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0화
지크가 돌아온 날, 일행은 그의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다. 그곳엔 요하임과 이블린의 모습도 보였다.
이렇게 모여 술자리를 갖았을 때가 몇 번 있긴 했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평소보다 훨씬 더 떠들썩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지크 님!”
요하임이 지크에게 연신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그가 지크에게 과한 예를 차리는 건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꽤나 심했다.
그러나 요하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지크 님 덕분에 드라큘가가 훨씬 더 좋은 대접을 받게 될 것 같습니다!”
드라큘가의 위신 회복을 위해 지크에게 캠벨 후작령의 도적들 탐색을 부탁한 요하임이었지만 대단히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지크가 그 특유의 능력을 발휘해 도적단을 찾아내 캠벨 후작의 호감을 산다고 해도 딱 그 정도로만 끝날 거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 정도만으로도 지금의 드라큘가로서는 감지덕지였다.
하지만 이번에 지크가 세운 공은 그저 성가신 도적떼의 근거지를 찾는 정도가 아니었다.
캠벨 후작령 물류의 중심지인 벰비스가 커다란 타격을 입을 상황을 막아낸 것이다.
현재 캠벨 후작령의 상황을 생각하면 벰비스가 타격을 입었을 때 그 여파가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 미래를 지크가 끊어 놨다.
당연히 보고를 받은 캠벨 후작은 지크를 보내준 요하임에게 무척 고마워했다. 캠벨 후작에게 요하임을 소개시켜줬던 백작에게도 감사 편지가 왔다.
왕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는 후작에게 큰 은혜를 씌운 것이다. 당연히 그만큼 드라큘가의 위신도 회복했다.
“축하드립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물론 아직 예전의 명망을 회복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예상보다 회복시간이 훨씬 더 짧아질 건 확실합니다. 이젠 적어도 어디 가서 드라큘 백작이라고 자기소개를 하고도 눈치를 조금 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며 환하게 웃는다. 백작이라는 직위를 가진 자가 자기소개 때 눈치를 봐야 했다니. 선대 드라큘 백작의 업보의 크기를 새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 그리고 다른 소식도 있습니다.”
“그것도 좋은 소식입니까?”
“저 아니, 저희한테는요.”
요하임이 옆에 앉아있는 이블린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스르르 풀어진다.
자연스럽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블린도 마찬가지였다.
의미심장한 말 다음에 대놓고 보이는 상황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지크는 바보가 아니었다.
“혹시, 두 분?’
“맞습니다. 청혼했습니다. 이블린은 받아줬고요.”
루즈 영애란 호칭이 아닌 이블린의 이름을 직접 입에 담으며 요하임이 쑥스럽게 말했다.
“이것도 지크 님의 덕입니다. 솔직히 백작이라고 해도 거의 사교계에서 매장당한 가문이라 감히 후작가의 영애에게 청혼을 할 순 없었거든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이라면 최소한의 체면은 세울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이블린도 지크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곤 있었지만 요하임은 말 그대로 자신의 사정 때문에 감히 이블린에게 구혼을 할 수 없었다.
그건 이블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루즈 후작이 전 약혼자의 사건 때문에 이블린의 결혼 건에 대해 한 발 물러서 있다고 해도 결격 사유가 있는 귀족가와 인연을 맺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때문에 둘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거리를 지켜왔다.
하지만 지크가 해결한 이번 사건 덕에 최소한의 길이 보였다.
요하임이 입을 열었다.
“물론 힘들긴 할 겁니다. 루즈 후작가에선 당연히 탐탁지 않아 할 테죠. 하지만 다행히도 제게 나쁜 조건만 있는 건 아닙니다. 어찌됐든 백작이지 않습니까.”
보통 요하임 나이에 귀족 작위를 갖고 있는 자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귀족의 자제. 나아봐야 후계자다. 그리고 엄연히 작위 귀족과 후계자의 차이는 크다.
지크는 요하임과 이블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분명 두 분의 앞길은 험할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신 겁니까?”
요하임과 이블린은 서로를 마주봤다. 애정 가득한 시선이 섞여 들었다. 둘은 다시 지크를 쳐다봤다.
“예전처럼 길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비록 험하더라도 길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전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갈 겁니다. 혼자가 아니니까요.”
“저도 그래요.”
요하임과 이블린이 테이블 위로 손을 겹친다. 그 모습을 보고 지크는 방긋 웃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더 이상의 걱정은 불필요하겠군요. 두 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지크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꼭,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방금 지크가 한 말을 단순한 덕담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라일라는 달랐다.
‘다행이네.’
요하임과 이블린을 향해 하는 생각이 아니다. 그건 지크를 향한 말이었다.
팀 플랫을 죽이고 복잡한 감정을 품은 지크에게, 팀과 같이 그의 측근이었던 요하임과 이블린이 함께 행복을 찾는 모습은 분명 커다란 의미로 다가왔을 테니까.
그렇게 지크의 귀환과 더불어 새로운 연인의 탄생까지 축하하게 된 파티는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 * *
클로원의 정체를 파기 위한 지크와 라일라의 행동은 바로 시작됐다.
“네가 알고 있는 정보들을 알려 줘. 의심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도 좋아.”
라일라의 요청에 지크는 자신의 정보를 천천히 풀어냈다.
“그렌 제너드가?”
“그래. 지금 내가 가장 의심하고 있는 녀석이다.”
“그렌 제너드가 회귀, 그것도 여러 번 했을 수도 있다라.”
라일라가 방금 들은 정보를 되뇌었다.
“그런데 네가 겪은 과거는 녀석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나를 죽이기 전에 나보고 착하게 살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거든. 예전에 떠봤는데 녀석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어.”
라일라가 테이블을 검지로 툭툭 두들겼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회귀 전의 기억을 회귀한 사람 외의 사람들은 갖고 있지 못하듯, 네가 한 회귀의 기억은 오로지 회귀자인 너만 갖고 있다는 거야.”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그 회귀를 일으킨 게 네가 생각하는 바로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고, 그게 윈두르의 파편이었다고 했지?”
“그래, 손가락에 박혀 있었는데 언제 어떻게 누가 박았는지 전혀 기억나는 게 없어. 실물은 너도 본 적 있지?”
“응. 기억에 또렷해. 그 땐 네가 미쳐버린 줄 알았으니까.”
뜬금없이 자기 손가락을 잘라내는 모습에 기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자, 그럼 정리를 해보자. 이럴 땐 간단하게 키워드 몇 개로 압축해 보는 것도 좋아. 회귀, 운명을 비트는 열쇠, 윈두르, 그렌 제너드, 클로원, 비올루윈의 유적과 엘프 왕국에 있던 나무. 또 뭐가 있지?”
“로브 놈들의 조직.”
지크가 싸늘하게 말했다.
라일라가 팔짱을 끼었다.
“의심이 맞다면 그렌 제너드와 관련이 있겠지?”
“아마도.”
“그렌 제너드가 만든 조직일까?”
“흠!”
지크는 턱을 쓰다듬었다.
“녀석이 마음대로 회귀를 할 수 있다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냐. 말 그대로 미래를 아는 힘이니까. 밑바닥부터 만들진 않더라도,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조직 몇 개를 합친다든가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어.”
“하지만 어렵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 뿐이지.”
“그럼 그렌이 만든 게 아닐 수도 있단 거네.”
평범한 조직이 아니다. 개개인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지크는 무력보다 다른 쪽에 더 높은 평가를 줬다.
‘세뇌.’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정보를 발설하지 않는 그런 꼭두각시들을 키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원래 암약하고 있던 조직을 그렌이 빼앗은 것일 수도 있어. 회귀를 무한히 할 수 있다면 가능하겠지.”
“그거 말인데, 지크.”
라일라가 자신의 마법 상자에서 상당한 양의 종이들을 꺼냈다 그 곳에는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빽빽하게 쓰여 있었다.
“내가 해석 작업의 결과에 대한 얘기는 안 했었지?”
“안 그래도 이 자리에서 들으려고 했어. 어땠지?”
“일단 무덤에서 갖고 온 탁본들은 전부 해석을 했어.”
지크가 눈을 빛냈다.
“역시 대단하군.”
“엘프들에게 받아온 장서가 큰 도움이 됐어. 이런 건 단서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라일라는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절대 쉬운 것이 아니다.
엘프 왕국에서 받아온 단서라고 해봐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책들을 챙겨온 것에 불과하다.
그 책들 중 얼마나 해석에 도움이 될지는 모른다. 최악으론 단 한 권의 책도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설령 운이 좋아 대부분의 책이 작업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일단 그 양이다. 분류만으로도 시간을 엄청나게 잡아먹을 게 뻔했다.
‘역시 이 녀석은 괴물이야.’
지식도 마법도 그렇다.
자신에 비할 바 있는 인물은 없다며, 그 그렌 제너드조차 순수한 실력으로는 자기 아래로 깔아보는 지크다. 그러나 라일라에 대한 평가는 달랐다.
‘이 녀석은 제대로 성장만 하면 나와 맞먹을 수도 있겠어.’
이 쯤 되면 지크도 라일라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일단 말해둘게, 지크. 기대를 무척이나 낮추는 게 좋아.”
“대단한 건 쓰여 있지 않은 모양이지?”
“적어도 그 거대 석상들에게 쫓기며 모은 정보라기엔 초라한 게 사실이야.”
라일라는 종이 몇 개를 들어 지크의 앞으로 밀었다. 아름답고 유려한 글씨가 종이에 오밀조밀 적혀 있었다.
지크는 가볍게 그 글자들을 훑었다.
“대부분은 업적들이군.”
‘어떤 황제께서 주변 나라를 병합했다’, ‘어떤 황제께서 몬스터를 제압하셨다’ 같은, 황제의 업적들이 적혀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거기가 정말로 클로원 황제들의 무덤이라면 그들이 세운 업적들을 새겨 넣는 건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학자들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지크와 라일라가 바라는 정보는 이것들이 아니었다.
“솔직히 해석하면서도 상당히 아쉬웠어. 알고 싶던 건 이런 업적들이 아니니까.”
“그래도 고생했다.”
입을 삐죽이는 라일라를 지크는 위로했다.
“하지만 완전히 헛고생은 아니었어.”
“그런 것 같더군.”
그저 황제들의 업적을 무의미하게 늘어놓은 문자들 중에서도 지크의 흥미를 끄는 글귀가 있었다.
아마도 초대 황제, 일명 황금 황제라 칭해진 자의 무덤에 새겨져 있었던 것 같은 글귀.
지크는 그 글귀를 천천히 입에 담았다.
“초대 황제가 만들었다는 제국 힘의 근원, ‘브뤼벨 시스템’이라….”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엘프들의 서적 몇 개를 번역해 클로원이란 제국에 대해 조금 알아봤어. 해석 한 양이 얼마 안 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내가 찾아낸 제국의 황제들은 전부 엄청난 업적과 능력들을 보유했어. 그런데 정말 그게 가능할까? 한 가문에서 대대로 계속 그런 천재들이 나오는 게 말이야.”
“황제라는 직위가 핏줄이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이 맡는 자리였을 가능성은?”
“몇몇 황제들 사이에서 혈연관계가 있다는 기록이 있었어. 물론 그것만으로 황제 전부가 혈연관계가 있다고 주장할 순 없지만.”
“제국이라는 시스템 상 당연히 혈연관계였을 가능성이 크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설을 세워봤어. 이 브뤼벨 시스템이란 건 말 그대로 회귀를 가능하게 하는 거고, 황제들은 전부 회귀를 사용해서 제국을 이끌어갔다고.”
“일리 있군. 아무리 멍청이라도 회귀라는 힘이 있다면 충분히 유능한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을 테니까. 회귀를 여러 번 할 수 있다면 더더욱.”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클로원은 망해버렸잖아. 설마 회귀라는 힘을 가지고도 제국을 무너뜨린 멍청이가 있었던 건가?”
“바로 그거야.”
라일라가 손가락을 세웠다.
“대단한 회귀의 힘이라도 결국 한계가 있었던 게 아닐까?”
라일라가 일어나 상체를 숙여 지크의 앞에 있는 종이 한 부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기억 나? 내가 가장 먼저 해석한 글귀야.”
“…그래. 기억난다.”
지크는 그 글귀를 의미심장하게 내려다봤다.
[절대로 너무 많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