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2화
고깃덩이의 성화에 크라켄도 아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떨어진 두 개의 다리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무작정 섬으로 돌격했다.
부우우우우우!
여태껏 수면 아래에 숨어있던 크라켄의 몸통이 드러났다.
다리로 난폭하게 땅을 내려치며 그것은 아예 섬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지크가 있는 곳을 난타했다.
라일라가 다시 크라켄에게 지팡이를 겨눴다. 한스와 스녹, 엘레나는 지금도 무한정하게 솟아나는 액체 괴물들을 상대하느라 지크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내가 해야 해!’
하지만 지크의 폭풍 같은 공격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태세를 정비한 고깃덩이가 라일라를 방해했다.
퍼엉!
라일라가 날린 커대한 불덩이를 호수에서 솟아오른 물의 장막이 가로막는다.
불덩이는 엄청난 양의 물을 수증기로 변환시켰지만 힘이 다해 사그라들어 소멸했다.
“칫!”
라일라가 다시 한 번 마법을 준비했다. 방어는 한스, 스녹, 엘레나에게 맡기고 자신은 오롯이 공격만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자신들을 덮쳐 오는 높은 파도에 라일라도 어쩔 수 없이 방어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행의 간섭을 끊어 놓은 후 고깃덩이는 계속 지크를 공격했다.
크라켄이 죽어도 관계없다는 듯 그게 마법이든 물의 권능이든 지크가 있는 쪽에 대단위 공격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지크는 정말로 얄밉게도 그 공격들을 요리조리 피하거나 막았다.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는 크라켄을 방패막이 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는 있었다.
부오오오오오!
고깃덩이의 공격에 맞아 너덜너덜해졌음에도 공격을 쉬지 않던 크라켄이 다리를 일제히 땅에 내리쳤다.
땅이 진동함과 동시에 크라켄의 몸통이 허공으로 떴다. 그대로 지크를 깔아뭉개려 들었다.
“쯧!”
지크는 혀를 한 번 차고는 피하려 움직였다. 지금 지크의 실력으로는 위에서 덮쳐오는 크라켄을 막을 수 없었다.
고깃덩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의 손들이 일제히 준비해둔 마법을 발동했다.
다시 소음이 사라진다. 막대한 마법들이 서로간의 효과를 증가시키며 섬 일부를 말 그대로 초토화시켰다.
부오오오오어어!
아무리 충성스러운 존재라고 해도 이번 고통은 견디기 힘들었는지 크라켄이 울부짖었다. 몸통의 반이 날아갔고 다리도 네 개가 더 찢겨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크라켄은 움직이고 있었다. 과연 해양 몬스터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대한 몬스터다웠다.
그러나 그런 크라켄도 마법의 목표는 아니었다. 휘말려도 상관없었을 뿐, 어디까지나 목표는 지크 한 사람.
저 강대한 몬스터인 크라켄이 고작 휘말렸을 뿐인데도 엄청난 부상을 입었다.
목표인 지크에게 얼마나 강대한 타격이 갔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고깃덩이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미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번엔 고깃덩이의 판단이 맞았다.
후웅!
지크가 자욱한 연기를 뚫고 나타났다. 아까처럼 엄청난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그에 아랑곳 않고 움직이는 것 또한 아까와 같았다.
-지긋지긋한 놈!
고깃덩이가 진저리를 쳤다.
-크라켄!
그것이 크라켄을 불렀다. 그리고 자신은 지크를 향해 다시 마법을 난사했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고깃덩이의 공격을 굉장히 잘 방어한 지크였지만, 몸이 상하든 말든 고깃덩이의 마법까지 무시하고 다리를 뻗은 크라켄에게 결국 다리를 잡히고 말았다.
지크는 윈두르를 휘둘러 자신의 발목을 감은 크라켄의 다리를 가격했지만 크라켄은 더욱 단단히 지크의 발목을 붙들었다.
첨버엉!
크라켄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지크의 몸이 크라켄을 따라 호수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됐어!
고깃덩이가 환호했다.
아무리 지크가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크라켄이 부상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물 안은 크라켄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호수는 바로 바다로 통하는데다가 슈트올의 근해는 수심이 깊기로 유명하다.
아무리 끈질긴 놈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모를 일. 고깃덩이는 액체 괴물 일부를 호수 속으로 딸려 보냈다.
가장 성가신 적을 바다 밑에 처박은 고깃덩이는 바로 다음 행동에 돌입했다. 애초에 그것의 목적은 지크가 아니었다.
고깃덩이의 많은 눈이 라일라를 찾았다.
하지만 한창 액체괴물들과 사투를 벌이던 현장에 라일라와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촤르륵!
고깃덩이의 몸에 붙은 눈동자가 일제히 움직였다. 눈알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고깃덩이의 눈동자는 각자 제멋대로 움직이며 공간 전역을 훑었다.
고깃덩이에겐 다행히도 찾던 것은 금방 발견됐다. 라일라와 일행은 굳건히 닫힌 문 앞에서 전투 중이었다.
-도망치려는 건가?
고깃덩이는 코웃음을 쳤다. 문은 그것의 마력으로 굳게 닫혀 있다. 그것이 문을 열 생각이 없는 이상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그긍!
하지만 조금이나마 움직이는 문을 보고 고깃덩이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 * *
“열렸다!”
쿠우우우우!
스녹과 노웸이 환호성을 질렀다. 뒤에서 그 모습을 확인한 라일라도 한숨을 돌렸다.
‘역시 스녹과 노웸에게 맡기길 잘 했어.’
대지를 다루는 스녹이라면 석재로 만들어진 문을 열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하지만 이건 스녹의 공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저 고깃덩이가 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열지 못 했을 확률이 크니까.’
지크의 공이 굉장히 컸다.
‘…괜찮겠지?’
크라켄에 잡혀 호수 아래로 빨려 들어간 지크를 생각했다. 당연히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걱정을 털어냈다.
‘최강의 마왕이라 불린 녀석이었잖아. 저 정도 위기는 탈출할 거야.’
도와주러 갈 순 없다. 물속에서 전투가 적합한 자는 일행 중 없었다. 오히려 방해가 될 가능성이 컸다. 때문에 라일라는 지크가 호수로 끌려들어가자마자 후퇴를 생각했다.
‘적어도 다른 애들을 대피시켜야 해.’
공간이동을 시도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이곳의 공간 자체가 굳어 있는 느낌이었다. 아마 고깃덩이의 짓일 터다.
때문에 라일라는 스녹을 시켜 문을 열게 했고, 다행히 문은 열렸다. 사람 한 명 정도는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틈이 생겼다.
“너희들은 도망가!”
라일라가 지팡이를 들고 외쳤다. 무영창으로 즉시 생성된 불덩이들이 무차별적으로 난사되어 다가오는 액체 괴물들을 때렸다.
“스, 스승님은 어쩌시려고요!”
엘레나가 소리쳤다.
“너희들을 보낸 후에 가면 되니까 어서 가!”
“하지만…!”
그 때 어떤 손이 얼레나의 어깨를 잡았다. 한스였다.
“당장 움직여! 지금은 후퇴할 때야! 네 스승님의 판단을 믿지 못 하겠단 거냐! 우린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돼!”
에스텔레이드가 빛을 뿜으며 액체 괴물 몇 체를 날려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생긴 구멍은 훨씬 더 많은 액체 괴물이 메웠다.
엘레나는 이를 악 물었다. 총명한 그녀는 한스의 말에 틀림이 없음을 알았다.
스승님의 판단이 옳단 것도, 자신들, 특히 자신이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덥석!
스녹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자!”
쿠우!
스녹과 노웸이 그녀를 재촉했다. 엘레나는 문 바깥으로 뛰었다.
콰아아앙!
세 사람이 문 바깥으로 나간 지 얼마 안 돼 문이 강하게 닫혔다. 스녹이 닫은 건 아니다.
라일라는 정면을 똑바로 노려봤다. 우글거리는 액체 괴물 뒤로 기괴한 고깃덩이가 보인다.
-놓쳤나. 뭐, 됐어. 어차피 그놈들은 내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고깃덩이가 움직인다. 몸 한쪽은 나무의 뿌리에 단단히 붙인 채, 그것이 몸을 늘렸다.
주륵! 주르륵!
고깃덩이의 살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철퍽!
흘러내린 고깃덩이가 바닥에 닿아 슬금슬금 세력을 늘린다. 천장으로 늘어진 것도 있었고 벽까지 늘어나 달라붙은 것도 있었다.
그 늘어진 살덩이에도 이곳저곳 사람의 신체가 붙어있었다.
마치 공간 전체를 자신으로 뒤덮으려는 것 같은 그 모습에 라일라의 표정이 흔들렸다.
섬에 남은 고깃덩이의 본체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아까 몸을 기괴하게 만들면서 사라졌던 얼굴이었다.
-너만 남았군.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됐네. 나는 정말로 달갑지 않지만.
지팡이를 겨누며 라일라는 그렇게 말했다.
위기상황이었지만 그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도망친 셋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여기서 저 고깃덩이를 잡아둬야 했다.
-후후후! 예전과는 입장이 반대가 됐군, 공주님. 아주 꼴이 좋아.
“그거 말인데.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어?”
고깃덩이의 표정이 잠깐 일그러졌다. 하지만 뭔가를 이해한 듯 일그러진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말로 잊고 있는 모양이네. 역시 기억을 꺼내지 못하는 건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엔 인격마저 바뀐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고깃덩이는 곧 어느 답변에 도달한 것 같았다.
-역시 리셋당했나보군.
콰아앙!
라일라의 지팡이에서 번개가 솟구쳤다. 그것은 곧바로 고깃덩이의 본체로 날아갔다.
하지만 라일라의 마법은 고깃덩이가 겹겹이 만들어낸 장벽에 막혔다. 기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라일라가 혀를 찼다.
-여전히 야만적이야. 너를 여신이랍시고 신앙하던 놈들은 정말로 꼴통들이었던 게 분명해.
“남이 알지도 못하는 얘기를 혼자서 중얼거리지 말아줄래? 신경에 거슬리거든. 꼭 하고 싶으면 골방에 처박혀서 하는 걸 추천할게. 계속 그러면 친구 없는 것 같거든, 너.”
과연 지크와의 동행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일까. 라일라는 긴장된 와중에도 고깃덩이에 폭언을 내뱉었다.
-그 혓바닥을 얼마나 계속 놀릴 수 있을까?
고깃덩이는 확장을 계속했다.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공간을 덮는 고깃덩이들에 마법을 발사했지만 호수의 물들과 고깃덩이의 마법들이 라일라의 마법을 전부 무효화시켰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 괜찮아. 어차피 기억은 다 네 머릿속에 있어. 그러니까 내가 기억나게 해줄게.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어. 애초에 내가 만들어진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 * *
차가운 수온이 체온을 내린다. 흐르는 핏물이 주변 물과 뒤섞여 괴이한 행태를 만들어냈다.
‘이건 정말 위험한데.’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아마 오늘 흘린 피만 해도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 이상은 되지 않을까.
아까 포션을 먹지 않았다면 아무리 지크라도 얄짤없이 과다출혈로 죽었을 것이다.
거기다 몸을 조여오는 수압과 차단되어버린 호흡은 지크를 한층 더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있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쿠웅!
충격파가 공기 대신 물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구 형태로 밀려나가는 물살이 빛을 교묘하게 왜곡해 신비로운 느낌을 들게 했지만 지금 여기서 그 형태를 감상할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쿠웅! 쿠웅!
지크가 연신 윈두르를 휘저었다. 그 때마다 충격파가 일어났다.
‘성가셔!’
바다까지 따라온 액체 괴물들의 공격 때문이었다. 과연 그것들의 실력은 물 밖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물속에서는 공간 이동과 다를 바 없이 이동할 수 있는 그것들은 기동력을 살려 계속해서 지크를 으깨기 위해 온갖 무기로 바꾼 팔을 움직였다.
그 와중에도 지크는 크라켄에 이끌려 더욱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갔다.
‘결단을 내려야겠어.’
이렇게 소극적으로 움직이다간 기다리는 건 죽음밖에 없다.
하지만 현 상황에 해법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크라켄의 다리는 단단했고 그 단단함을 뚫을 여유도 액체 괴물 때문에 없었다.
지크는 결단을 내렸다.
서걱!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다리를 잘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