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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331화 (331/628)

제331화

그 글귀는 브뤼벨 시스템이란 단어가 등장한 직후 나온다.

물론 탁본을 띄엄띄엄했던 터라 두 글귀 사이에는 탁본을 뜨지 않은 다른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두 글귀의 간격이 짧은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그 글귀가 가리키는 것이 브뤼벨 시스템이란 추측은 충분히 현실성 있었다.

“이게 회귀의 한계를 적어 놓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래.”

지크의 말에 라일라가 긍정했다. 지크는 그 글귀를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그 한계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군.”

“그것도 그렇지. 횟수가 정해져 있는지, 회귀자에게 변화가 일어나는지,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부작용이 있는 건지.”

“그렌 제너드가 아닌 내가 회귀를 한 게 그 부작용일 수도 있을 거고.”

“가능성은 충분해.”

“흠.”

지크는 회귀의 한계에 대한 경고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글귀를 쳐다보다 다시 브뤼벨 시스템이란 단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게 회귀를 일으키는 무언가의 이름인가.’

그저 그 존재의 이름을 알았을 뿐, 브뤼벨 시스템이란 것의 정확한 실체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시스템이란 단어에서 지크는 떠오르는 게 있었다.

“라일라, 이 브뤼벨 시스템이란 것 말인데. 분명 네가 날 처음 만났을 때 너를 쫓던 놈들이 너를….”

“코어라고 불렀었지.”

라일라도 이미 같은 생각을 했던 듯 지크의 말을 끊으며 그 단어를 내뱉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안 좋아졌다. 자신이 어떤 시스템의 부품이라는 소리를 들은 인간 중 기분이 좋은 이가 얼마나 될까.

“예전에 봤었던 고깃덩이 괴물도 그렇고, 코어란 명칭도 그렇고. 아무래도 내 과거도 평범하진 않은 모양이야.”

애써 담담한 척 노력하는 그녀였지만 절로 기분이 저하되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만약 정말로 내가 회귀를 일으키는 시스템의 일부였다면, 내가 갖고 있는 지식들도 그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게 아닐지도 몰라.”

“몇 번이나 있었던 회귀 전의 기억이라는 거냐?”

“그럴 가능성이 높지.”

그리고 입술을 깨문다. 그녀의 심적 고뇌가 고스란히 보였다.

“걱정 마라.”

입을 꾸욱 다물고 형언할 수 없는 우울한 기분을 누르기 위해 노력하던 라일라에게 지크의 말이 들려왔다.

“네가 어떤 존재든 나한테는 그저 동료인 라일라일 뿐이니까.”

라일라가 지크를 쳐다봤다.

“내가 타인이 어떤 사람이든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

“…그래, 잘 알고 있어.”

“회귀 전에는 마인이라는 온갖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과도 어울리던 나다. 이제 와서 네가 어떤 존재로 판명나건 변할 것도 없어.”

“…아하하! 그것도 그렇네.”

라일라가 작게 웃었다.

“상냥하네, 지크. 아니, 상냥해진 건가?”

“착한 놈이라지 않냐. 이 정도는 해줘야지.”

지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마도 팀 플랫의 죽음 때문에 동료에 대한 생각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습을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보던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넌 회귀를 했다고 했지? 그러면 회귀 전까지 합하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오래 살아왔겠네? 어라? 그러면 아득히 연상인가? 존댓말을 붙여줄까?”

“필요 없어. 내가 철저하게 나이를 따지는 인간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제 와서 너한테 존댓말을 들어도 기쁘지 않아. 오히려 공포심이 일어날 거다.”

“하긴. 그리고 생각해보면 나도 몇 살인지 잘 모르고. 어쩌면 정말로 오래 살아왔을지도 모르니까.”

“할머니라고 불러주랴?”

“가만 안 둬.”

라일라가 주먹을 꽉 쥐고 흔들어 보였다.

“그럼 일단 해석으로 얻을 건 이것 정도인가.”

지크는 해석본들을 쭈욱 훑었다. 궁금하지도 않은 클로원 황제들의 업적이 마구잡이로 나열되어 있다.

“얻은 건 별로 없군.”

“그러게. 이제 어떡하지?”

본격적으로 클로원의 정체를 파헤치자고 결의한 건 좋았지만, 그 결의를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이 생각나지 않는다.

희망을 걸었던 클로원의 문자도 브뤼벨 시스템이라는 존재와 회귀의 한계 가능성 정도만 알아낼 수 있지 않았던가.

“비올루윈의 무덤에 다시 한번 가볼래? 무덤에 새겨져 있는 글자들을 전부 해독하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으음….”

라일라의 제안에 지크는 턱을 쓰다듬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아마 거기 새겨져 있는 글자 대부분이 황제의 업적일 테지만 다른 단서로 이어질 문자가 새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림자들과 석상들인데 말이야.”

거기 있는 모든 문자들을 탁본으로 만들지 못한 이유.

“어때, 지크. 지금이라면 감당할 수 있겠어?”

“그림자들은 어찌어찌 쳐 죽일 수 있다 해도 아직 석상은 무리다.”

“그러면 이 방법은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둬야겠네. 위험도가 너무 높아.”

하지만 그 이외의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지크와 라일라 모두 고민에 빠지자 방에는 깊은 적막이 감돌았다.

“…슈트올.”

“응?”

지크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라일라가 반응했다.

“슈트올? 그게 뭐야?”

“도시 이름이다. 꽤 커다란 도시지.”

“갑자기 도시 이름은 왜 꺼내? 설마 거기에 클로원의 단서가 있을 것 같아?”

기대를 담아 묻는 라일라에게 지크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기가 꺼려졌다.

슈트올은 지크가 종종 꾸는 그, 소름 끼치기 짝이 없는 ‘정의로운 지크’가 등장하는 꿈에서 언급됐던 도시였다.

‘마왕이 쓸어버렸다는 도시였지.’

지크도 자신이 꾸는 꿈에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꿈은 꿈이다.

그저 라일라에게 들은 용사 지크라는 미래 때문에 계속 꾸고 있는 악몽일 수도 있다.

“지크?”

라일라의 부름에 지크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아, 이건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말해 봐. 어차피 우리가 겪고 들은 일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정말로 사소한 거라도 좋아. 지금은 어떤 것이라도 단서가 필요하니까.”

“좋아.”

지크는 자신의 꿈 얘기를 했다. 정의감에 불타는 지크가 다른 일행들을 모아 여행을 하는 이야기를.

“그런 꿈을 꾸고 있었어?”

“그래. 처음에는 그냥 기분 더러운 개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어쩌면 뭔가 뜻이 있는 꿈이 아닐까 생각돼.”

“슈트올. 슈트올이라….”

라일라가 슈트올의 이름을 몇 번 되뇌었다.

“네 기억에 뭔가 짚이는 건 있냐?”

“아니, 없어.”

라일라는 아쉽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흥미롭긴 하네. 어쩌면 네가 회귀를 함으로써 지크 브레이브로서의 기억이 조금 깨어났는지도 몰라.”

“아, 젠장!”

“왜? 브레이브라는 성 때문에?”

라일라기 히죽 웃는다. 명백히 조롱의 웃음이지만 이번에 지크는 반박하지 못했다.

지크 브레이브라는 존재는 지크에게 정말로 천적 같은 존재였다.

“슈트올이 마왕에게 함락당한 도시라고 했지?”

“그래. 꿈속에서 그렇게 들었어.”

“지크가 브레이브인 시절의 마왕이라.”

지크는 마왕에 대한 설명도 라일라에게 말한 상태였다. 마왕의 능력과 외형적 특징. 그리고 지크가 가지고 있는 자그마한 의심까지.

“그 마왕이 나일 수도 있다는 거지?”

“적어도 내가 아는 인물 중 꿈속의 마왕의 특성을 전부 갖고 있는 존재는 너뿐이야. 회귀 전, 나와 같이 마왕이라 불린 인물들 중 그런 특성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어.”

“네 의심이 맞다면 처음으로 찾은 내 과거의 단서라는 거네.”

라일라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온갖 상상을 해온 라일라였지만 설마 마왕이란 명칭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지크가 브레이브였던 세계의 지크가 적대한 마왕이라니.

“뭐, 앞으로 더 단서를 찾아보면 확실해지겠지.”

라일라는 깊은 한숨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

“의외로 놀라지 않는군.”

“놀랐어. 그것도 무척.”

“그렇게 생각하기엔 반응이 너무 담담한데?”

“내가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내 과거에 대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한 줄 알아? 그중엔 엄청 끔찍한 것들도 수두룩해. 마왕 정도면 감지덕지지.”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게다가 마왕이라 불린 건 너도 마찬가지였잖아? 회귀 후에 잘 살고 있는 걸 눈앞에서 보고 있고. 그걸 생각하면 내 과거가 마왕이었어도 별 상관없을 것 같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네 말대로 이번엔 슈트올로 향해보자. 어차피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단서는 네가 말한 슈트올 아니면 비올루윈의 무덤뿐이니까.”

그렇게 일행의 다음 목적지가 결정됐다.

심각한 이야기가 끝나자 라일라가 눈을 빛내며 지크를 보챘다.

“그 꿈 얘기 좀 더 해봐. 지크 브레이브는 어떤 녀석이었어? 일행도 지금과 달랐다며.”

“이런, 젠장! 그딴 걸 왜 궁금해해!”

지크는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라일라는 끈질겼다.

“혹시 거기에 클로원의 단서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건 그저 내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클로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묻는 거야.”

“놀고 있네.”

“놀고 있든 싸우고 있든 어서 말해 봐. 일행 중에 누가 있었다고? 일단 성녀가 있었다는 건 확실히 들은 것 같은데.”

“네 기억을 잘 뒤져 봐. 용사였던 나도 네 기억에 있다며.”

“그 기억이 나면 내가 왜 너한테 묻겠어. 당연히 제대로 기억이 안 나니까 그런 거지.”

“아, 됐어. 그 녀석들은 클로원과 관련이 없어. 분명히 그럴 거야.”

그 이후로도 라일라는 어떻게든 꿈의 얘기를 듣고 싶어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고 지크는 질문을 피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길 얼마. 지크는 결국 라일라에게 꿈속 동료들에 대해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 * *

슈트올로 향한다는 계획을 내린 후, 지크 일행은 지체 없이 움직였다.

애초에 잔말피에 오래 머물렀던 이유가 라일라에게 클로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해독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던 만큼, 더 이상 이 도시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요하임과 이블린에게 떠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그들은 짐을 챙겼다. 다시 고된 일정이 시작될 테지만 한스와 스녹은 별 불만이 없었다.

지크가 없는 동안 그들은 잔말피에서 정말로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슬슬 휴식이 질리는 감이 있을 정도였다.

엘레나도 나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에서 많이 벗어났다.

다음 날, 지크 일행은 잔말피의 성문을 나섰다.

“언제 또 뵐 수 있을까요, 지크 님.”

배웅을 나온 요하임이 물었다. 그의 옆에는 이블린이 꼭 붙어 있었다.

“글쎄요. 저희가 워낙에 정처 없이 나도는 터라 확신을 할 순 없겠군요. 그래도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 또 만나지 않겠습니까.”

“하하! 꼭 그랬으면 좋겠군요.”

호탕하게 한 번 웃은 요하임은 고개를 숙였다.

“지크 님에겐 정말로 큰 은혜를 받았죠.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도 감사드려요.”

이블린도 옆에서 따라 고개를 숙였다.

“루즈 후작가에 사람은 언제 보내실 생각입니까?”

“벌써 보냈습니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썩 좋은 반응은 아닐 거라 예상합니다. 그래도 가능성이 보인 이상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요하임과 이블린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꽉 잡고 있는 손이 둘의 사랑을 그대로 드러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꼭 행복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럴 겁니다.”

둘은 악수를 나눴다. 일행끼리 작별 인사를 한 후, 지크 일행은 잔말피를 떠났다.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요하임과 이블린은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지크 일행은 새로운 목적지, 슈트올을 향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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