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잔말피를 떠난 지크 일행은 역시나 이번에도 도로를 벗어났다.
“저, 정말로 이쪽으로 가는 건가요?”
아직 지크 일행, 정확히는 지크의 무지막지한 직선거리 주파를 경험하지 못한 엘레나가 기겁을 하는 사소한 사건이 있었지만, 나머지는 다른 때와 같았다.
험악한 지형과 간간이 나타나는 맹수, 몬스터들을 도륙하며 낮에는 이동, 밤에는 야숙이라는 고된 일정을 처음 만난 엘레나는 무척이나 고생했다.
힘들다고 얘기는 들었지만 역시 직접 겪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귀한 집 자제였다. 한스는 백작 부인 유모의 손자로서 상당히 좋은 대접을 받았지만 그래도 하인이었고 스녹은 광부였다.
라일라도 마법사답지 않은 체력을 지닌 자였으니, 아무래도 다른 일행들보다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지크가 시킨 체력 단련이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라일라도 엘레나에게 마법 수업을 시키면서 체력 단련을 빼먹지 않았다.
마법사가 굳이 체력을 기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지크와 같이 여행을 하려면 체력이 필수였다.
그리고 엘레나를 곧잘 도와주는 자도 있었다.
“꺄악!”
산길을 걷다 엘레나가 발을 헛디뎠다. 상당히 경사가 진 곳인 데다 거친 산행에 다리가 풀려있던 터라 발이 쭈욱 미끄러졌다.
굴러떨어진다 해도 죽진 않겠지만 상당히 심한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를 지탱하는 무언가 덕에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턱!
땅을 구르는 거친 충격 대신 푹신하고 부드러운 무언가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건 흙이었다. 보드라운 흙이 의지를 가진 듯 일어나 엘레나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괜찮아?”
쿠우?
스녹과 노웸이 엘레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흙덩어리를 짚고 다시 중심을 잡았다.
“괜찮아. 고마워.”
일행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친한 둘인지라 엘레나가 곤경에 처할 때면 스녹이 가장 앞서 도와주곤 했다.
덕분에 엘레나는 이 희소한 여행 방법에 어떻게든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여행을 한 지 얼마나 됐을까.
“보인다.”
지크의 한마디에 모두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의 끝에 걸린 웅장한 성벽이 그들이 향하던 목적지, 슈트올이었다.
* * *
산을 내려와 도로로 접어든 지크 일행은 오랜만에 편안한 길을 걸었다. 엘레나가 특히 좋아했다.
멀리서 작게 보였던 성벽이 가까워지면 갈수록 그 덩치를 드러냈다.
꿈에서 거한이 말했던 것처럼 슈트올은 대도시였다. 그만큼 성벽의 크기도 컸다.
그러나 슈트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크 일행은 성문을 통과해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 도시 안으로 들어가면 맞은편에 보이는 건 또 다른 성벽이다. 대부분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모두 다 그렇다.
한쪽을 터놓는다면 도시를 보호한다는 성벽의 기능이 빛바래 버리니 당연하다.
그러나 슈트올은 달랐다. 성문을 지난 지크 일행의 눈에 보인 맞은편 풍경은, 회색빛 성벽이 아닌 푸른 하늘과 새파란 바다였다.
“와아~!”
“오오~!”
한스와 스녹이 감탄사를 흘린다. 그건 라일라와 엘레나도 다르지 않았다.
감탄을 하지 않은 건 회귀 전에 슈트올을 직접 봤었던 지크뿐이었다.
지크는 일행을 슈트올의 맞은편 끝으로 안내했다. 성벽이 보이지 않는 그곳은, 그러나 침입을 하기 결코 수월한 곳은 아니었다.
“이거 얼마나 높은 걸까?”
“평범한 사람이 떨어진다면 분명히 죽을 것 같은데요.”
쿠우….
“아니, 일단은 바다인 데다가 수심도 어느 정도 있어 보이니까 잘만 떨어지면….”
한스와 스녹, 엘레나는 절벽 바로 위에 단단히 쳐진 울타리에 매달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말을 나눴다.
노웸은 혹시라도 떨어질까 스녹의 머리에 착 달라붙어 머리카락을 꽉 잡았다.
지크와 라일라도 그들의 옆에 서서 울타리 아래를 내려다봤다.
“장관은 장관이네.”
“슈트올은 이 특이한 지형으로 유명하니까.”
해안을 따라 직각으로 솟은 절벽들이 파도치는 바다를 웅장하게 가로막고 있다. 슈트올은 바로 그 절벽 위에 지어진 도시였다.
고작 그것뿐이었다면 그저 신기한 곳에 세워져 있는 도시로 끝났겠지만, 슈트올 지형의 특이점은 더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 사이로 커다란 길이 나 있다. 마치 누군가 인공적으로 절벽 한가운데를 깎아낸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분명 자연적으로 난 길이었다. 그렇게 난 길은 슈트올 내부와 절벽 아래를 이어주고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길이 이어진 절벽 아래에는 다시 상당한 넓이의 땅덩이가 있었다.
그 땅덩이와 연결되어 있는 육지는 절벽에 난 길을 제외하면 오로지 절벽뿐. 나머지는 전부 바다였다.
슈트올 사람들은 그 땅덩이를 놀리지 않았다. 막대한 노동력을 들여 그 땅을 확장해 커다란 규모의 항만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역 중계지점으로서 부를 쌓았다. 그것이 바로 슈트올이 이만큼이나 커다란 대도시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지크의 설명을 들은 일행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절벽 아래 항만을 쳐다봤다.
많은 숫자의 사람과 물자들이 옮겨지고 여러 무역선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은 활기가 넘쳐 보였다.
지크는 손바닥을 한 번 쳐 일행의 시선을 모았다.
“자, 일단 숙소부터 찾는다. 본격적인 도시 관광은 그다음에 해라. 어차피 이 도시는 싫을 정도로 헤집고 다녀야 할 테니까.”
지크는 일행들을 이끌고 숙소를 잡았다.
여느 때처럼 그들은 꽤 비싼 숙소를 잡았다. 돈이야 이번에 받은 상금으로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았다.
지금껏 짐승 또는 몬스터들이나 나다닐 곳을 걷던 일행은 아늑한 숙소의 모습을 굉장히 환영했다.
그날은 바로 각자의 방에서 쉬어 여행의 노고를 풀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지크와 일행은 슈트올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도시 자체도 넓은 데다가 애초에 지크조차 자신들이 뭘 찾아야 할지 몰랐다.
클로원과 관계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뿐. 결국 로브 놈들의 흔적을 찾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원찮았다. 이곳은 로브 놈들이 활동을 하지 않는 곳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인지 목격 정보가 없었다.
“정말 여기에 뭔가가 있을까?”
며칠 허탕을 친 후, 지크의 방에 들어온 라일라가 푸념을 했다. 지크는 그녀에게 와인 한 잔을 따라주고는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모르지. 너나 나나 확신을 갖고 온 건 아니잖아. ‘있으면 좋고 없으면 어쩔 수 없고’란 마음으로 왔지.”
“그건 그렇지만.”
라일라는 와인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지크는 다시 그녀의 잔에 술을 채웠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라. 이곳만 희망인 것도 아니잖아.”
“비올루윈을 말하는 거지? 거긴 너무 위험해.”
“그래도 희망이 없는 것보다는 낫지.”
그건 그랬다. 라일라는 와인을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찾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어. 게으르게 움직이는 건 안 될 말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초조해할 필요도 없다. 너무 초조하게 움직였다간 봐야 할 걸 못 보고 지나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건 그렇네.”
“게다가 만약 내가 꾸던 꿈이 추측대로 우리가 기억 못 하는 회귀 전 상황이라면, 딱 그 장면을 본 것도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그러며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천천히 하자는 말은 못 하겠지만 하나하나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알았어.”
그 후, 지크와 라일라는 사소한 잡담을 나누며 간단하게 술자리를 이어갔다.
기분 탓일까. 그 모습을 지크가 방 한구석에 세워놓은 윈두르가 마치 빤히 지켜보는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지크와 라일라는 함께 항만 쪽으로 내려왔다.
항만은 북적였다. 부두 노동자들은 짐을 옮겼고 고기잡이를 다녀온 어선들이 물고기를 쏟아냈다.
간간이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라일라가 커다란 상선들이 정박해 있는 곳을 쳐다봤다.
“항만은 외부인 출입 금지인 모양이네.”
“아무래도 바쁠 테니까. 외부인들이 나돌아다니면 귀찮겠지. 귀중한 물건도 있을 테고.”
하지만 그 외에는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다.
지크와 라일라는 사방을 훑었다. 간간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부여잡고 로브를 입은 수상한 놈들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러나 건진 건 없었다.
“이만 돌아가자.”
지크가 노란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더니 말했다. 라일라도 별말 없이 수긍했다.
오늘도 어떤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품고 라일라가 지크의 뒤를 따라 슈트올로 올라가는 길을 향할 때였다.
휙!
라일라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노을빛을 반사해 황금빛 물결이 넘실대고 있는 바다에 꽂혔다.
“왜 그래?”
먼저 올라가던 지크가 라일라를 돌아봤다.
“아니, 뭔가 시선이 느껴진 것 같은데?”
“시선?”
지크는 라일라가 바라보는 곳을 쳐다봤다. 보이는 거라곤 망망대해. 간간이 바다를 가르는 배들이 전부다.
“아무것도 없다만.”
“넌 뭐 느낀 거 없어?”
“그래.”
“그럼 잘못 느낀 건가?”
기척을 탐지하는 건 지크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라일라다. 지크가 뭘 느끼지 못했다면 자신의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미안해. 착각했나봐.”
그러며 라일라는 지크를 지나쳐 다시 슈트올로 가는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크도 라일라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한번, 라일라가 쳐다본 곳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수상한 건 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의심을 남긴 채, 하지만 증거를 찾지 못해 지크도 바다에서 눈을 뗐다.
‘나중에 배를 빌려 라일라가 뭔가를 느꼈다는 곳을 찾아봐야겠어.’
그렇게 다짐하고 지크는 라일라를 따라 슈트올로 올라갔다.
둘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바다는 평온했다. 다만….
꼬르륵!
라일라가 바라봤던 지점에 얼마간의 거품이 일다가 사라졌다.
* * *
그날 밤. 라일라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방 안을 채운 건 안락한 어둠의 고요뿐.
그것은 아침이 되어 찬란한 햇빛이 뜰 때까지 쭉 유지될 것 같았다.
스르르.
굳게 닫힌 채 잠금장치까지 걸린 창문 아래로 뭔가가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건 물이었다. 비 오는 날 벽을 타고 내리는 빗물처럼 방바닥에 흘러내린 물은 점점 더 큰 웅덩이를 만들었다. 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바깥에서 빗소리는커녕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크기를 키운 물웅덩이는 그러나 신기하게도 일정 이상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다.
보통의 물과는 달리 주변에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위쪽으로 부피를 늘려갔다.
뚝!
외부에서 유입되는 물이 끊겼다. 창과 벽에는 물이 흐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축축하긴커녕 손으로 눌러보면 뽀송뽀송할 것같이 물기 하나 남지 않았다.
스으윽!
물웅덩이에서 물이 솟기 시작했다. 마치 의지를 가진 생명 같다. 물은 사람의 키만큼 솟더니 곧 형태를 꾸물꾸물 변화시켰다.
사지가 돋아나고 몸통이 생겼으며 얼굴의 형태가 잡히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남은 건 여인의 모습처럼 변한 물 덩어리였다.
철퍽!
그 물 덩어리는 라일라의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라일라는 주변 상황을 알지 못하는지 여전히 곤히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스윽!
물 덩어리가 고개를 수그린다. 눈이라고 짐작되는, 얼굴에 뻥 뚫린 두 개의 구멍을 라일라에게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