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1화
지크는 그것과 거리를 뒀다. 방금의 충격으로 그것의 몸을 덮고 있던 얼음 파편과 더불어 나무뿌리에 달라붙어 있던 얼음들까지 모조리 깨져나갔다.
얼굴에 눈과 입이 잔뜩 달린 팔이 돋아난 그것의 모습은 무척이나 기괴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쑤욱! 쑤욱! 쑤욱!
그것의 몸이 부풀며 커다란 한 덩어리의 고깃덩이처럼 변해갔다. 팔과 다리가 이곳저곳 돋아나고 눈과 코와 입과 귀가 부위를 가리지 않고 생겼다.
“그게 네 본 모습이냐? 무척 예쁜데? 적어도 본모습보다는 말이야!”
지크가 고깃덩이에 검기를 날렸다. 고깃덩이에 튀어나온 팔 십 수 개가 동시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웅!
고깃덩이 앞으로 마법 장벽이 만들어졌다. 하나도 무척이나 단단한데 그것이 팔의 개수만큼 펼쳐졌다.
지크의 공격은 장벽을 뚫지 못했다.
스윽!
십수 개의 팔을 장벽을 치는 데 사용했지만 그래도 고깃덩이의 팔은 남아있었다. 그것들이 각자의 움직임을 보였다.
퍼엉!
얼어붙은 호수가 일제히 깨져나가며 용오름 수십 개가 솟구쳤다.
동시에 고깃덩이에 붙어있는 입들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문이었다. 각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문은 전부 달랐다.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저게 얼마나 짜증나고 위험한 상황인지도 안다. 고깃덩이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용돌이쳤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나무가 진동하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나무의 막대한 마력이 고깃덩이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너무 반칙인데.’
천하의 지크가 혀를 찰 만큼, 고깃덩이의 공격 태세는 규격 외였다.
마법을 준비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멍청하게 있을 순 없다.
지크는 고깃덩이에 달려들었다. 마법장벽이 그를 막아섰다. 지크는 윈두르에 맺힌 마력을 예리하게 갈았다.
콰앙!
첫 번째 공격은 막혔다. 하지만 윈두르에 넣은 마력의 형태를 변화시킨 것이 효과가 있었던 듯 장벽은 크게 흔들렸다.
콰콰쾅!
짧은 순간에 연속적으로 장벽을 두드린다. 장벽에 순식간에 금이 가더니 곧 산산이 깨어지며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하지만 장벽은 하나만이 아니었다. 깨진 장벽을 구현하던 손이 다시 장벽을 펼치려 손짓을 하는 게 보였다. 다시 장벽을 펼치려는 것이다.
아무리 장벽을 부숴도 그 뒤에 새로운 장벽이 생긴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다른 방법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런 때는 그냥 무식하게!’
콰콰콰콰콰쾅!
윈두르를 휘두르는 속력이 더욱 빨라졌다. 기존에 있던 장벽 뒤로 새로운 장벽이 만들어졌지만 지크가 장벽을 파괴하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콰앙!
결국 장벽이 모두 깨져나갔다. 고깃덩이가 윈두르의 칼날 앞에 무방비상태로 드러났다.
하지만 조금 늦었다. 고깃덩이의 손에 맺힌 마법에서 위험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손들이 지크를 겨냥했다.
소리가 멎었다. 전투가 중단된 건 아니었다. 고깃덩이의 손에서 뿜어진 마법의 폭음이 엄청 나, 일순간 귀가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들리는 건 ‘삐~!’거리는 이명뿐이다.
쿠우우우우!
잠시 후, 귀의 기능이 돌아왔다. 지크를 향해 쏘아졌던 엄청난 마법이 사라져가며 남은 폭음이 회복된 귀청을 때렸다.
고깃덩이는 수많은 눈을 돌렸다. 그것이 펼칠 수 있는 마법 중 최고의 마법을 펼쳤다.
설마 이 마법을 맞고 지크가 살아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제대로 된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것도 그 판단에 영향을 끼쳤다.
그릇된 판단이었다.
서서히 사그라드는 마법의 잔해들을 뚫고 지크가 뛰어나왔다.
그도 정상은 아니었다. 자상, 화상, 동상, 열상 등등 수많은 상처를 입은 데다 엄청나게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고 고깃덩이를 향해 날아가는 윈두르 또한 곧았다.
고깃덩이가 빠르게 반응했지만 지크의 공격은 고깃덩이의 피부를 찢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여러 입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른다. 팔과 다리들이 그로테스크하게 버둥거렸다.
‘고통에 대한 내성은 별로 없나?’
지크라면 몸이 찢긴 건 찢긴 거고 지금처럼 바로 다음 행동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게 반격이든, 방어든, 회피든.
물론 고깃덩이라고 비명만 지르진 않았다.
지크와 가까이 있던 팔이 지크를 잡으러 뻗어 왔다. 뒤쪽에 있는 팔들은 다시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크는 고깃덩이에 접근한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거리를 두면 위험하다!’
연구소에서 싸운 고깃덩이에 비하면 날아오는 마법의 개수는 떨어진다. 거긴 정말로 방과 복도 전체를 고깃덩이가 메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생각 없이 쏘아진 마법들은 자기들끼리 방해하고 상쇄되기도 했었다. 그저 스스로 판단을 해서 마법을 쏘아댔던 괴물이 위험할 뿐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녀석은 다르다. 마법도 마력도 마법의 숫자도 연구소에 있던 괴물보다 윗줄이었다. 게다가 마법들을 융합도 한다.
‘마법끼리의 빈틈을 찌르지 않았으면 위험했어.’
여러 속성이 섞였지만 윌위스 드웨인이 마도의 마왕시절 썼던 완벽한 삼 속성 융합 마법 인페르노에 비하면 완성도가 한참 떨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청난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치료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포션을 꺼낼 시간조차 사치였다.
뻗쳐 오는 팔을 피하고 뒤로 돌아갔다. 고깃덩이는 무척이나 잽쌌다. 과연 단순한 내려치기일 뿐이었지만 지크의 검을 막은 존재였다.
하지만 지크가 본격적으로 교란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하니 그것의 팔다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서걱!
팔 하나가 떨어졌다. 고깃덩이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몸체에서 떨어졌음에도 팔뚝은 바닥에서 펄떡펄떡 뛰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마법을 부릴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떨어뜨린 팔뚝의 마법 외에도 몇몇 마법이 취소가 됐다. 비명을 지르느라 주문이 끊긴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마법들은 완성됐다. 그것들이 지크를 노렸다.
그러나 그 마법들은 지크에게 만족스러운 타격을 주지 못했다. 아무래도 바로 옆에 지크가 있는 터라 대규모 공격마법은 사용하지 못한다.
자칫 잘못 사용했다가는 자신마저 타격을 입는 것이다. 때문에 범위가 좁은 마법을 사용했지만, 그런 것은 눈치 빠른 지크가 전부 피해버렸다.
장벽을 치려 해도 지크가 너무 가까워 장벽을 칠 만한 거리가 나지 않는다. 지크는 철저하게 그런 계산을 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으에이으이에야아아아아!
고깃덩이가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찬 비명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자기 분에 못 견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나야 좋지.’
상대가 흥분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마음대로 의도하기 쉬워진다.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손들을 지크는 계속해서 피했다.
하나하나가 엄청난 마력에 휩싸여 있어 제대로 맞는다면 살점 좀 파이거나 뼈 몇 대 부러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게 뻔했다.
그 때였다.
고깃덩이가 급히 팔 몇 개를 휘둘렀다. 장벽 몇 개가 생겨났다.
콰콰콰콰쾅!
장벽을 머리통만한 불덩이들이 연속으로 때려댔다. 장벽이 잘 버티는가싶더니 곧 금이 쩌저적 갔다.
누가 봐도 얼마 못 버틸 모습이다. 고깃덩이는 팔 몇 개를 장벽을 치는 데 더 동원했다.
고깃덩이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빈틈이 많아졌다. 지크는 슬쩍 불덩이가 날아온 쪽을 쳐다 봤다.
라일라가 이쪽을 향해 지팡이를 내밀고 있었다.
기회였다. 지크는 고깃덩이에 윈두르를 굳게 찔러 넣었다.
-끼에에에에에엑!
고깃덩이의 하체 -상체가 부풀어 괴물의 형태가 되어버린 지금은 구별조차 제대로 가지 않지만- 가 크게 뜯겨 나갔다.
징그러운 상처 안에서 피로 생각되는 붉은 액체가 줄줄 샜다.
‘응?’
지크는 살덩이 속에 묻힌 무언가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에 시선을 준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일단 저건 나중에.’
지금은 고깃덩이를 해치우는데 집중해야 했다. 녀석이 정신을 다잡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이대로 난도질한다!’
하지만 상황은 지크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퍼어엉!
호수의 물이 치솟았다. 다시 용오름이 솟아오른 것일까. 그러나 그건 용오름이 아니었다. 길고 커다랗게 뻗은 다리였다.
부우우우우우우우!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크라켄!’
지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타난 크라켄의 다리에 커다란 흉터가 보인다.
‘저번에 슈트올을 습격한 놈이군.’
그러다 지크에게 일격을 맞고 도망간 놈이 틀림없었다. 지크는 고깃덩이를 쳐다봤다.
‘저 녀석이 부른 건가.’
역시 슈트올을 습격한 것도 저 녀석의 짓이 틀림없어 보였다.
지크는 고깃덩이를 향해 움직였다. 지금은 크라켄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죽여야 해!’
지크가 윈두르를 휘둘렀다. 아예 고깃덩이를 반으로 베어 넘길 셈이었다. 하지만 지크의 검은 닿지 않았다.
비틀!
지크의 몸이 잠깐 무너졌다. 고통은 정신력으로 누르고 엉망이 된 몸은 마력으로 메꾸고 있었지만 결국 한계가 온 것이다.
지금의 지크의 상태는 다른 사람 아니, 숙련된 기사라도 전투는커녕 움직임조차 만족스럽게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상태로 능숙하게 전투를 하는 것만으로도 지크가 얼마나 괴물 같은지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 빈틈이 무척이나 치명적인 것도 사실이었다.
콰아아앙!
크라켄의 거대한 다리가 지크가 있던 곳을 강타했다. 지크는 어쩔 수 없이 뒤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벌어지자 고깃덩이는 부랴부랴 자신과 지크의 사이에 엄청난 양의 장벽을 만들어냈다.
지크로서도 짧은 시간 안에 쉽게 부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젠장!’
지크는 급히 포션을 꺼내 목구멍에 들이 부었다. 그리고 다른 포션들을 자신의 몸에 깨뜨렸다. 포션이 몸에 끼얹어지자 그의 상처가 급속도로 회복됐다.
그러나 고통이 사라져감에도 지크의 찌푸려진 얼굴은 펴질지를 몰랐다.
부우우어어어어!
크라켄의 다리 여덟 개가 모두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것이 섬을 덮쳤다. 빨판 안에 있는 이빨들이 위협스럽게 따닥거렸다.
쿠웅! 쿠웅! 쿠웅!
지크는 떨어지는 다리들을 요리조리 피해 고깃덩이에게 다가갔다. 가로막는 장벽을 때려 부셨다. 그러나 고깃덩이는 다시는 지크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인간 같으니! 누가 클로원 황제의 검을 갖고 있는 놈이 아니랄까봐 끈질기기가 이를 데 없구나!
“칭찬은 장벽을 치워주는 걸로 대신해주지그래!”
-헛소리를!
하지만 고깃덩이는 방금 전 겪은 목숨의 위기 때문에 지크가 무척이나 꺼림칙했다.
-크라켄!
부어어어어어어!
크라켄이 다리를 높이 치켜들었다. 동시에 고깃덩이가 손을 움직였다.
퍼어어엉!
호수가 파도치며 섬을 뒤덮었다. 용오름이 솟고 물방울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지크가 급히 윈두르를 휘두르며 방어에 나섰다. 자신에게 향하는 온갖 공격을 튕겨낸다. 그런 지크에게 고깃덩이의 마법까지 쏟아졌다.
“큭!”
아무리 지크라도 감당하기 버거웠다. 크라켄도 지크에게 다리를 뻗었다.
콰아아앙!
그때 크라켄의 다리 두 개가 폭발하며 떨어져나갔다.
크라켄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라일라의 마법이 크라켄에게 적중한 것이었다.
부오아아아아!
크라켄이 고통에 울부짖으며 목표를 라일라로 바꾸려 했다. 하지만 고깃덩이가 크라켄을 막았다.
-그쪽은 신경 쓰지 마라! 눈앞의 남자를 죽여!
크라켄이 멈칫하더니 다시 지크를 향해 돌격했다.
‘이런 인기는 싫은데.’
지크는 덮쳐오는 크라켄의 다리를 피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