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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339화 (339/628)

제339화

힘을 충분히 회복한 후 지크 일행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주구의 끄트머리에 있는 통로를 찾았다. 그것은 이곳으로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방식의 직사각형 구멍이었다.

이번에도 지크는 같은 방식을 쓰기로 했다. 쇠사슬을 꺼내 한스에게 쥐여줬다. 하지만 바로 내려가진 않았다. 그의 시선이 라일라에게 닿았다.

“정말로 괜찮겠냐?”

땀을 모두 닦아낸 그녀는 외관상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그저 조금 피곤해 보일 뿐.

하지만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원한다면 조금 더 쉬다 가도 된다만. 아니면 잠시 도시로 돌아갔다가 다시 오는 방법도 있어.”

그러나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조금 피곤할 뿐, 컨디션이 심하게 무너진 건 아냐.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충분히 반응할 수 있어.”

“너는 스스로 잘 판단할 수 있는 녀석이니 이 이상 뭐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한 번만 더 물어보마. 정말 괜찮냐?”

“옛날의 너답지 않네. 정말 모어랑은 딴판이구나.”

“나는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니까. 그리고 그 시절에도 난 나름 동료를 아꼈어.”

“그래, 그랬었지.”

한스나 스녹, 엘레나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나누며 둘은 피식 웃었다.

“난 정말로 괜찮아. 탐색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고. 오히려 이 아래에 흥미가 더 생겼거든.”

“네 꿈과 관련된 무언가가 아래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가능성은 충분하잖아?”

“그렇지.”

지크와 라일라가 구멍 아래를 내려다봤다. 마치 길 잃은 방랑자를 유혹하는 지옥의 입구처럼, 그것은 음습하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 * *

지크는 아까처럼 쇠사슬을 잡고 구멍 밑으로 내려갔다.

이번 구멍의 깊이도 아까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구멍 벽면에 금속으로 이루어진 층이 나타났다. 거의 팔뚝만 한 두께의 그 층은 넒은 금속판을 벽면에 박아 넣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금속판은 마주 보는 벽면에 하나씩 박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벽면에는 홈이 파여 있었다. 마치 금속판을 끌어내 구멍을 막을 수 있게 해둔 것처럼.

‘격벽인가?’

구멍 아래에서 뭔가 예상외의 사태가 터졌을 때 그 영향이 바깥까지 미치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은 물건이 아닐까 지크는 추측했다.

금속판에 손가락을 대봤다. 금속 특유의 차가운 온도와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손끝을 자연스레 스치는 마력의 향.

‘아다만티움.’

강도도 마력친화력도 가격도 미스릴보다 윗 줄인 금속이다.

‘그것도 합금이 아닌 순수 아다만티움이야.’

통짜로 만들어진 아다만티움 판은 지크조차도 놀라게 만들 물건이었다. 게다가 그게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지크는 조금 더 내려갔다. 아다만티움 판이 다시 나타났다. 더 내려 가자 또 다른 아다만티움 판이 보였다. 아다만티움 판은 약간의 간격을 두고 연속해서 박혀 있었다.

‘대체 격벽을 얼마나 설치한 거야.’

입구에 이만한 격벽을 설치해 놓아야 하는 시설이라니.

지금까지보다 경계심이 더 심해졌다. 어쩌면 이 아래에는 이만한 격벽을 만들어야 했을 만큼 위험한 무언가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턱!

지크가 땅에 내려섰다. 이곳에도 조각난 석판이 있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횃불을 잔뜩 꺼내 휘둘렀다. 잠시 후 라일라가 다른 일행과 함께 아래로 내려왔다.

“벽면에 붙어 있던 거 봤어?”

라일라가 물었다.

“봤지.”

“아다만티움이었지?”

“그래.”

한스, 스녹, 엘레나는 아다만티움이라는 말에 놀랐다. 특히 엘레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갖고 있는 기반 지식이 다른 이들과 다른 데다가 아직 지크 일행에 물들기 전이라 하나같이 상식과 어긋나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셋은 하염없이 구멍이 뚫려 있는 위를 올려다봤다. 그곳에 상상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귀금속이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라일라도 위를 올려다봤다.

“회수할까?”

“일단 가만둬 보자고. 필요한 상황이 있을 수 있으니까.”

격벽을 작동시킬 만한 일을 말함이다.

“저걸 작동시키려면 마력이 필요할 거야. 그것도 저 판을 움직이게 만들어진 가공된 마력이 말이야.”

“어딘가에 공급 장치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뭐니 뭐니 해도 정체 모를 유적이니까.”

“하긴.”

라일라가 지크의 의견에 동의했다.

“게다가 이 쪽에는 혹시나 하는 상황에 강제로 격벽을 닫을 수 있는 녀석이 있으니까.”

“아, 그렇구나.”

지크와 라일라의 시선이 스녹에게 쏠렸다. 갑작스러운 시선을 받은 스녹이 움찔했다.

새로 내려온 구멍도 저번 구멍과 같이 커다란 방 안과 이어져 있었다. 맞은편에 뻥 뚫린 출입구가 있는 것 또한 같았다.

그러나 방 바깥은 지하 도시와 달랐다. 커다란 지저 공간 안에 건물들이 도시를 이루며 존재하던 위층과는 달리, 이곳의 출입구는 그저 어떤 통로와 연결되어 있을 뿐이었다.

통로는 컸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통로는 지하에 있는 것답지 않게 일견 상쾌하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 통로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작은 통로들이 뻗어 있었다.

지크는 일단 왼쪽 통로를 선택해 일행을 이끌었다. 통로는 제법 길었다. 일행은 여기서도 몇 개의 아다만티움 격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발견된 아다만티움만 생각해도 이 유적을 만든 세력의 저력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 세상에서 힘 좀 쓴다는 나라들도, 이 유적을 만든 세력에게 적어도 경제력으로는 범접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통로는 웬 방으로 연결됐다. 거대한 공간이 그들을 떡하니 반겼다. 그곳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텅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웬 유리 조각과 용도가 불분명한 금속 물품들을 좀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일라가 금속 물품들에 관심을 보였다.

“미스릴이야.”

“아주 귀금속이 돌처럼 굴러다니는군.”

지크가 푸념하듯 내뱉었다.

일행은 방을 나서 다른 통로로 들어섰다. 꽤 많은 통로가 있었지만 구조가 무척 단순해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통로들은 또 다른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용도를 모르는 커다란 마법진이 방의 한쪽 벽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방도 있었고 뭣 모를 깨진 유리 기둥들이 잔뜩 세워진 곳도 있었으며 가공되지 않은 귀금속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방으로 통하는 통로에는 전부 아다만티움 격벽이 존재했다.

십수 개의 방을 둘러본 후, 더 이상 방에서 얻을 단서는 없다고 생각한 지크는 가장 크고 넓은 통로를 걸었다.

‘아마도 이게 주통로겠지.’

그리고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이 끝에 있을 확률이 높다.

어느 순간 양옆에서 나타나던 작은 통로들이 사라졌다. 그저 주통로가 앞으로 뻗을 뿐. 양옆의 작은 통로들이 사라졌을 즈음부터 주통로는 아래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그렸다.

통로의 끝에 도착했을 때, 일행은 하나같이 목을 꺾어 위를 올려다봤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건 커다란 문이었다.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 그 문은 누가 봐도 이 너머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라일라는 침을 삼켰다. 이 문 너머에, 자신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연다.”

지크가 문에 두 손을 댔다. 힘을 잔뜩 끌어올려 문을 밀었다.

그그긍!

육중한 문이 낮은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서서히 밀렸다. 조금씩 벌어지는 틈 사이로 건너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 정도는 들어갈 정도로 문이 열리자 지크는 손을 뗐다. 그리고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다른 일행들도 따라 들어갔다.

“예상대로군.”

전면에 보이는 거대한 무언가를 보고 지크가 중얼거렸다. 라일라가 그의 옆에 섰다.

“나무네.”

“그래, 나무야.”

그들의 전면으로, 예상했던 것과 같이 거대한 규모의 나무가 서 있었다.

그 공간은 둥근 구를 정확히 이등분해 놓은 것 같은 돔 형태였다. 벽은 네모지게 깎인 거대한 돌덩이를 쌓아 만들어져 있었는데, 상층부 군데군데에 반원형의 구멍이 뚫려 물이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물들은 지면에 고여 푸른 호수를 만들었다. 공간의 2/3가 푸른 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호수 중앙에 상당한 크기의 섬이 하나 있었다.

나무는 그 섬에 심어져 있었다.

어찌나 커다란지 지면 위로 드러난 뿌리 하나하나마저 웬만한 크기의 나무보다 클 정도였다.

하지만 그 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크기가 아니었다.

라일라가 나무의 가지를 쳐다봤다.

“역시 물이야.”

나무의 가지에는 초록색의 나뭇잎 대신, 파란색의 물방울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지크와 라일라의, 물의 속성을 가진 나무가 있을 거라는 추측이 정확히 맞은 것이다.

“봐봐, 지크! 역시 여기에 있었어!”

라일라가 지크의 소매를 잡고 흔든다. 하지만 지크는 라일라의 장단에 맞춰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래. 그리고 너를 죽이려 한 놈도 찾은 것 같다.”

“뭐?”

지크가 손가락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건 나무의 밑둥, 거대한 뿌리가 드러난 곳이었다.

“…저건 뭐야?”

라일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쳐다봤다. 나무 뿌리 위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인가?”

긴 머리를 가진 여성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저걸 사람이라 한다면 고블린이나 오크도 사람 취급해야 할 거다. 잘 봐줘야 머메이드나 세이렌이겠지.”

상반신은 인간, 그것도 꽤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하반신은 전혀 달랐다. 욕지기 나오는 추한 고깃덩이가 허리 아래부터 꿈틀거렸다.

“다시 보니 머메이드나 세이렌도 아니겠군. 그것보다도 더 괴상한 무언가야.”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의 징그러운 하반신이 마치 기생을 하듯, 나무뿌리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 문제였다. 나무의 힘을 익히 알고 있는 지크로서는 그 모습이 그리 좋은 징조로 보이진 않았다.

- 후후후!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낯선 음성이 공간 전체를 울렸다. 나무에 붙어 있는 괴물이 입을 연 것이다. 거리가 꽤 떨어져 있음에도 그것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가? 난 꽤 알맞은 비유를 했다고 생각한다만.”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하면서도 지크는 슬쩍 윈두르를 든 손에 힘을 줬다.

- 그런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무척이나 슬프네요, 폐하.

“응?”

무슨 말이 나오든 바로 빈정거리며 반박하려던 지크가 멈칫했다. 정말로 예상치 못한 호칭이 들려온 탓이다.

“폐하라고?”

보통 황제를 호칭하는 말. 말투에서 존경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빈정거림이 틀림없겠지만 그렇다고 아무 관련 없는 말로 조롱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 네, 폐하. 뭔가 이상한 게 있을까요? 뒤에 태자 전하도 같이 데려오셨잖아요.

“…나?”

지크의 뒤에 서 있던 한스가 황망하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지크의 제자로 들어가기 전, 백작가의 하인이있던 자신에게 태자라니. 생뚱맞아도 그렇게 생뚱맞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의 관심은 이미 한스에게서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라일라를 쳐다본다. 그 순간, 라일라는 숨을 삼켰다. 꿈속에서 본 거대한 눈. 그것이 보내던 시선과 지금의 시선이 놀랍도록 흡사했다.

“당신도 오셨고요, 공주님. 아니, 여신님이라고 불러드리는 게 나을까요?”

그 순간, 지크는 느꼈다.

얼굴이 똑같은 건 아니다. 그것의 용모도 상당히 아름다웠지만 그래도 라일라와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왜일까.

그것이 라일라와 닮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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