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7화
한스와 스녹, 엘레나는 부리나케 지크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그 와중에 그들은 파이넬과 주변의 고깃덩이를 경계했다. 그 움직임은 지크를 퍽이나 만족스럽게 했다.
‘엘레나도 제법이로군.’
골방에 처박혀 연구나 하는 마법사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다. 역시 라일라도 제법 교육을 잘 시켰다.
물론 그들이 지크에게 합류하려는 꼴을 파이넬이 두고 볼 리 없었다. 마법과 물의 힘이 다시 한번 그들을 덮쳤다.
그러나 한스와 스녹, 엘레나는 각자의 특성을 잘 살려 그것들을 훌륭하게 방어하고 지크의 옆으로 오는 데 성공했다.
다만, 무사히 이동할 수 있던 게 오롯이 그들의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격이 조금 약해지지 않았어?”
쿠우!
스녹의 말에 노웸이 긍정했다. 한스도 마법을 요격할 때 에스텔레이드에 느껴지는 충격이 훨씬 줄어든 걸 느꼈다.
해답은 마법사인 엘레나가 냈다.
“방을 뒤덮고 있는 고깃덩이들, 아무래도 저 녀석의 몸에서 나온 것 같은데 그 때문 아닐까? 힘이 분산됐다든가 말이야.”
“아마 그럴 거다.”
그들과 합류한 지크가 엘레나의 말에 힘을 실어줬다.
몸을 분산시킨 탓에 나무에 대한 지배력이 떨어졌고 무엇보다 라일라를 붙들고 있는 것에도 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몸을 뺏는다니 뭐니 했으니, 보통 힘을 쓰고 있는 건 아닐 거야.’
추측할 거리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확실한 것은 한 가지.
저 녀석은 아까처럼 엄청난 힘을 사용할 수 없다.
물론 지금의 힘도 절대 만만히 볼 건 아니다.
하지만 막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이냐고 묻는다면 딱 잘라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다.
지크는 한스, 스녹, 엘레나를 쳐다봤다.
‘이 녀석들 정도면 충분해.’
하지만 도망쳤다고 생각한 이 녀석들이 어째서 지금 여기에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라일라가 도망치게 한 것 아니었어?”
“네, 목숨 걸고 저희를 보내주셨죠. 하지만 아직 지크 님께서 완전히 당하셨다고 확신하진 못하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스녹의 굴을 파고 숨어 있었습니다. 혹시나 다시 전투가 벌어진다면 저희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나와 라일라가 완전히 당했었다면? 도망이 늦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지크 님이 완전히 당하거나 도망쳤다는 것보다 잠시 전선을 이탈하셨다는 게 더 설득력 있다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내내 기다릴 수도 없으니, 모래시계 하나를 사용해 딱 그 시간만 대기를 하기로 했었습니다.”
“탈출방법은?”
“스녹의 힘을 십분 활용할 생각이었습니다. 괴물이 있던 방과는 다르게 다른 곳은 스녹의 힘이 통하긴 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스녹이 지면까지 굴을 한 번에 뚫을 수 있는 힘이 있는 건 아니고, 자칫하면 바다 밑으로 굴이 뚫릴 수도 있으니, 탈출은 계속 통로를 이용하되 위험한 것이 있다면 바로 굴을 파고 숨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위쪽으로 굴을 파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식량은 각자 넉넉히 가지고 있으니 몇 날 며칠이 걸린다면 빠져나갈 수 있겠죠.”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자신들 혼자 도망치는 게 죄책감이 느껴져서 남은 것이라면 지크는 나중에 크게 혼을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스의 그건, 어설프긴 하지만 분명 계획이었다.
“누가 생각했지?”
“큰 틀은 제가 짰고 스녹과 엘레나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스가 말했다. 평소 지크의 앞에서 주눅 들고 우물쭈물하던 모습은, 적어도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기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자신으로서는 최선의 생각이었고 그렇다면 잘못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굳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확신이었다.
그에 지크는 유쾌하게 웃었다.
“잘했다!”
명령을 받았지만 그 후는 스스로의 판단으로 움직였다. 그게 지크는 무척이나 기꺼웠다.
사고를 방기한 채 그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는 일정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무척 힘들며 예상외의 사태에 극히 약해 오래 살아남기도 힘들다.
특히 지크 일행처럼 온갖 사건들에 발을 딛는 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꼭두각시처럼 그저 명령대로 움직이기만 하는 놈은 필요 없어.’
적어도 지크는 한스와 스녹을 그런 멍청이들로 키울 생각이 없었다. 라일라도 마찬가지일 터.
지크는 자신의 곁에 있는 고깃덩이를 가리켰다.
“난 지금부터 라일라를 구하러 갈 거다. 그동안 너희들이 저 녀석을 막고 있어야 한다. 자신은 있냐?”
“상대의 공격이 아까보다 무척 약해졌습니다. 퇴치하는 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버티는 건 가능할 겁니다. 무엇보다 에스텔레이드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누군가를 지킬 때 도망치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배의 말처럼 우리의 꿈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라일라 님을 버릴 순 없죠. 지크 님의 말씀처럼 힘이 없이 부르짖는 정의 따위는 공허하기 짝이 없을 테지만, 적어도 지금이라면 두 분을 지킬 힘 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스승님이에요!”
세 명이 각자의 포부와 의지가 깃든 대답을 냈다.
“좋아, 그럼 너희들은 여기서 우리를 지켜라. 뭐, 얼마 걸리지 않을 거다. 들어가서 빼 오기만 하면 되니까.”
-그게 그리 쉬울 것 같더냐!
파이넬이 소리쳤다.
-아무리 떨어져 있다고 해도 그것 또한 내 몸의 일부! 거기에 그 몸은 특제라 내 힘을 가득 넣어놨다! 아무리 네 놈이라도 쉽게 부수지 못해!
“부술 생각은 없어. 구멍만 내서 꺼내 올 거야. 그 정도는 가능할걸?”
-어이가 없군! 아무리 본체와 떨어져 있다고 해도 내가 내 몸속에 들어온 네 놈을 죽이지 못할 성싶더냐!
“그거야 해 보면 알 일이고.”
지크는 몸에 있는 마력을 한 바퀴 돌렸다.
‘아슬아슬하게 남았군.’
파이넬이 나무를 다시 지배하기 시작한 후 급속도로 가라앉은 그의 마력이지만, 그래도 아직 그 찌꺼기 정도는 남아 있었다.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지.’
지크는 윈두르를 들어 고깃덩이를 겨눴다.
콰앙!
‘역시 단단하군.’
지크는 손바닥을 짜르르 울리는 반동을 느꼈다. 역시 쉽게 되진 않는다.
그러나 헛수고는 아니었다. 고깃덩이에 사람 두세 명이 기어들어 갈 수 있는 구멍이 생겼다.
-이건…!
지크의 검기의 위력을 느낀 파이넬의 얼굴이 굳었다. 지크의 힘이 아직 상당하다는 걸 느낀 것이다.
“열심히 지켜라.”
“네!”
“알겠습니다!”
“스승님을 부탁드려요!”
지크는 물컹거리는 구멍에 손을 대고는 몸을 안으로 집어넣었다. 꿈틀거리며 살덩이들이 구멍을 메워온다.
팔들이 솟아 지크에게 위협적으로 덤벼들었다. 몇몇 개는 소규모 마법을 준비하는 것도 있었다.
지크는 그것들을 향해 마력을 다시 한번 쏘아댔다.
콰아앙!
구멍이 조금 더 넓어졌다. 지크의 상체가 거의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네, 네 놈이 설령 그 안에서 살 수 있다고 해도 네 뒤를 고작 그런 쓰레기들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지크가 멈칫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고깃덩이의 천장을 쳐다봤다. 거기에 눈 하나가 달려있었다. 분명 파이넬의 시각과 연결되어 있을 터. 그리고 그 옆에는 귀도 달려 있었다.
지크는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나와 라일라의 제자를 얕보지 마라, 이 빌어먹을 자식아!”
눈을 손가락으로 콰직 짓뭉갠 후, 지크는 계속해서 고깃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 * *a
흐릿한 기억 속에 라일라는 취한 듯 반쯤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잘 알 수 있었다.
코로 들어오는 역한 비린내, 귀로 들려오는 살들이 짓눌리는 소리, 그리고 온몸에 느껴지는 끈적한 압박감.
파이넬의 살덩이에 파묻혀 있는 게 확실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지만 힘이 없었다. 살덩이 속에 파묻혀 있는 자신이 어떻게 숨을 쉬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숨을 쉬고 있는 게 맞긴 할까. 어쩌면 자신은 이미 숨이 끊어진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 역한 비린내는 어떻게 맡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마치 잠들기 전 몽롱한 상태 같았다. 정신을 집중해서 사고를 하려 노력해도 그 집중은 몇 초 만에 아스라이 스러졌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머지않아 자신이란 존재가 영영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문득 공포가 들었다. 그러나 그 공포조차 얼마 가지 않았다. 사고, 기억, 감정이 뒤죽박죽되어 도대체 뭐가 뭔지 몰랐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왜일까, 몽롱한 상황에서도 그 기억만은 또렷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자신의 모습. 파이넬에게서 받은 기억이다.
자신이 엄청난 인명을 학살한, 마왕이라 불린 시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는 모르지만 지크의 말로는 적어도 슈트올은 확실하게 멸망했다고 했었다. 분명 슈트올의 인간의 상당수가 죽었을 것이고, 어쩌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다.
클로원의 유적을 차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슈트올과 유적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혹시나 있을 법한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 파이넬마저 죽였던 과거의 라일라다. 아마도 슈트올을 함락한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라일라는 확신했다.
그 뒤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파이넬의 기억은 아니었다. 그건 라일라 자신의 기억이었다.
지크가 다시 마왕이 되는 걸 걱정하며,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던 자신의 모습.
그 기억이 떠오른 순간, 라일라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지크 보고 마왕이 되지 말라고 계속해서 요구했지만, 진실을 알고 보니 자신도 마왕이라고 불렸던 학살자였다.
감정과 욕망에 충실했던 지크와는 다르게 오로지 클로원의 부활만을 위해 움직였던 냉혈한이었다는 점만이 다르지 않을까 생각될 뿐.
왜일까. 갑자기 파이넬이 자신을 향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살 가치가 있을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라지만, 자신은 분명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넌 그냥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자신이 그렇게 우려했던 지크 모어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잃어버린 과거를 걱정하고 자신이 혹 실험체나 그런 것이 아닐까 온갖 추측을 생각했었지만, 아무래도 이런 생각까지 하기는 무리였다.
그랬기에 더더욱 충격을 받은 건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문득 걱정이 들었다.
만약에 자신이 기억을 모두 되찾고 예전의 자신이 깨어난다면.
분명 과거 클로원 부활 계획은 실패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클로원이 없는 세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라일라가 아닌 클로원의 공주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다시 클로원의 부활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목적을 성공한다면.
클로원이 멸망 후에 일어난 모든 역사가 통째로 지워진다.
생각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를 것 같은 일이다. 그게 몇천인지, 몇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를 세월 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모든 흔적들이,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말 그대로 없었던 것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살 떨리는 일이다.
어쩌면, 파이넬의 말대로 자신은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사고가 진행되었을 때, 라일라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빛이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금, 그건 전혀 의미가 없는 행위였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게 하기에는 충분한 행위이기도 했다.
아무리 지금의 자의식이 원래 있던 자의식이 아니라 해도, 과거에 자신이 엄청나게 큰 죄를 지었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지금의 세계에 위험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그래도…!
‘그래도, 살고 싶어!’
덥석!
자신의 손을 잡는 기척에 라일라가 눈을 떴다. 어둠 속으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찾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