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7화
구멍의 크기는 상당히 컸다. 대략 평범한 서민의 집 두 채 정도는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사각형의 입구 아래로 끝도 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다.
‘얼마나 깊은 거지?’
지크가 눈에 마력을 집어넣고 아래를 내려다 봤다. 하지만 그럼에도 구멍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 때문에 밝은 곳을 볼 때만큼의 효율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긴 하지만 구멍이 상상 이상으로 깊은 것도 확실했다.
“어때?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
라일라가 물었다.
“시야가 미치는 곳까지 위험해 보이는 건 없어. 하지만 끝이 보이는 것도 아니니 확인을 해 봐야지.”
지크는 마법 상자에 집어넣어 놨던 쇠사슬을 꺼내 한스에게 건넸다.
“잡고 있어.”
“네!”
바로 뛰어내린다고 해도 지크의 능력상 떨어져 죽는 일은 없겠지만 예상치 못한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크는 쇠사슬을 단단히 잡고 구멍 아래로 몸을 들이밀었다.
턱!
벽면을 발로 쳐가며 쭉쭉 내려간다. 잠시 동안 쇠사슬이 벽에 부딪치거나 지크가 벽을 차는 소리만 들렸다.
그렇게 얼마 쯤 내려갔을까.
지크의 눈에 슬슬 구멍의 바닥이 눈에 들어 왔다.
‘돌판인가?’
무언가가 부서진 파편이 구멍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원래의 형태를 추측해보면 아마 구멍과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돌판이었던 듯했다.
‘저게 이 구멍을 오르내리게 한 이동판인 것 같은데.’
동력 장치는 마력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다. 실제로 저런 장치를 사용하는 건 지크가 알기로 없다.
마력에 관해 가장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스누위크의 마탑조차 저런 장치를 사용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보다 문명이나 기술이 훨씬 더 뛰어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클로원이라면 저런 장치를 만들었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조금 더 내려가자 쇠사슬의 길이가 다했다. 하지만 아직 바닥까지의 거리는 멀었다.
지크는 다른 쇠사슬을 꺼냈다.
콰직!
송곳을 벽에 박아 넣은 후 새로운 쇠사슬로 갈아탔다. 그리고 다시 내려갔다.
얼마 후, 지크는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별다른 위험은 없군.’
침입자에게 불덩이를 쏜다든가 번개를 지진다든가 하는 함정까지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 구멍은 그저 위와 아래를 연결하기 위한 통로였을 뿐인 모양이었다.
지크는 마법 상자에서 홰를 꺼내 횃불을 만들었다.
어둠을 쫓아내기 위한 게 아닌, 위쪽 동료들에게 신호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보이지 않을 것을 대비해 십여 개에 불을 붙였다.
지크가 횃불을 만들어 신호를 보내고 얼마 후, 라일라의 마법으로 일행이 천천히 구멍에서 내려왔다.
“엄청 깊네.”
마법을 지우며 라일라가 놀라워했다.
“이 정도 깊이면 바다보다 더 아래 아냐?”
“그럴 가능성이 높지.”
지크가 긍정했다.
바다 아래의 유적. 그 신비한 울림에 다른 일행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검푸른 바다의 밑바닥보다 더 아래에 있는 곳이라니.
그러나 지크에게 그런 감성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지하라 공기가 눅눅하다면 투덜댔다.
라일라는 쭈그려 앉아 바닥에 부서져 있는 돌조각들을 뒤집어댔다. 매끄러운 표면의 그것들은 분명한 인공물이었다.
지크가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갔다.
“이 구멍을 오르내리기 위한 이동판이라고 생각되는데, 네 의견은 어떠냐?”
“나도 같은 생각이야.”
라일라가 돌조각 하나를 들어 깨진 단면을 보여줬다. 거친 표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지크의 좋은 눈은 그 단면에 작은 구멍이 뚫린 것을 손쉽게 발견했다.
“이게 마법진의 흔적일 거야. 이 돌판 자체가 거대한 아티팩트였던 셈이지.”
“도, 돌을 아티팩트로 만들었다고요?”
엘레나가 놀랐다. 놀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기겁을 했다.
마법을 공부하기 위한 비용을 벌기 위해 아티팩트에 대해 자세히 공부했었던 그녀라 돌을 재료로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고 있던 것이다.
철로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도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운 기술인데 하물며 돌이라니.
“여기 보렴. 이게 마법진의 흔적이야.”
라일라가 엘레나에게 돌의 파편을 보여줬다. 엘레나가 파편을 뚫어지게 들여다봤다.
“…정말로 마법진이야.”
“나중에 같이 조사해 보자.”
“네!”
라일라는 돌판을 모두 챙겼다. 엘레나가 적극 도왔다. 그녀들은 파편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녀들이 하는 양을 묵묵히 기다려주던 지크가 입을 열었다.
“끝났어?”
“응. 기다려줘서 고마워.”
“그럼 다시 이동하자.”
그들이 내려온 구멍 아래쪽은 나름 커다란 공간 안이었다. 매끈한 벽면과 천장이 이곳도 인공적인 곳임을 짐작케 했다.
돌판이 있던 곳의 맞은편으로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네모반듯한 모양새가 아마도 예전에는 문을 달아놓은 곳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일행은 구멍 바깥으로 나갔다.
엘레나가 만든 불덩이에 주변 어둠이 물러가고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건 지하 깊은 곳에 있는 커다란 도시였다.
벽돌을 쌓아 만든 건물들이 격자형식으로 나란히 서 있다. 철저한 계획 하에 세워진 계획도시가 분명했다.
다른 이들도 감탄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비슷한 걸 본 적은 있지만 이곳은 이곳만의 특징이 있었다.
지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세간살이는 옛날에 전부 뺐는지 아니면 오랜 세월에 썩어 없어졌는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지크는 그렇게 몇 집을 둘러 봤다. 집들의 구조는 모두 동일했다.
‘일반적인 도시는 아니군.’
아무리 계획도시라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한 구역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지크가 살피기로 약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의 모양이 모두 똑같았다.
라일라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건물이 모두 획일적이야. 평범한 도시는 아니네. 수용소, 아니면 기숙사 같은 건물일까?”
“기숙사 쪽이 더 설득력 있군. 적어도 수용소를 이렇게 좋게 짓진 않았을 테니까.”
건물이 작긴 했지만 수용소라고 보기엔 건물의 구조는 꽤 괜찮았다. 한두 명이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 건물은 크군요.”
한스가 새로 나타난 건물을 올려다봤다. 똑같이 생긴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종종 이런 특이하고 거대한 건물이 나타나기도 했다.
“똑같이 생긴 건물들은 아마 거주를 위한 집일 테고, 이런 건물들은 다른 용도로 사용된 건물이겠지. 편의시설이나 오락시설들 말이다.”
지크의 설명에 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커다란 건물 안을 살펴봤지만 그 곳에도 남은 건 없었다. 깨진 유리조각이나 금속 장신구들이 얼마 발견됐을 뿐이다.
그렇게 지크 일행은 대략 도시의 4분의 1 정도를 돌아봤다.
지크와 라일라는 이 도시가 어떤 목적을 위해 모은 사람들을 지내게 하기 위한, 일종의 기숙사라는 것에 점점 더 확신을 가졌다.
“기숙사를 이만한 규모로 짓다니. 목적이 뭐였을까?”
라일라가 지크에게 물었다.
“모르지. 하지만 조금 더 내려간다면 뭔가 나오지 않겠어?”
이런 지하에 비밀 도시를 지어놓을 정도의 중요한 목적이라니. 흥미로운 냄새가 솔솔 났다.
하지만 쉽게 그 비밀을 드러내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준비해라.”
지크가 말을 내뱉자마자 일행의 분위기가 변했다.
라일라가 지팡이를 들고 한스가 에스텔레이드를 뽑는다. 스녹은 미스릴을 땅바닥에 흩뿌리고 엘레나도 지팡이를 꽉 잡았다.
지크도 윈두르를 끌러 내렸다.
엘레나가 일으킨 불덩이의 빛이 닿지 않는 저 먼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지크 일행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저건…!”
라일라가 놀랐다.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얼마 전에 침입했었던 괴물이잖아.’
인간의 형체에 뻥 뚫린 눈구멍이 소름끼치는, 액체로 이루어진 괴물. 그것들이 무리를 지어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군.’
지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것 때문에 놈들이 모습을 드러낸 후 시각으로 접근을 알아차렸다.
단순히 기척을 차단하는 능력이 높은 것뿐일까. 아니면 지크 자신이 기척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일까.
‘하지만 예전에 상대했을 때는 그렇게 강한 느낌은 없었는데.’
부딪쳐보면 될 일이다.
‘적어도 라일라를 노리던 놈이 여기 있다는 건 확실해졌군.’
누구인지 모르지만 일단 몇 번 주먹질을 날린 후에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토해내게 해야 했다.
스윽! 스윽!
지크 일행과 어느 정도 접근한 놈들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손을 흉내 내고 있던 팔이 꿈틀거리며 새로운 형태를 취했다.
칼로 변한 것도 있고 창으로 변한 것도 있으며 낫으로 변한 것도 있다. 그 이외에도 꽤 많은 무기의 형태로 변했다.
“재밌는 걸 할 수 있군.”
지크도 윈두르를 내밀며 언제든지 공격을 할 수 있게 준비했다.
라일라가 엘레나를 챙겼다.
“이중영창은 가능하지?”
요새 엘레나는 이중영창을 배우고 있었다. 회귀 전, 그렌 제너드의 일행이 되어 지크의 죽음에 깊이 관여할 정도로 능력이 있는 그녀다.
라일라라는 뛰어난 스승을 만난 그녀의 수준은 벌써 이중영창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늘어났다.
조명을 위한 불덩이를 유지하며 다른 마법을 사용하는 건 분명 난이도가 높지만 엘레나는 꽤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네!”
대답에도 그 자신감이 그대로 묻어났다.
“좋아. 무슨 일이 있어도 냉정을 유지하렴. 그래야 마법을 구사하기 쉬워지니까.”
“명심할게요!”
엘레나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굳게 대답했다. 제자의 믿음직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라일라는 적들에게 지팡이를 향했다.
라일라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방금 전, 엘레나에게 상냥하게 조언을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며칠 전에 눈앞의 놈들과 똑같은 형상을 한 괴물에게 죽을 뻔했으니 그녀의 분노는 당연했다.
라일라는 마법을 준비했다. 어떤 마법을 써야 좋을지 그녀의 머리가 팽팽히 돌아갔다.
‘물에는 전기가 최고긴 한데 말이야.’
하지만 물 자체가 형태로 모여 움직이는 녀석들이니 전기로 지진다고 해도 별 타격을 입지 않을 수도 있다.
‘생긴 걸로 봐서는 물이나 불엔 강하겠지.’
하지만 그게 함정일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정체불명의 녀석이다. 오히려 그것들이 약점인 속성일 수도 있다.
‘뭘 고민해.’
라일라의 지팡이에 번개와 화염이 소용돌이쳤다.
‘전부 시험해보면 그만이야!’
콰아아아앙!
번개와 불이 양 방향으로 내달렸다. 커다란 고함을 외치며 달려 나간 번개가 일정 구역 전체의 괴물들을 감전시켰다.
어둠을 불사르며 쏘아진 불덩이는 괴물들을 끌어안고 폭발했다.
라일라는 그 결과를 조용히 관찰했다.
‘번개는 소용없군.’
번개가 감전시킨 괴물들은 별달리 타격 받은 모습이 없었다.
‘의외로 불이 효과가 있어.’
물이 증발해 일정 이상의 몸을 잃어버리면 그것들은 형태를 잃어버리고 일반적인 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라일라는 계속해서 여러 속성의 공격을 계속 가했다. 그리고 결론을 얻었다.
‘불이 가장 효과적이야.’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엘레나가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이 불의 마법이니, 그녀도 활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도움이 안 된다며 은근히 마음을 쓰고 있었으니까.’
엘레나가 날린 불덩이가 괴물 몇 체를 다시 물로 돌려버리는 모습에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라일라와 엘레나가 숫자를 줄인다 해도 괴물의 숫자는 훨씬 많았다. 그것들은 꾸준히 일행에게 접근했다.
눈앞으로 다가온 괴물에게 지크가 윈두르를 휘둘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