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5화
지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배로 뛰었다.
그 배에는 사방에서 닥쳐오는 몬스터들을 상대로 선원들이 힘겹게 대응하고 있었다.
노를 들어 몬스터들을 견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막대기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조그마한 칼을 들고 몬스터와 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무기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건 무리다.
물론 지크 정도의 실력이 있다면 나무 몽둥이 하나만 가지고도 잡다한 몬스터들의 대가리를 전부 깨부술 수 있겠지만 평범함 뱃사람에게 그런 실력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 증거로 갑판에는 선원 한 명이 벌써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덤벼 봐, 이 새끼들아!”
노를 든 선원이 악에 받쳐 고함쳤다. 하지만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키악!
몬스터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돌진했다. 한 마리를 노를 사용해 간신히 밀어냈지만, 옆에 있는 몬스터는 어찌 할 수 없었다.
몬스터가 손톱을 높이 쳐들고는 달려들었다.
“으, 으아아악!”
방금 친 고함이 무색하게도 그 선원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곧 몬스터의 손톱에 그의 몸이 갈기갈기 찢길 것 같다.
서걱!
소름 돋는 절삭음이 들렸다. 선원은 봤다. 자신을 향해 달려든 몬스터의 머리가 두 쪽으로 쩍 벌어지는 것을.
촤악!
피와 뇌수를 흩뿌리며 달리는 기세 그대로 몬스터가 갑판에 처박혔다.
다른 몬스터들도 마찬가지. 어떤 조짐도 없이 머리가 쩍쩍 갈라지며 몬스터들이 쓰러진다. 마치 신의 기적 같은 일이었다.
탁!
몬스터의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채 얼이 빠져 있는 선원들의 귀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돛대에서 나는 소리였다. 선원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돛대 위에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기괴한 검을 든 사내였다. 선원들은 본능적으로 그가 이 기적 같은 일을 일으킨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가 검을 휘둘렀다. 너무 빨라 제대로 보지도 못 했다. 하지만 그 결과만은 확실했다.
배를 기어오르던 몬스터들이 전부 피를 흘리며 바다 속으로 빠졌다.
탓!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그는 돛대에서 뛰었다. 일반 사람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새가 아닐까 하는 비거리를 자랑하며 그는 다른 배의 돛대에 내려앉았다. 그 배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 장면을 선원들은 입을 벌리고 쳐다봤다.
“뭣들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아직 끝난 게 아냐! 당장 부두로 돌아간다!”
선장의 호통에 선원들이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빼낸 노를 제자리로 갖다 놓으려 할 때였다.
콰콰콰쾅!
선원들이 일제히 귀를 막고 엎드렸다. 선장도 키에 얼굴을 박았다.
엄청난 굉음과 반짝이는 빛이 순식간에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뭐, 뭐야….”
선원 한 명이 하늘을 쳐다봤다. 검은 점 하나가 하늘에 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촛점을 맞추려 노력을 한 끝에, 그는 그 점이 사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손에서 뭔가 빛이 반짝였다.
콰콰콰쾅!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려 퍼진다. 선원들은 또 다시 귀를 막았다.
“버, 번개야? 사람이 번개를 뿌리는 거야?”
“마, 마법산가 봐.”
선원 둘이 오들오들 떨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이, 저길 봐!”
다른 선원이 손가락으로 어느 곳을 가리켰다.
바다 한가운데에 새까맣게 탄 몬스터들이 둥둥 떠오르는 게 보였다. 아마도 방금 전의 번개 때문인 모양이었다.
“몬스터를 처리하는 건가?”
“그렇지 않을까?”
“이 자식들아! 내가 정신 차리라고 했지! 당장 자기 일로 안 돌아가!”
다시 한 번 선장이 고함을 질렀다. 화들짝 놀란 선원들이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장은 키를 꽉 잡았다. 슬쩍 지크와 라일라가 몬스터들을 격멸하는 모습을 쳐다봤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배에서만 평생을 지냈지만 이런 난리는 처음이야.’
아마 살아남는다면 늙은 후 손주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모자라지 않을 거라고 선장은 확신했다.
* * *
지크와 라일라의 활약으로 많은 배들이 몬스터의 수렁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지크와 라일라라도 고작 둘이다.
넓은 바다의 배들을 전부 감당할 수는 없었다. 꽤 많은 사람이 당해 남은 선원들만으로는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된 상황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보통 지크가 남은 자들을 가장 가까운 배에 내려줬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피난에 성공해서든 죽어서든 움직이는 사람의 숫자는 줄어갔다.
지크는 전투 지점을 항만 쪽으로 옮겼다. 병사들이 여러 건축물이나 물건들을 이용해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지크와 라일라는 그곳에 껴 몬스터들을 도륙했다.
항만에서의 사람들도 대부분 대피가 끝나자 병사들도 차츰차츰 물러서기 시작했다.
다행히 슈트올로 통하는 길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한스와 스녹, 엘레나의 활약상이 돋보였다.
“지크 님!”
에스텔레이드로 자신을 가로 막는 몬스터 한 마리를 베어 넘기고는 한스가 지크의 곁으로 다가왔다.
“상황은?”
“단 한 마리의 몬스터들도 통과시키지 않았습니다! 절벽을 오르던 몬스터들도 전부 슈트올로 침입하지 못했습니다!”
한스는 또렷하게 현 상황을 설명했다.
“좋아, 여기서 계속 막는다.”
“네!”
지크와 라일라가 길목의 방어에 참여하자 철벽같은 방어선이 만들어졌다. 몬스터들의 사체가 길목 앞에 가득 쌓였다.
점점 몬스터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다행히 크라켄 같은 강한 몬스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공격을 포기했는지, 몬스터들이 하나둘 바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이겼다!”
마지막 몬스터가 바닷속으로 사라지자, 병사들은 커다란 고함을 질렀다. 갑자기 찾아온 대규모 몬스터 습격을 그들은 결국 버텨낸 것이다.
서로 부둥켜안고 팔을 뻗으며 몬스터가 사라진 바다를 향해 유쾌한 욕설을 내뱉는다.
그러나 지크는 병사들과 달랐다. 그는 조용히 잔잔한 바다를 노려보다가 윈두르를 매만졌다.
몬스터의 피를 잔뜩 머금은 그것은 방금 전의 살벌한 기세를 없애고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크는 몬스터들이 습격하기 전, 윈두르가 진동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꿈과 윈두르의 진동. 그리고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습격이라….’
이 도시가 더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 * *
사람들을 구한 지크 일행은 도시의 영웅으로서 대접받았다. 그들이 묵던 곳보다 한층 더 고급스러운 숙소가 주어졌고 여러 보상을 받았다.
한스와 스녹, 엘레나는 자신들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적잖이 감명 받은 모습이었다.
“참 감동받기 쉬운 놈들이라니까. 이제는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내버려 둬. 순진한 모습이 보기 좋잖아.”
지크와 라일라는 같은 방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라일라가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넣고 치즈 한 조각을 물었다.
“그런데 이런 대접에 익숙해지다니. 우리도 참 대단한 일을 많이 겼었구나.”
“우리가 찾아다닌 감도 있지.”
지크는 낄낄거리며 독한 브랜디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곳도 우리가 찾아온 곳 아니냐. 그리고 사건이 일어났지. 참 말썽 많은 곳을 잘 찾아다닌다니까. 우리는.”
“그게 좋아할 일인가?’
“나쁜 일은 아니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나쁜 일이라고 할 거야.”
“평범한 사람임을 거부하는 우리의 찬란한 삶에 대해 건배하자고.”
라일라는 잔을 앞으로 내미는 지크를 보며 확신했다. 저놈은 물에 빠지면 분명 입만 물에 둥둥 뜰 것이다.
“윈두르가 떨렸다고?”
“그래.”
단순한 농담 따먹기는 그만하고 둘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몬스터 습격 전에 갑자기 떨리더군.”
“하지만 윈두르에게 몬스터의 습격을 경고하는 기능은 없잖아.”
“맞아. 아마 윈두르의 떨림은 경고의 의미가 아니었을 거야. 하지만 몬스터 습격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단언하기도 어렵지.”
“몬스터 습격을 일으킨 무언가를 감지하고 윈두르가 떨렸다는 거지?”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슈트올에 뭔가가 있는 건 분명해. 그게 우리가 원하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제발 우리가 원하는 거였으면 좋겠는데.”
“나는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만.”
지크는 옆에 세워둔 윈두르의 손잡이를 툭툭 두들겼다.
“이 녀석도 클로원과 관련이 있는 건 거의 확실하니까. 그 무언가도 클로원에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클 거야.”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둘은 다시 한 번 잔을 부딪쳤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윈두르를 들고 떨리는 곳을 찾아 무턱대고 돌아다닐 거야?”
“그것도 생각해둔 방법 중 하나긴 해. 하지만 일단 탐문을 할 거야. 혹시 이 근처에 고대 유적 같은 것이 있나 말이야.”
“그러고 보니 클로원과 관련되어 있던 건 모두 유적이었지.”
비올루윈의 무덤이 그랬고 아드로원의 도시가 그랬다.
“유적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설화 같은 걸로 정보가 내려오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이 도시에서 오래 산 노인들을 찾아다녀 볼 거야.”
“얻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마찬가지야.”
둘은 자신의 잔에 있는 술을 한 번에 입으로 탁 털어 넣었다.
* * *
지크와 일행은 도시의 탐문에 들어갔다. 아직 도시의 경계도가 내려가지 않아 돌아다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노인들은 더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아무 집이나 들어갈 수는 없는 터라 일행은 난감해 했다.
그러나 지크는 간단하게 해결했다.
“인맥은 이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거야.”
시장에게 부탁을 하자 그는 흔쾌히 용건을 들어줬다. 도시를 구해준 영웅에게 그 정도 요구를 들어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지크는 여러 노인들을 만나 근처 유적이나 설화 등을 물었다.
노인들은 주저앉고 그들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오히려 그들이 더 즐기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젊은이들에게 자기가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그게 어디든 노인들에겐 즐거운 일이었다.
며칠에 걸쳐 지크 일행은 많은 노인들을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유적에 대한 건 없었네.”
“그렇군.”
아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수확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었다.
노인들이 얘기해준 설화 대부분은 별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교훈을 주거나 위험한 곳에 가지 말게 하려는 설화들이 대부분. 흥미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달랐다.
“‘사람을 잡아먹는 동굴’. 난 이게 걸려.”
라일라도 지크와 마찬가지 생각인 모양인지 먼저 말을 꺼냈다.
그곳은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해식 동굴이었다.
해안절벽에 있는 그 동굴은 바닷물이 들어차 배를 타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라고 했다.
상당히 깊은데다가 동굴 안으로 와류가 쳐, 슈트올의 사람들도 정확한 규모와 형태를 알지 못한다고도 했다.
“분명 지옥과 연결되어 있는 동굴로, 지옥의 악마들이 주변까지 기어 나와 사람들을 잡아간다고 했지.”
거기까지만 듣는다면 그저 평범한 공포 설화다. 위험한 동굴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아이들을 겁주기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크와 라일라는 그 설화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다.
먼 옛날, 위대한 황제의 부하들이 간간이 그 동굴로 악마들을 처단하러 들어갔다는 말이 설화에 첨가되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