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4화
까드득!
날카로운 손톱이 선체에 깊이 틀어박혔다. 가느다란 팔에 어울리지 않는 우람한 근육이 꿈틀대며 몸체를 끌어 올린다. 곧 그것의 머리가 수면 위로 솟았다.
기괴하게 생긴 생물이었다. 온 몸이 전부 푸른색의 비늘로 뒤덮여 있는 그것은 넓적한 얼굴에 과하게 큰 눈을 갖고 있었다.
키익!
비웃는 것 같은 새된 울음을 흘린 그것의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새빨간 혀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그것은 배 위로 올라가기 위해 다른 손도 선체에 박아 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윈두르가 그것의 머리를 쪼갰다.
컥!
제대로 된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그것은 숨통이 끊겼다. 선체를 잡고 있던 팔에 힘이 빠지며 자기가 나타났던 바다로 다시 잠겨 들었다.
그러나 나타난 괴물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콱! 콰직!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배를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종류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모조리 떨쳐내!”
지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행들은 배의 가장자리로 움직였다.
한스가 에스텔레이드를 휘두르고 스녹은 미스릴 덩어리를 날려 보낸다.
라일라가 무영창으로 대규모의 몬스터를 쓸어버렸고 엘레나도 하나하나 침착하게 몬스터들을 향해 불꽃을 던졌다.
“돛을 최대로 올려!”
선장의 명령에 몇 없는 선원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노도 최대한 저어! 어이, 손님들! 다른 것보다 일단 노 근처에 있는 놈들부터 떨궈줬으면 하는데!”
“한스, 스녹! 들었지! 각자 한 방향씩 맡아 노를 지켜라!”
한스와 스녹이 급히 노와 가까운 곳으로 움직였다.
“라일라! 바람 마법! 돛에 바람을 불어 넣어!”
“알았어!”
라일라가 주문을 외웠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간 마력이 주변 공기에 스며들었다.
후웅!
강한 바람이 돛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배의 속도가 붙으며 선수가 일으키는 물보라가 커졌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배를 타고 올라오려 기를 썼다.
탓!
지크가 발을 굴렀다. 그의 몸이 높이 솟더니 돛대 위에 내려앉았다. 그는 뱃머리 앞 쪽을 쏘아봤다.
검푸른 바다가 보인다. 지크의 좋은 눈으로도 바닷속 끝까지 꿰뚫어볼 순 없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가능했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배의 앞으로 몰려드는 걸 확인했다.
우웅!
마력을 가득 머금은 윈두르가 울었다. 날을 따라 막대한 마력이 날카롭게 맺혔다.
‘단순하게 커다란 한 방을 먹이는 건 안 돼.’
무턱대고 마력을 있는 대로 쏟아 부은 공격을 날렸다가 말 그대로 전면의 바다가 터져나갈 것이다.
범위 안에 있는 몬스터들은 확실히 쓸어버릴 테지만, 그 여파가 배까지 덮칠 것이다.
그럼 배가 침몰하진 않더라도 진로에 방해가 되는 건 확실하다.
‘바다의 저항을 최대한 받지 않고 딱 몬스터들만 썰어버린다.’
지크가 윈두르를 높이 들더니, 휘둘렀다.
‘바다 째로 벤다. 최대한 얇게.’
쌔액!
어찌나 빨리 휘둘렀는지 그 흔한 잔상조차 남지 않는다. 마치 칼과 팔이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지크는 그렇게 몇 번을 더 휘둘렀다. 얇고 날카로운 검기가 수면에 내리 꽂혔다.
퐁!
물이 튀었다. 하지만 그건 검기가 머금은 힘을 생각하면 극히 미미한 양이었다.
수면을 엷게 가르고 검기는 계속해서 바닷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 와중에 걸리는 건 모조리 베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몬스터들의 몸뚱이들이 썩은 과일처럼 잘려나갔다. 올라가던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멎었다.
그것들은 여기저기가 분해된 채 자신들이 목표로 하던 수면으로 둥둥 떠올랐다. 몇몇은 해류에 휩쓸려 사라지기도 했다.
검기에 잘린 바닷물이 다시 서로 합쳐 치며 미세한 틈을 메꾼다. 그 충격에 하얀 포말이 바다 전면을 가득 메웠다.
“…세상에.”
위기감에 땀에 젖은 손으로 키를 꽉 잡고 있던 선장이 입을 벌렸다. 앞에 갑자기 나타난 새하얀 포말들과 그 사이사이로 비치는 몬스터들의 붉은 피와 시체. 그의 눈이 돛 위의 지크 쪽을 향했다.
처음 그가 높이 뛰어 올랐을 때는 놀랐다. 평범한 인간의 신체 능력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돛대에 내려앉았을 때는, 겉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사방에서 배를 기어오르려는 몬스터들이 한 가득인데 갑자기 돛 위에 내려앉다니.
하지만 눈앞의 광경을 보고는 그 생각이 쑥 들어갔다.
지크는 몇 번 더 칼질을 해댔다. 그 때마다 주변 바다에 하얀 포말이 일고 몬스터 시체가 둥둥 떠올랐다. 배에 올라타려는 몬스터의 숫자가 급격히 줄었다.
그러나 지크는 방심하지 않았다. 거의 사라진 몬스터들을 보고 혹시라도 마음을 놓는 사람이 있을까 외쳤다.
“긴장 풀지 마!”
지크의 눈이 바다 밑으로 향했다.
“더 큰 놈이 온다!”
퍼엉!
순간 배와 조금 떨어진 곳의 수면이 터져나갔다. 하늘 위로 솟구치는 거친 물보라를 뚫고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크라켄.”
라일라가 중얼거렸다.
수면 아래에서 뱀처럼 튀어나온 것은 수많은 빨판을 가진 거대한 다리였다.
후우웅!
다리가 마치 채찍처럼 움직이며 배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 위력은 채찍과는 궤를 달리한다.
적중한다면 지크 일행이 탄 조그만 배 따위야 두 동강이 나 해저를 장식하는 흔한 조형물로 바뀔 게 분명했다.
“절대 멈추지 마쇼!”
선장에게 외친 지크가 다리를 향해 점프했다. 이미 그의 윈두르는 거친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윈두르와 크라켄의 다리가 부딪쳤다.
꽝!
둔탁한 굉음. 연체동물 같이 흐물흐물한 움직임을 보이는 크라켄의 다리는 그러나 무척이나 질겼다.
단단한 것과는 다르다. 연체동물의 물렁함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것 같은 피부다.
그것은 지크의 검을 막는 걸 넘어 튕겨내 버려, 그저 단단하기만 한 것보다 더 껄끄럽게 느껴졌다.
지크가 다시 돛에 내려섰다.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크라켄도 크게 대미지를 입진 않았다.
빨판에 상처가 나긴 했지만 그것의 덩치를 생각해본다면 생채기조차 되지 않을 피해였다.
부우우우우우!
바닷속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렸다. 둔중한 뿔피리 소리 같기도, 좁은 동굴을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다.
크라켄의 울음소리였다. 선장과 선원들의 몸이 쭈뼛 굳는 게 느껴졌다.
크라켄이라면 바닷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목소리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들은 자기의 일을 놓지 않았다.
크라켄의 다리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번엔 총 세 개다.
두 개는 배의 양 옆으로 솟았고 하나는 앞에 솟아 배의 진로를 막아섰다.
“진로 돌리지 마!”
지크가 선장에게 외쳤다.
“도움 필요해?”
“지금은 괜찮아! 너는 돛에 바람을 넣는 것에 집중 해!”
“알았어!”
라일라는 계속 바람을 일으키며 다른 손으로는 번개를 만들어 바다에 뿌려댔다. 바다라는 환경적 요인도 있어 그녀의 공격은 잘 통했다.
번개가 배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게 조절을 하는 걸 보면 과연 라일라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크는 다시 돛에서 뛰었다. 목표는 앞에서 덮쳐오는 다리였다.
검 끝에 마력을 집중시켜 다리를 찔렀다.
콱!
윈두르가 다리에 박혔다. 그러나 유의미하게 타격을 준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빨판의 중앙에 있는 작은 입들이 지크를 뜯어먹으려 이빨을 내밀었다.
자칫 발이라도 집어넣었다간 발목이 통째로 뜯겨나갈 것이었다.
지크는 빨판을 피해 크라켄의 다리에 발을 디뎠다. 그러고는 윈두르를 통해 크라켄의 내부에 마력을 쑤셔 넣었다.
쾅!
다리가 크게 휘청거렸다. 윈두르가 꽂혀 있던 부위가 터지며 커다란 구멍이 움푹 파였다.
부우우오오어어어!
바다가 요동치며 크라켄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지크는 고통에 사정없이 꿈틀대는 다리를 걷어차 다시 배 쪽으로 뛰었다. 배를 덮치려는 다른 두 개의 다리가 보인다.
지크는 윈두르를 휘둘러 다리를 튕겨냈다. 고통 때문인지 두 개의 다리는 별다른 저항 없이 쉽게 튕겨나갔다.
배는 크라켄의 다리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지크는 다시 돛대에 내려섰다.
크라켄의 다리가 허겁지겁 바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크라켄의 기척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도망쳤군.’
일단 한시름 놓았다. 지금 실력으로 맞부딪치기엔 크라켄이란 몬스터는 무척이나 강한 녀석이다. 게다가 녀석의 본거지인 바다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마음을 놓기엔 일렀다.
‘아주 난리군.’
습격을 받은 건 지크 일행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떠 있는 배들도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고 있었다.
어선, 상선 가릴 것이 없었다. 항만도 마찬가지. 심지어는 절벽에 매달려 슈트올로 바로 기어 올라가려 하는 몬스터들까지 보였다.
슈트올 자체가 공격을 받고 있었다.
콰지직! 쿠웅!
충돌음이 들려 살피니 배 하나가 항만에 충돌하고 있었다. 항만으로 돌아가려다 속도를 제대로 줄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손님!”
선장이 지크를 불렀다.
“슬슬 속도를 줄여야 해서 돛을 접어야 합니다!”
선장도 배가 항만을 들이받는 걸 본 모양이다.
“라일라!”
“응!”
라일라가 마법에 들어가는 마력을 끊었다. 거세게 불던 바람이 뚝 끊겼다.
여유가 나자 라일라의 마법이 몬스터들을 향해 더욱 강하게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보고 지크는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다.
‘저 녀석도 정말로 괴물 같은 놈이야.’
단순히 바람을 일으키는 마법이었다지만 상당한 시간을 계속해서, 그것도 다른 마법으로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며 지속하다니. 그녀의 능력은 날이 갈수록 무섭게 발전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힘의 마왕이라 불리던 최전성기 시절의 자신과 맞먹을 거라는 지크의 생각은 점점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부둣가는 이리저리 엉킨 선박들 때문에 엉망이었다. 선장은 상당히 실력이 좋은지 그 사이사이를 헤집고 항만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한계는 있었다. 결국 다른 배와 부딪치며 그들이 탄 배도 멈춰섰다.
‘이 정도면 되겠지.’
엉켜 있는 배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간다면 충분히 항만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한스! 스녹! 엘레나!”
지크가 그들을 불렀다.
“너희들은 선장과 선원들을 데리고 항만으로 올라가라! 그리고 슈트올로 진입하는 길에서 몬스터들을 막아!”
“두 분은요!”
한스가 묻자 지크는 바다를 쳐다봤다. 아직 많은 배들이 몬스터의 습격에 공황에 빠져있었다.
도시의 병사들이 보이긴 했지만 그들은 몬스터들이 도시를 습격하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것에 급급해 보였다.
“사람들을 구해야지!”
“알겠습니다!”
한스가 스녹과 엘레나에게 손짓했다. 선장과 선원들을 부축하고는 배들을 뛰어넘으며 항만으로 달렸다.
라일라가 지크의 옆으로 날아올랐다.
“착한 일 하려고?”
“해야지.”
지크는 난장판인 바다 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팀 녀석을 죽인 이유가 없어지잖아.”
“…그것도 그러네.”
“배에 붙은 몬스터들을 일일이 떼어놓는 건 내가 한다. 너는 바다 아래에 공격을 퍼부어서 몬스터들의 최대 숫자를 줄여.”
“알았어.”
지크와 라일라가 일제히 움직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