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8화
동이 텄다. 오늘도 변함없이 하늘 높이 뜬 해는 도시 요소요소를 비췄다.
어제까지 비춰진 일상이란 그저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직까지 작게 연기를 피워내는 잿더미들이 보인다. 대문이 산산이 부서진 여러 상회들과 근처 거리에 수많은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주변에 잔뜩 튄 핏자국들은 덤이었다.
그러나 간밤에 분명 변고가 있던 게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그 수습을 하고 있는 자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밝았다.
피해는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승리했다. 그리고 그 피해도 그리 크지 않았다.
기물은 좀 많이 부서졌지만, 감쪽같이 성 밖으로 유인했다고 생각한 병사들이 일시에 들이닥치자 도적들은 당황해 제대로 싸울 생각조차 않고 겁에 질려 도망 다니기 바빴다.
때문에 도적들의 본거지를 칠 때보다 인적피해가 훨씬 덜했다.
물론 도적들이 도시 내부를 습격한 사건인지라 그 충격은 제법 컸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시민들의 반응은 복잡했다.
도시의 안정을 위해 벰비스가 도적들을 소탕했다는 정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기에 일단 사람들은 안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벽 밖에서나 걱정했을 도적들이 도시 안까지 숨어 들어왔다는 사실에 다시 겁을 먹었다.
도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대대적으로 도시 내부를 뒤집어엎었다.
이번 사건들과 관련된 관료와 상인 그리고 여타의 관계자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승리했다곤 하더라도 도적들에게 도시 내부 습격을 허락한 건 엄연한 수치다.
아마 잡혀 들어간 자들이 멀쩡히 살아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게 벰비스는 제 기능을 서서히 되찾아갔다.
그 사이 지크는 편히 휴식을 취했다. 벰비스에서는 엄청나게 지크의 편의를 봐줬다.
이번 사태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이가 바로 지크였으니 그 대우는 당연했다.
지크도 거부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해진 터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으니 그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수습이 얼추 끝난 후, 지크는 도시에서 많은 포상을 받았다.
임관 권유까지 받았지만 지크는 거절하고는 벰비스를 떠났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는 일행이 있는 잔말피로 되돌아 왔다.
지크는 자신이 머물렀던 숙소 앞에 섰다. 아직까지 그의 동료들은 여기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동료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지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왜 오자마자 한숨부터 쉬고 있어?”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지크는 뒤를 돌아봤다. 동그랗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일라였다. 잠시 외출을 하고 온 모양이다. 그녀의 옆에 엘레나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야.”
지크의 인사에 라일라가 대꾸했다. 옆에 있던 엘레나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라일라는 지크를 위아래로 쭈욱 훑었다.
“다친 덴 없어 보이네.”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놈으로 보이냐?”
“모르지. 웬 뜬금없는 놈에게 얻어터지고서는 엄마 부르며 질질 짰을지.”
“풉!”
상상을 했는지 옆에서 엘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스나 스녹이라면 상상도 못 할 행위지만 그녀의 입장은 라일라의 제자다.
잠시 고된 훈련을 받은 적은 있지만 그 둘처럼 감히 범접하지도 못 할 절대적 공포처럼 대하진 않았다.
그러나 아예 눈치를 안 보는 것도 아니다. 엘레나는 급히 입을 손으로 막고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엘레나도 내 말에 동의하나보네.”
“그래, 좋을 대로 말해라.”
지크가 손을 내저었다.
지크와 라일라는 숙소로 들어갔다. 엘레나는 스녹과 약속이 있다며 숙소 앞에서 헤어졌다.
“요하임에게 들었어. 그쪽에서 엄청 활약을 했다며? 그가 무척이나 기뻐했어. 자세한 걸 물어보진 않았지만 드라큘 가문의 명예 회복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 모양이야.”
“…그래?”
요하임의 이름이 나오자 지크의 답변이 한 박자 느렸다.
“거기서 뭔 일 있었어? 뭔가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티가 나나?”
“엄청.”
라일라의 확신에 찬 말에 지크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져봤다.
정말로 티가 날 정도로 자신이 표정을 숨기지 못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라일라의 눈치가 빠른 것일까.
‘제법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지크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벰비스에서 팀을 만났다.”
“팀?”
“웨어울프 팀 플랫. 요하임, 이블린처럼 미래에 내 측근이 될 녀석이야.”
“아!”
생각났다는 듯 라일라가 탄성을 흘렸다.
“어쩜, 우연찮게도 잘 만났네. 반가웠겠다.”
“굉장히 반가웠지.”
“목소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요하임이나 이블린처럼 그 녀석도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녀석이었어?”
“아니, 그 녀석은 요하임, 이블린과는 달랐어. 완전히 우리가 아는 그런 녀석이었지.”
기억나는 팀의 성격을 떠올리고 라일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녀석 성격, 네 측근들 중에서도 가장 개차반 아니었어?”
“맞아. 그래서 나와 가장 죽이 잘 맞는 놈이기도 했었고.”
그 말만으로도 어떤 녀석인지 알 수 있다. 라일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같이 안 왔어?”
“안 왔어.”
“아, 하긴. 넌 측근을 모으고 있는 게 아니니까.”
미래의 지식으로 지크와 측근 간의 인연이 무척이나 깊은 걸 알고 있다.
지금도 요하임, 이블린과는 준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만큼 당연히 이번에 만난 팀도 데려왔겠지 하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녀석, 방치해 놔도 괜찮아? 요하임, 이블린과는 달리 그 더러운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며. 그러다 녀석들과는 다르게 마인이 되는 것 아니야?”
“이미 마인 일보 직전인 놈이었다. 그리고 이번 산적 사건에도 엮여있었고.”
그쯤 되자 라일라도 지크의 기분이 안 좋은 것이 팀과 연관되어 있다는 걸 슬슬 알아차렸다.
그녀가 지크의 눈치를 힐끔 봤다.
“…어떻게 됐어?”
“죽였다.”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그 한 마디는, 라일라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아무리 미래의 일이라지만 지크가 자신의 측근이 될 사람들에게 상당히 무르다는 건 요하임, 이블린의 건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마 팀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터. 한데 그를 죽였다니.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라일라는 지크의 팔을 붙잡고 그의 방으로 이끌었다.
지크의 숙소는 떠났을 때 그대로였다. 도시의 은인인 데다가 이번 임무도 엄밀히 말하면 도시가 속한 영지의 백작의 의뢰였기에 비용은 벰비스가 대고 있었다.
라일라는 지크를 의자에 앉히고 차 두 잔을 타왔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과 함께 향긋한 다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뭐냐, 네가 내게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접하다니. 내일은 해가 서 쪽에서 뜨는 건가?”
“아쉽게도 그런 기적은 나에게도 무리야. 차 정도는 마시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대접해 줄 수 있어.”
“태연하게 거짓말은. 귀찮다고 찻잔이나 던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며 얄밉게 웃는 지크에게 라일라는 정말로 눈앞에 있는 잔을 던지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휩싸였다. 잔 안에 있는 뜨거운 차는 덤이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경쾌한 어조로 하는 빈정거림과 얄미운 웃음소리는 분명 평소의 지크의 모습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슬퍼?”
밑도 끝도 없는 질문. 하지만 질문을 던진 라일라도 질문을 받은 지크도 질문의 의도를 헷갈리지 않았다. 지크는 찻잔의 손잡이를 엄지로 스윽 쓸었다.
“슬프다라. 부정할 수는 없군.”
“아무리 너라도 소중한 인연 하나가 끊어져 나간 거니까. 별수 없을 거야.”
“위로해주는 건가?”
“당연하지. 난 너만큼 비뚤어져 있지 않아. 이래봬도 동료의 슬픔 정도는 헤아려준다고.”
“그거 고맙군.”
예전의 동료를 하나 매장하고 온 지금, 라일라가 이야기한 동료라는 말에 색다른 느낌을 받은 건 아무리 지크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장례는?”
“나 혼자 간단하게 치렀어. 화장해서 근처 강에 뿌렸다.”
한데 수습되어 쓰레기처럼 취급되던 도적들의 시체들 속에서 팀의 시체만 몰래 빼내는 것에 손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두기에도 입이 썼다.
“그랬구나.”
라일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잠시 방 안은 차를 홀짝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라일라는 지크의 눈치를 봤다. 물어보기 무척 껄끄럽지만, 그래도 이건 물어야 했다.
“왜 죽였어?”
지크는 찻잔을 내려놨다. 라일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크가 크게 화를 내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심기를 건드릴 가능성도 높았다.
다행히 돌아온 어조는 침착했다.
“나쁜 짓을 하려고 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착한 일을 하려는 놈이니까, 막아야지.”
“그래.”
마치 지크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라일라가 다시 조용히 답했다. 하지만 솔직히 라일라로서는 지금의 상황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은 지크가 마왕의 길을 걷는 것.
최근 지크가 다시 마왕의 길로 내달릴 만할 계기도 있어 그 걱정은 더 커진 상황이다.
다행히 자신의 부탁을 지크가 받아들여 지금은 조용하지만, 그가 언제 마왕의 길로 빠질지 알 수 없었다.
한데, 그 지크가 팀을 죽이고 왔다. 미래의 측근 중에서도 지크와 가장 마음이 맞았던 자를.
‘팀이라는 존재인 걸 알고도 나쁜 짓을 하려 했기 때문에 죽였어.’
그 말은 곧, 지크가 팀이라는 소중한 존재를 죽이면서까지 착한 일을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마왕의 길과는 확연하게 다른 길이다.
라일라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신의 과거와 더불어 그녀의 가슴을 짓누르던 걱정 중 하나가 누그러진 것이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팀에 대한 호의가 마구 솟구칠 정도였다.
‘게다가 지크가 이렇게 감성적이라니.’
과거에 인연을 맺은 것도 아니고 ‘미래에 그렇게 될지도 모를 사람’일 뿐이다. 한데, 그런 팀을 죽인 정도로 지크는 그녀가 보기에 처음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물론 지크가 회귀를 한 걸 모르는 라일라의 자그마한 착각이었지만, 어쨌든 마왕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좋아!”
라일라가 테이블을 크게 내려쳤다.
“꿀꿀한 일을 달래려면 무언가 다른 일을 하는 게 좋지! 나가자! 내가 에스코트 해줄게!”
라일라가 환하게 웃으며 지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로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다면 백이면 백 반해버릴 아름다운 미소다.
지크는 그녀가 내민 손을 보다가 라일라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 아직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
“어? 아직?”
팀의 죽음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지크가 상담이라니.
‘이건 상당히 중증일지도 몰라.’
라일라는 조금 전보다 더 마음을 굳게 먹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인데?”
“혹시 말이다. 나 착한 놈이냐?”
“뭐 잘못 먹었어?”
소중한 인연을 스스로 죽인 것에 더해 자신에게 상담까지 청하는 지크의 모습에 더 마음을 쓰려던 라일라의 의지는 진짜였다.
그러나 지크의 질문에 바로 그런 대답이 튀어나오는 걸 라일라도 막을 수 없었다.
“팀이 말이다….”
지크는 팀이 죽기 전에 한 말을 그대로 읊어줬다.
눈앞에서 대마왕이 개미핥기의 발톱에 살해당한 것 같은 표정을 했던 라일라의 얼굴이 서서히 변해갔다.
“어… 그러니까….”
라일라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저 상태를 지크는 잘 알았다. 자신도 겪은 길이니까.
“지크가 정말로… 착한 사람? 아니, 하지만 위선자라는 개념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아니, 싫은 일을 받아들여야 할 때의 사람이 취하는 행동. 일종의 자기방어.
“아니, 위선자는 앞에서는 착한 척해도 뒤에서는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니까 이번 경우랑은 달라.”
혼자 중얼중얼 거리는 모습은 라일라의 미모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기분 나빴지만 지금 라일라에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확실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지. 그리고 지크가 한 일도 분명 착한 일이야. 나쁜 놈들에게 정도 이상의 폭력을 가한 적은 있지만 어쨌든 그놈들은 나쁜 놈들이니까.”
라일라가 고개를 들어 지크를 쳐다봤다. 그 모습은, 말하자면 어린 아이가 던진 돌에 얼굴을 정통으로 가격당하기 직전 개구리가 할 만한 얼굴 같았다.
“어라? 정말로… 지크는… 착한… 사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