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화
“어떤 방법으로 말이지?”
-브뤼엘 시스템. 막대한 마력을 바탕으로 시간을 수만, 어쩌면 수 십 만년까지, 클로원이 망하지 않은 시간대로 되돌리는 것. 그리고 여기 온 건 그 수단 중 하나인 물의 나무를 찾으러….
“다른 건?”
-그, 그게 전부…입니다.
공주는 허리를 폈다.
“성능은 좋네. 하지만 읽은 건 최근 기억뿐인가. 역시 무의식적으로 모든 기억을 읽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군.”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는 ‘나’를 내려다봤다.
“왜 그렇게 몸을 떨지?”
-그, 그게… 저….
“역시 다른 것도 읽은 모양이로구나.”
‘나’는 공주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감정이란 없었다. 그녀가 시스템의 일부란 소리가 완전히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그래, 난 널 죽일 생각이야.”
무정한 사형선고. 아무리 만들어진 실험체라도, 고통의 기억밖에 없더라도, 그래도 ‘나’는 살고 싶었다.
-아, 제, 제발…, 살려 주세요….
“클로원은 부활해야 한다.”
마치 그건 정해진 운명이란 듯, 공주는 차갑게 말했다.
“거기에 변수를 남길 순 없어.”
공주는 뒤를 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놔준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공주의 뒤에 서 있는 무수한 몬스터들을.
“죽여.”
공주의 너무도 간단한 한마디에 ‘나’의 죽음이 결정됐다. 몬스터들이 다가온다. 그렇게 ‘나’의 생은 끝이 났다.
* * *
-어?
‘나’는 눈을 떴다. 온몸이 몬스터에게 갈가리 찢겨 죽음에 이른 기억이 생생하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었다.
주위를 돌아봤다. 언제 깨졌냐는 듯 유리는 원상태로 회복되어 있었다. 유리통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액체도 그대로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회귀했어!’
이유는 모르지만 시간은 한 번 되돌아간 것 같다. 그럼 공주의 말대로 클로원의 시절까지 되돌아간 것일까.
하지만 주위를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불 꺼진 방은 이미 오랜 시간 버려져 있는 시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유리통을 깨트렸다. 액체가 바깥으로 넘실대며 쏟아져 내렸다. 유리통 밖으로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스스로 내딛은 걸음이었다.
‘저번처럼 허무하게 죽고 싶지 않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나’는 움직였다.
* * *
-어때? 재미있지 않아?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라일라를 그것, 파이넬이 내려다봤다.
-자신도 모르는 과거를 남의 관점에서 보는 건 분명 색다른 경험일 거야. 내가 경험하게 해줬으니 그건 고마워해 줬으면 해.
“…이게, 내 과거.”
-맞아. 클로원 황금 황제의 딸, 제국의 영원한 공주님, 제국의 수호 여신. 그게 바로 너야. 어때? 한때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기분은?
라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직 파이넬이 건네준 기억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가 클로원을 부활시키려고 했어?”
-자신의 조국을 너무 사랑한 모양이야, 우리 공주님은.
빈정거리던 파이넬이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 호수 아래에서 자신의 신체를 두드리고 있었다.
‘크라켄?’
왜 크라켄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일까.
‘내가 심하게 부상을 입혀서인가?’
하지만 상관없었다. 파이넬은 나무의 마력을 이용해 크라켄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 크라켄의 공격이 멎었다.
‘임무는 어떻게 됐지? 성공했나?’
만약 크라켄이 지크에게 죽었다면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냐.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적어도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닐 것이다. 안 그래도 지크를 가장 경계하던 파이넬이었기에 지크의 이탈은 무척이나 기뻤다.
제일 무섭던 적은 죽거나 도망쳤고 공주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으며 공주가 도망치게 한 놈들은 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약골들.
파이넬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제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일만 남았다.
“그럼 내가 진짜 마왕이었어?”
-바깥에서는 그렇게 불린 모양이지? 하긴, 당시의 공주님은 누가 봐도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으니까. 클로원의 부활에 거슬리는 건 모조리 죽이고 부쉈겠지.
자신을 죽인 것처럼.
-뭐, 아무렴 어때. 그런 것 따위 내 알 바 아니고. 궁금해하던 공주님의 과거도 보여줬겠다. 이제 나도 대가를 받았으면 해.
“대가?”
-그래.
파이넬은 방긋 웃었다.
-그래도 겁먹지는 마. 정말로 별 거 아닌 일이야. 그냥 네 몸을 주면 돼.
“몸을 달라고?”
라일라가 놀랐다.
-왜 그래? 설마 안 주겠다는 건 아니지? 그렇지? 그건 아닐 거야.
상냥한 척하던 파이넬의 목소리가 점점 거칠어져 갔다.
-난 너 때문에 매일 지옥 같은 삶을 살았어. 클로원이 멸망하고 나서도 결국 네 손에 죽었지. 그렇게 내 삶을 쓰레기같이 만들어 놓고서는 고작 몸 하나 주지 못 한다는 거야!
마지막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광기에 휩싸인 채 파이넬은 장벽을 마구 쳤다. 장벽을 긁어대고 있던 다른 손들도 일제히 주먹을 쥐고 장벽을 두드려댔다.
튼튼한 장벽에 그다지 대단한 대미지를 주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파이넬의 모습과 목소리 그리고 주변을 뒤덮고 있는 고깃덩이들의 행동은 공포를 주기엔 충분한 모습이었다.
-내가! 내가 네 상태를 알고 얼마나 기뻐했는 줄 알아!
처음 슈트올에서 라일라를 발견했을 때, 파이넬은 기겁을 했다. 또 다시 그녀가 자신을 죽이러 온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름 대비를 했다지만 그녀에게 죽은 트라우마가 너무 심했다.
그래서 파이넬은 라일라를 필사적으로 감시했다. 혹시나 어떤 약점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그렇게 본 라일라는 좀 이상했다.
파이넬이 봤던 라일라는 마치 금속 자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차가운 인간이었다.
그러나 새로 본 라일라는 금속은커녕 웃고 화내고 즐거워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게다가 인간 동료까지 있었다. 과연 클로원의 재건만을 꿈꾸던 공주가 그렇게 동료와 여행을 다니는 것 같은 행동을 할까.
하지만 공주는 공주. 파이넬은 자신이 살해당하기 전에 그녀를 먼저 죽이려 들었다.
숙소에서의 암살은 지크의 난입으로 실패했고 기껏 규합한 몬스터들로 뭉개버리려 했으나 그조차 실패했다.
그러나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저자는 더 이상 클로원의 공주가 아니다. 아마도 기억이 리셋되어, 다른 사람이 된 것일 것이다.
파이넬은 그 확신을 얻었다.
때문에 계획을 바꾸었다. 라일라의 처치에서 확보로.
주르륵!
순간 파이넬의 팔 쪽 피부가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라일라가 자연스레 그 모습을 시선에 담았다.
-못 볼 꼴을 보였네.
파이넬은 흘러내리는 피부를 손으로 잡아 문댔다. 피부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내 기억을 봤으니 너도 알 거야. 내 몸이 왜 이렇게 됐는지.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파이넬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직 살아남은 그녀의 자매들을 잡아먹는 일이었다.
정신을 잃은 채, 하지만 명백히 살아 있는 자매들을 하나하나 자신의 몸과 융합시켰다.
그럴수록 파이넬의 힘은 커졌지만, 그만큼 몸은 불안정해졌다. 그러나 파이넬은 꾸역꾸역 자매들을 잡아먹었다.
몸이 붕괴된다고 하더라도 일단 라일라의 습격을 막는 게 급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라일라가 예전에 봤던 클로원의 공주가 아니란 걸 알게 되자, 그 판단은 악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어. 나는 너로부터 태어났지. 그렇다면 네 몸은 내가 옮겨가기에 적합할 거야.
“웃기지 마!”
라일라가 소리쳤다. 하지만 파이넬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살고는 싶은 걸까? 새로 싹 튼 자아라도 살고 싶은 욕구는 있을 테니까, 그건 이해해.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뿐이다.
-그런데 넌 살 가치가 있을까?
“뭐?”
-그렇잖아? 예전에 넌 마왕이라고 했었지? 그렇게 불렸을 정도라면 넌 대체 얼마나 많은 인명을 학살했을까?
라일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마왕이라 불린 이들의 기억은 어느 정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지크 모어가 아니던가. 그 지크 모어가 죽인 인간의 수를 생각한다면, 클로원의 공주였던 라일라도 만만치 않은 인간들을 죽였을 것이다.
-클로원을 수호하는 우리의 여신님. 너는 그냥 클로원이 끝장났을 때 같이 끝장나야 했어. 아, 아니면 그건가?
파이넬은 무척이나 일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넌 그냥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나에게 그 몸을 줘서 그 삶을 조금은 가치 있게 만들렴.
언젠가 자신에게 날아들었던 어떤 연구원의 폭언을, 파이넬은 그들이 신성시하던 제국의 공주에게 그대로 돌려줬다.
라일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나 끝끝내 장벽을 거두진 않았다.
-그래, 끝까지 반항을 하겠다는 거네. 하지만 상관없어.
파이넬은 다시 장벽에 손을 갖다 댔다.
-방금 전엔 내 기억을 줬잖아? 그러니까 이젠 네 기억을 줘.
“아악!”
라일라가 머리를 짚었다. 그녀의 머리에서 무작위로 기억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흐음, 지금의 세계는 이런 모습이구나.
라일라의 기억을 빼내며 파이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슈트올 근처만 관찰했을 뿐, 파이넬은 슈트올 바깥으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 한 것이다.
-아하하! 꽤나 재미있는 여행을 했네, 공주님은.
기쁘고 슬프고 그러나 즐거운 그런 여행. 동료를 만나고 사건을 만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며 그녀는 충실한 여행을 해온 듯했다.
‘내가 두려움에 떨며 자매들의 육체를 이어붙이고 있을 때!’
파이넬의 증오가 더 깊어졌다.
‘뭐, 됐어. 이젠 저 삶이 내 것이 될 테니까.’
라일라의 기억 중 빼내기 쉬운 것들은 전부 빼냈다. 그것들은 대부분 여행을 다닐 때의 추억들이다.
하지만 파이넬은 라일라의 뇌리 깊은 곳에 방대한 정보가 들어 있다는 걸 알았다.
아마도 시스템일 때 쌓인 기억일 터.
파이넬은 망설임 없이 그 기억을 들쑤셨다.
“아악!”
라일라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팡이를 놓고 무릎을 꿇었다. 마력이 끊기며 장벽이 사라졌다.
파이넬이 히죽 웃었다. 쓰러진 라일라를 향해 육중한 고깃덩이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 * *
후웅!
지크는 거북이처럼 고개를 집어넣었다. 자신이 얼굴을 내민 걸 빠르게 알아챈 액체괴물이 공격을 가한 것이다.
지크는 서둘러 상처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포션을 던져 구멍을 메운 건 당연했다.
‘어떻게 할까.’
지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일단 저 고깃덩이가 나보다 강한 건 확실해.’
저번에 붙었을 때 잠시 지크가 우세를 점한 적도 있긴 하지만, 그렇게 호되게 당했으니 다시는 접근을 시키지 않으려고 할 터.
‘하지만 그냥 갈 순 없고.’
라일라와 한스, 스녹, 엘레나가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지크는 그들을 두고 도망친다는 계획을 아예 떠올리지도 않고 있었다.
지크는 위를 쳐다봤다. 끈적거리는 크라켄의 근육 너머, 호수를 뒤덮고 있는 고깃덩이의 막이 있을 것이다.
‘녀석들을 구조한 후 빠르게 이탈한다.’
지크는 윈두르를 힘주어 잡았다.
‘작전은 임기응변으로. 괜찮아. 어차피 많이 있던 일이잖아.’
지크 모어 시절, 수백 번을 했던 작전이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그 전에 이 녀석을 죽여 둬야지.’
지크는 크라켄의 몸체를 헤집고 돌아다녔다. 크라켄이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무시했다.
‘찾았다!’
회백색의 뇌가 지크의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지크는 바로 죽이지 않았다. 주변 살덩이들을 파괴하며 계속 크라켄에게 고통을 줬다.
부오오오어어어어어!
크라켄이 날뛴다. 지크는 크라켄의 행동을 유도했다. 크라켄은 밑으로 푹 가라앉았다가 지크가 유도하는 대로 엄청난 속도로 고깃덩이를 향해 솟구치기 시작했다.
물론 정신지배가 듣는 이상 충돌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면 됐다.
퍼엉!
지크가 크라켄의 뇌를 갈아버렸다. 크라켄의 숨이 순식간에 끊어졌다. 그러나 관성에 의해 크라켄의 몸은 계속 상승했다.
크라켄의 시체가 고기 벽에 부딪치기 직전까지 솟아올랐다.
순간 지크는 크라켄의 몸에 마법 상자를 갖다 댔다. 크라켄의 시체가 순식간에 마법 상자에 빨려들었다.
바닷속에 커다란 빈 공간이 나타났다. 분명 주변에 막대한 바닷물이 존재하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그 공간 안에 존재하는 건 오로지 지크뿐이었다.
주변의 액체 괴물들이 지크를 보고 꿈틀거렸지만 공간 안으로 물이라곤 없어 그것들은 지크를 공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바닷물은 순식간에 자신의 안에 나타난 공간을 집어먹으려 들이쳤다. 액체 괴물들도 거기에 편승했다.
지크의 몸은 관성에 의해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떨어지는 바닷물과 그 바로 너머로 보이는 고깃덩이의 벽이 보였다.
지크는 마력을 가득 담아 놓은 윈두르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바닷물이 튕겨나가고 고깃덩이가 폭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