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9화
라일라가 침묵했다. 지크도 말을 걸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이 만난 후 가장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라일라가 고개를 위로 들어 천장에 시선을 뒀다가 다시 고개를 떨군다. 머리를 부여잡고 몇 번 흔들더니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쉰다.
절대로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그녀의 행동을 지크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내가 착한 놈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거겠지.’
지크 자신도 벰비스에서 쉴 때 했던 일이다. 그리고 실패했었다.
팀의 말대로 회귀 후 자신의 행적을 곰곰이 살펴보니, 외부에서 볼 때는 이건 뭐 용사가 따로 없었다.
그 생각이 든 즉시 헛구역질을 했다. 고민 때문에 끼니를 얼마 거르지 않았다면 진짜 토악질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때문에 지크는 라일라를 응원했다.
‘자, 열심히 생각해! 내가 착한 놈이란 게 말이 되냐! 어서 나쁜 놈이란 증거를 찾아서 내게 보여줘!’
자신은 실패했지만 라일라라면 다를지 모른다. 천재 마법사인 라일라라면 분명…!
“하, 하하, 하!”
라일라의 입에서 기괴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응, 그래, 착…한 사…람 지…크….”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내뱉는 노파 같다. 이대로 있다가는 라일라의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지크는 그녀와 같은 고통을 느낀 선배로서 그녀를 구원할 의지를 가졌다.
“라일라.”
“으, 응?”
“우리 그 화제에 대해서 잠시 생각을 멈추도록 하자.”
대적할 수 없다면 도망치는 것도 훌륭한 전술이다.
라일라는 필사의 각오를 가진 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차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시간을 가지는 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라일라가 옅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아, 갑자기 엄청난 말을 들어서 일순 정신이 나갔었어.”
“그렇지. 나도 동의해.”
지크가 딱 저런 꼴이었다. 게다가 지크는 라일라처럼 진정하라고 멈춰 줄 사람조차 없었다.
“뭐, 확실히 팀 플랫의 의견에 설득력이 있는 건 사실이야. 아마 많은 사람들은 널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몇몇은 아예 영웅이라고 일컫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지크가 해온 일은 그런 일이다.
“물론 팀 특유의 과장도 있었을 거야. 완전한 악당인 그가 보기에 너는 그저 툴툴대는 선인으로 보였을지도 몰라.”
“그놈도 원래는 착한 놈이었다네. 요하임, 이블린과 같아.”
“타락한 거야?”
“그래, 로브 놈들한테. 아마 이번 사태의 조언도 로브 놈들에게 들은 것 같고.”
“늦었던 거구나.”
라일라는 사태의 파악을 완전히 할 수 있었다.
“정말로 유감이야.”
“내가 이 길을 걷는 순간 거칠 수도 있던 과정이었어. 실제로 요하임이나 이블린을 만났을 때, 일이 잘못된다면 죽일 각오도 하고 있었고. 그게 팀의 차례에 이루어진 것뿐이지.”
“그래.”
그걸로 팀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해봤자 기분만 우울해질 뿐.
라일라는 테이블에 엎드렸다. 팔을 베개 삼아 얼굴을 받치고 지크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지크가 착한 사람이라…. 재미있는 의견이었어.”
“이제 그만해라. 솔직히 착한 사람, 착한 사람 말을 들을 때마다 위가 요동을 친다고.”
“사고방식을 조금만 더 고치면 완벽할 것 같은데. 적을 대할 때 괴롭힘도 좀 줄이면 더더욱 좋고.”
지크는 진저리를 치며 손을 휘저었다.
라일라가 일어섰다.
“좋아, 상담은 이걸로 끝이지? 이번에야말로 바깥에 나가서 기분 전환을….”
“아니, 아직이야. 아직 할 말이 남았어.”
“또 뭔데?”
자신의 의도가 두 번이나 방해받자 라일라가 볼을 부풀렸다.
“미래의 지식에 관한 일이야.”
“미래의 지식?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의 지식에 대한 정체를 말하는 거야? 그거야 아직 우리도 모르는….”
“나는 미래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게 아냐. 정확히 말하면 미래에서 회귀를 한 거지.”
라일라가 눈을 깜박였다.
* * *
지크는 라일라에게 자신의 회귀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꺼냈다.
묵묵히 듣고 있던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정리하자면 너는 나처럼 그저 미래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그 미래에 직접 살았단 말이지?”
“그래.”
“그렌 제너드와 그 일행에게 패배하고 죽기 직전에 ‘운명을 비트는 열쇠’라는 걸로 반격했고.”
“맞아.”
“그리고 일어나보니 집을 나가기 전 백작가에서 깨어났다는 거지? 젊은 모습으로.”
“정확해.”
“…….”
라일라는 입을 꾹 닫았다. 험한 눈초리가 지크를 직시한다.
분노와 배신감이 섞여 든 그 눈빛은 그녀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지 보여줬다.
“…날 속였던 거네. 지금까지 계속.”
“그 점에 관해선 미안하다.”
지크는 별다른 변명 없이 고개를 숙였다. 라일라는 눈을 몇 번 깜박여 험악한 시선을 지웠다. 그러나 불쾌감이 잔뜩 묻어난 얼굴은 여전했다.
“일단 정보의 확인을 떠나서, 왜 말할 생각이 들었어?”
“첫째, 내가 이 정보를 너에게 숨긴 건 널 믿을 수 없어서였다. 우리 첫 만남도 그리 좋지는 못했잖아? 너도 날 사사건건 의심했었고.”
“그럼 지금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
라일라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러다 곧, 다시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아까의 박력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풀린 아이가 마치 자신은 아직 토라져 있다고 주장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둘째, 회귀라는 개념이 클로원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으니까.”
“팀의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녀석을 죽인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분이 더러운 것도 사실이지. 누군가 내 길을 조종했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보다 기분이 더 더러워. 당연히 내게 더러운 기분을 들게 만든 놈들을 족쳐야지.”
“로브 놈들 말이구나.”
“지금까지는 걸리면 쳐 죽인다는 방식으로 움직였지만 이젠 아니야. 그놈들을 쳐 죽이는 게 내 1순위 목표다. 물론 그냥 쳐 죽이지는 않을 거야.”
지크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놈들의 목적을 알아내고 최대한 짓밟아줘야지. 놈들의 눈앞에서 친절하게 말이야.”
‘역시 착한 녀석이 아니야.’
라일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은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다른 마인들을 찾아서 매복할까 생각도 했지만 나도 마인들이 어디서 어떻게 등장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니까. 놈들이 마인을 타락시키는 시기도 모르고. 무엇보다 그놈들은 잡는다 해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아. 죽이고 죽이고 죽여도 단순한 소모전이 될 뿐이야. 꼬리를 백날 족쳐봐야 대가리가 살아 있으면 의미가 없지.”
“그렇긴 하지.”
“그래서 말인데, 문자의 해독 작업은 어떻지? 성과는 있나?”
“글쎄.”
모호한 말이 튀어나왔다. 턱을 괴고 뚱한 표정이 누가 봐도 토라진 표정이다. 아무래도 지크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화가 덜 풀린 모양이었다.
지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화를 내거나 윽박지르지 않네?”
“나도 그럴 시기와 상대는 가려.”
“그래?”
하지만 그래도 생각 이상으로 지크가 얌전했다. 아무리 부드럽게 나와도 적어도 불쾌감만은 표할 줄 알았는데.
‘나를 속였다는 죄책감 때문에 숙이고 들어오는 건가?’
하지만 지크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뭔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때 라일라의 머리로 팀의 죽음이 스쳐 지나갔다.
‘예전 동료였던 팀을 죽여서 동료에 대한 중요도가 커진 건가?’
꽤 그럴 듯한 가설이었다.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라일라의 마음이 조금 더 풀어졌다. 정말로 지크가 자신을 동료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지크.”
“왜?”
“말이 나온 김에 나도 솔직히 말할게. 네가 회귀를 했다는 말에 난 네가 생각한 이상으로 충격을 받았어. 지금까지는 적어도 나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또 한 명이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지크는 곧 라일라의 말을 이해했다.
라일라의 정체는 자신도 모른다. 게다가 그녀와 관련이 있는, 괴상한 괴물까지 목격한 상황.
당연히 본능적인 불안감이 들 수밖에 없다. 라일라 정도면 굉장히 잘 참고 있는 것이다.
그런 라일라에게 지크 자신이란 존재는 상당히 큰 위안이 되고 있던 모양이다.
자기와 똑같이 정체 모를 미래의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말이다.
하지만 지크의 고백은 라일라의 그 위안을 완벽히 박살내는 말이었다.
“…확실히 충격이 컸겠군.”
“그래, 커.”
“미안하다.”
“천하의 지크에게 연속으로 미안하단 말을 듣다니. 나도 꽤나 대단한 업적을 세웠네.”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사과를 받자고 이 말을 한 게 아냐. 생각해보면 우리는 꽤나 비정상적으로 뭉쳤어. 오해였긴 하지만 서로 적대 관계로 만났고, 동행하게 된 것도 서로를 동료로 인정해서가 아니었지.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서였고 서로 간의 신뢰도 전혀 없었어. 솔직히 알게 모르게 서로 간의 정체에 대해 파며 끊임없이 견제했잖아?”
“그랬지.”
“생각해보면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야.”
“꽤 많은 일이 있었던 때문이지.”
“맞아.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지.”
둘이 만난 후 시간은 그렇게 많이 지나지 않았지만 겪은 사건들은 무척이나 많다.
“하지만 그 사건들 덕에 서로를 신뢰하게 됐어. 아니, 난 적어도 지크 널 신뢰하고 있어. 그리고 너도 어느 정도 날 신뢰하게 됐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네 비밀을 털어놨겠지.”
“의외로 내가 회귀를 했다는 건 금방 믿는군.”
“미래의 지식을 갖고 있는 내가 있는데 회귀는 믿지 않는다고? 오히려 그게 더 웃기지.”
“그것도 그렇군.”
“그러니까 지크. 오늘을 기점으로 서로 간에 관계를 다시 설정하자. 네가 원하는 건 대략적으로 클로원의 정체와 그로 인해 알게 될 가능성이 있는 로브 놈들의 정체. 그리고 결정적으로 로브 놈들을 엿 먹이는 거지?”
“그래. 그런 넌 네 과거와 정체에 대해 아는 거고.”
“맞아.”
그래도 같이 여행을 다닌 동료로서 상대가 뭘 원하는지는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의 목표는 높은 확률로 해결 방법이 같아.”
“클로원의 정체를 파는 것 말이지.”
“응.”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게 잘된 건지도 몰라. 지금까지처럼 두루뭉술한 관계를 청산하고 완벽한 협력 관계를 맺을 수도 있으니까. 넌 어떻게 생각해?”
라일라의 맑은 눈망울이 지크에게 향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 당당한 언변과는 달리 그녀의 눈동자는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절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지크가 라일라의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둘의 관계는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라일라에게 상당히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지금 라일라와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이 바로 지크였으니까.
지크는 라일라의 눈동자를 마주봤다. 분명 가벼운 불안감이 보이긴 하지만, 당당하고 아름답다.
지크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툭하면 짓는 비틀리거나 비뚤어진 조소가 아닌, 잔잔한 미소였다.
“새삼스럽지만, 앞으로 잘 부탁한다, 라일라.”
그러며 라일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일라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의 손이 지크의 손을 꽉 잡았다.
“응, 잘 부탁해, 지크!”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