
퍼엉!
다시 한번 더 충격이 주변을 휩쓸고 갔고 이번엔 다리의 부자유가 사라졌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몸엔 일절 부상이 없었다. 놀라울 정도의 마력 컨트롤이었다.
라일라는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뭐야, 여기가 그렇게 편해?”
“자, 잠깐만!”
라일라가 황급히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주저앉았다.
“단순히 놀라서 그런 것 아닌 것 같군.”
지크는 구멍에서 몸을 뺐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커다란 방에 발을 디뎠다.
지크는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역시 여기는 특별했던 모양이야.’
라일라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나름 조절한 검기라 위력은 구멍을 뚫었을 때의 것보다는 확실히 약했다.
하지만 그 검기에 라일라를 감싸고 있던 고깃덩이들이 모두 터져나갔다.
지금껏 그를 가로막은 고깃덩이에 비하면 여기 있던 고깃덩이의 방어력은 말 그대로 종잇장이었다.
지크는 땅에 떨어진 고깃덩이의 잔해를 아무렇게나 짓이기며 라일라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네.”
“아, 응. 다친 곳은 없어.”
“그럼 그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뿐인 모양이지?”
아마도 육체를 빼앗느니 뭐니 한 것의 부작용이 아닐까.
“기, 기다려 봐! 조금만 있으면 돌아올….”
지크는 라일라의 말을 무시했다.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지금은 언제 회복될까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콰앙!
자신에게 날아온 불덩이를 지크는 쳐냈다.
“마법?”
“여기는 아직 그 빌어먹을 고깃덩이 안이야. 아까부터 징그럽게도 방해를 하더군.”
“아!”
갑작스러운 지크의 등장에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아까 봤던 불빛은 저거였구나!’
분명 아까 지크가 손을 잡았을 때 본 불빛이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파이넬이 쏜 마법의 빛이었던 모양이다.
“일단 나가자고.”
지크가 라일라를 한 손으로 안아 올렸다. 다른 손으로는 윈두르를 꽉 쥐었다.
“더럽게 가볍네. 밥은 잘 먹고 있냐?”
“자, 잠깐….”
“뭐야, 뭐 볼일 있어? 뭔진 모르겠지만 다음에 해. 지금 느긋하게 뭔가를 할 상황이 아니니까.”
아직 아까 느꼈던 죄책감이 사라진 게 아니다. 그래서 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지크를 만류했다.
하지만 그만큼 살고 싶다고 느꼈던 것도 거짓이 아니었다. 때문에 지크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것에 안도했다.
게다가 지크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공간 안으로 다시 살덩이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사이사이로 여러 손들이 뻗어 나왔고 눈과 입도 돋아났다. 그것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력은 어때, 라일라.”
“괜찮은 것 같아. 아무래도 몸에 힘만 빠진 모양이야.”
“그럼 마법은 쓸 수 있겠어?”
라일라는 팔을 들었다. 손가락도 움직여봤다. 분명 평소보다 힘겹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움직이지 못할 건 아니었다.
“괜찮아.”
“좋아! 그럼 일단 이 역겨운 곳을 빠져나가 보자고.”
자신들을 향해 뻗어지는 마법을 지크가 윈두르로 쳐냈다. 어두운 공간에 일순 빛과 폭풍, 열기가 몰아쳤다.
그 덕에 라일라는 잠시 주변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뭐냐? 왜 갑자기 말이 없어?”
“…마법으로 통로를 뚫으면 되는 거지?”
“그래. 아무래도 단일 위력은 마법이 더 강하니까 말이지.”
“알았어.”
라일라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력이 넘실대며 손끝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악!
몇 개의 입이 의미 모를 괴성을 질렀다.
‘흐음, 역시 이 녀석들은 본체의 통제는 받지만 본체 그 자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녀석들인 것 같군.’
마법들이나 공격 방식이 무척이나 조잡했다.
‘하지만 특제라는 것만큼은 사실인 모양이야.’
마법은 물론이고 물리적 힘도 상당했다. 때문에 육벽을 부술 때 상당히 고생을 했다.
하지만 어쨌든 라일라를 구해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라일라의 손에 뭉치는 마력을 생각할 때, 탈출은 분명 들어올 때보다 쉬울 것이다.
퍼어엉!
라일라의 손에서 불꽃이 뿜어진다. 평소의 불덩이나 넓은 곳을 쓸어버리는 불의 해일은 아니었다. 그건 일직선으로 쏘아지는 압축된 불꽃이었다.
-끼에에에에에!
입들이 비명을 지른다. 살덩이가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코끝을 스쳤다.
라일라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마법을 날려댔다.
조금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해야 하긴 하지만 그래도 라일라를 안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이거 편하네.’
지크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팔 하나를 베어내며 그렇게 생각했다.
역시 라일라가 합류하니 굉장히 편해졌다. 구멍을 뚫는 건 라일라에게 맡긴 채 자신은 오로지 주변의 공격을 막기만 하면 됐다.
콰직!
-꾸에에에엑!
종종 자신을 빌어먹게 쏘아보는 재수 없는 눈을 윈두르로 콕 찔러주기도 했다.
콰아아앙!
지금껏 살덩이를 일정부분 지지고 힘이 다해 스러지던 불꽃이, 드디어 시원하게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불꽃은 붉은색의 기다란 궤적을 남기며 날아가더니 반대편 벽에 아직 남은 살덩이를 지지고 나서야 사라졌다.
지크와 라일라의 앞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 너머로 물의 나무 특유의 푸른빛이 스며들어 왔다.
역겨운 탄내가 아닌, 신선한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아아아아아악!
지크와 라일라를 막지 못한 울분 때문인지 입들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지크도 라일라도 그것들의 마음을 헤아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콰지직!
지크가 윈두르를 휘둘러 구멍을 넓혔다. 라일라도 마찬가지.
퍼엉! 퍼엉! 퍼엉!
그녀의 마법이 구멍 주변의 살덩이들을 새까맣게 불태웠다.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로 구멍이 넓어졌다.
지크는 망설임 없이 구멍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지크 님!”
“나오셨군요!”
“스승님!”
한스와 스녹, 엘레나가 기쁨에 차 큰 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그러나 둘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정확히는 지크를 보고 그런 것이었다.
라일라는 구멍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자신의 마법 상자에서 포션을 잔뜩 꺼냈다. 그리고 지크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뭐야?”
“일단 이거나 물어!”
라일라가 지크의 입에 포션병을 물렸다.
지크는 별 말 없이 포션을 삼켰다. 그 사이 라일라는 포션 병을 몇 개 더 꺼내 지크의 몸 곳곳에 뿌렸다.
“어, 지크 님?”
어느새 그들의 곁에 다가온 한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지크에게 안겨있는 라일라는 표면적으로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여 다행이었지만, 문제는 지크였다.
그의 행색은 처참했다. 온몸에 피칠갑을 했고 몸 여기저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얀 뼈가 곳곳에 드러나 있었으며 복부에는 꿀렁거리는 내장이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곳곳에 눌어붙은 피부는 분명 심한 화상의 흔적이었다.
사람들이 남을 상대할 때 가장 많이 보는 얼굴 또한 끔찍했다.
볼에 구멍이 나 안 쪽 치아가 그대로 보였으면 한쪽 눈은 완전히 짓이겨져 분명 제 구실을 못 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더욱 일행이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것은 덤덤한 지크의 태도였다.
여태껏 지크가 웬만큼 심한 부상을 입어도 개의치 않는 걸 많이 봐오긴 했지만 지금의 상태는 너무도 심했다.
“오오, 고통이 확 사라지는데.”
포션을 끼얹고 낄낄대기까지 하는 모습이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계속 그러고 있을 순 없었다. 파이넬의 공격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이, 이, 이…!
그녀는 지크가 라일라를 구해온 걸 보고는 제대로 된 할 말도 찾지 못 한 채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입 앞까지 가져다댔던 과자를 빼앗긴 어린아이 같다.
-이 새끼들이이이이이!
파이넬이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막대한 마력이 꿈틀거리며 그녀의 신체가 일제히 발광을 한다.
고함에 공동 전체가 떨어 울리는 느낌이었지만 지크는 그저 귀를 후빌 뿐이었다.
“더럽게 시끄럽네.”
고작해야 그 두 마디가 감상의 전부였다.
-죽여, 죽여 버리겠어!
바로 앞까지 다가왔던 계획이 깨졌다는 분노에 파이넬의 눈은 말 그대로 뒤집혔다.
-몸 따윈 필요 없어! 네놈들을 여기서 죽여 버릴 거야! 모두 다!
“아, 그래? 그것 참 마음이 맞았네. 나도 이제 슬슬 네 얼굴 질릴 참이거든. 끝을 내자”
지크가 윈두르를 들어 올렸다.
주변 고깃덩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라일라를 가두고 있던 고깃덩이의 움직임이 강했다.
‘신체를 다시 끌어들일 셈이군.’
“한스! 스녹! 엘레나!”
“네!”
지크의 부름에 세 명이 동시에 대답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저 고깃덩이가 움직이지 못하게 방해해라!”
“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세 사람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녹이 미스릴들을 이용해 벽을 쌓아 고깃덩이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한스와 엘레나는 무차별적으로 고깃덩이를 공격했다.
고깃덩이의 이동을 완전히 막진 못했지만 분명 속도가 느려졌다.
“라일라.”
“응! 난 뭘 하면 될까?”
뭔가 묘하게 라일라가 고분고분해진 것 같다. 하지만 지크는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지금부터 하는 짓을 용서해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마법은 다 쓸 수 있는 거지?”
“당연하지!”
“좋아!”
지크는 안아든 라일라를 그대로 높이 들어 올렸다.
“…응?”
팔꿈치로 엉덩이를 받치고 손으로 등허리를 누르는 모습에 라일라가 의문성을 냈다.
“자, 잠깐! 지크 너 지금 뭘 하려는…!”
“믿는다, 라일라!”
“꺄아아아악!”
나중에 말하길,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엘레나는 둘째 치고, 그녀와 같이 다닌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한스, 스녹조차 라일라가 그렇게 비명을 지른 건 처음 들었었다고 입을 모았다.
아무리 라일라가 가볍다지만 그래도 성인이다. 당연히 나름의 무게가 나간다.
그러나 지크가 날려 보낸 라일라의 몸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파이넬의 정면으로.
-뭣!
공격을 하려던 파이넬도 일순 당황했다. 설마 저런 식으로 라일라를 날려 보내다니. 때문에 공격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
그 순간 지크가 호수를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