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1화
그건 일단의 군사들이었다. 말을 탄 기병들이 앞서가고 그 뒤에서 보병들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들을 반짝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지휘했다.
성문을 활짝 열고 진군하는 폼이 전장에라도 가는 것 같다.
“뭐야? 군대가 왜 움직여? 전쟁이라도 났나?”
“또 도적들이 난리 친 거 아냐?”
“이런, 빌어먹을! 또?”
불안에 잠긴 시민들이 술렁거린다. 하지만 그 사이로 옅은 기대감도 표출됐다.
“혹시 도적놈들 근거지를 발견한 거 아닐까?”
“진짜?”
“그렇지 않다면 군사들이 저렇게 대규모로 움직일 이유가 없잖아. 지금까지 도적들의 습격이 있었을 때도 저만큼 많은 군사들이 움직인 적은 없었다고.”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시민들은 성 밖으로 나가는 군대를 바라봤다.
그러나 지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정도 규모의 병사들이 빠져나간다면 벰비스의 방비는 더욱 취약해질 거야.’
도적들의 계략일 것이다. 아마도 일부러 근거지일 것 같은 곳을 노출시켜 군대를 유인한 것 아닐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크는 도적들의 습격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했다.
‘나도 슬슬 결정을 내려야겠군.’
지크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그날 밤. 팀이 지크를 찾아왔다. 그는 척 보기에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적들의 습격 날짜를 알아 왔어.”
“정말이야?”
“그래. 확실해. 정보 찾다가 진짜로 목이 날아가는 줄 알았다니까.”
팀이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래도 위험을 감수한 보람은 있었으니 다행이지.”
“언제야?”
지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일.”
“…갑작스럽군.”
“알아낸 나도 기겁했어.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지. 하루라도 빨리 알아낸 게 어디야.”
“그건 그렇지.”
지크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그곳에는 돈과 작은 보석 몇 개가 들어 있었다.
“가져가. 의뢰비야.”
지크가 주머니를 건넸다.
“더 이상 경비를 줄 필요는 없겠지? 아니면 더 알아낼 수 있는 정보라도 있어?”
“아니, 없어. 의뢰비만으로 충분해.”
“의외로군. 너라면 다른 정보를 더 알아낼 가능성이 있다면서 무조건 요구할 줄 알았는데.”
“난 그렇게 양심이 터진 놈이 아니야.”
“아니었어?”
정말로 놀랐다는 표정을 지크가 얼굴 가득 드러냈다.
“아니, 아니. 내가 아는 팀 플랫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 이 자식! 알고 보니 팀이 아니구나! 그 양아치 자식은 어디다 뒀어!”
“진짜 아니야, 이 개자식아!”
팀이 지크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딴 놈은 몰라도 친구 놈한테 그렇게까지 뜯어먹을 생각은 안 해!”
“어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 자식은 제 놈을 위해줘도!”
“아니, 이건 정말로 놀라서 그래. 정말로 친구라고 생각해주고 있던 거냐?”
“그래, 이 자식아!”
부끄러운지 팀은 평소보다 더 거칠게 말했다. 으르렁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것 같아, 지크는 더 이상 놀려먹지 않았다.
“이제 어쩔 거냐?”
한동안 지크를 노려보던 팀이 안색을 굳히고 심각하게 물었다.
“넌 도적놈들을 조지는 게 목적이라며? 놈들의 근거지는 알아내지 못 했지만 놈들이 언제 어디를 습격할지는 알았으니, 조지려면 그때가 가장 적기일 거야.”
“그렇겠지.”
“노릴 거냐?”
“내가 혼자서 도적놈들을 감당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내숭 떨지 마. 실제로 실력 발휘하는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네가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지크가 피식 웃었다.
“뭐, 그렇긴 하지. 너한테 들었던 규모 정도면 충분히 나 혼자 상대하고도 남아.”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그 도적단의 규모는 정말이겠지?”
“당연하지! 그것도 내가 어렵게 알아낸 정보라고!”
팀이 큰소리를 치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지크는 마치 농담 따먹기라도 하듯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진짜 맞지? 다른 상회를 습격할 도적이 더 있다느니 그런 건 아니겠지?”
“확실해, 인마! 도적놈들의 규모는 내가 말한 대로고, 목표도 드미로 상회 하나뿐이야!”
“좋아, 믿는다.”
그렇게 말하고 지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술 한잔하고 싶지만 오늘은 슬슬 돌아가라. 나도 준비를 해야 하거든.”
“오냐. 알았다.”
팀도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지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행운을 빌지, 친구.”
“고맙다, 친구.”
지크는 그 손을 맞잡았다.
팀이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고는 방을 나갔다.
‘친구라….’
지크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친구’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그 녀석, 그 말을 할 때엔 검지를 움직이지 않았지.’
그 말은 곧, 팀이 지크를 친구라고 생각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란 뜻이다.
‘큭큭! 그 개양아치 자식이 만난 지 며칠만에 정말로 친구라고 생각할 정도로 마음에 들다니. 내 쓰레기 같은 성격도 많이 변하진 않은 모양이야.’
하지만 지크의 소리 없는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래도 도적단의 규모는 거짓말을 했어.’
도적단의 규모는 팀이 말한 것보다 훨씬 크고 습격 대상도 드미로 상회만이 아닐 것이다.
‘그야 그렇겠지. 천하의 팀 플랫이 포함된 계획이야. 텅 빈 거나 다름없는 도시를 공격하는데 고작 상회 하나 털고 끝난다고? 그럴 리가 없지.’
지크는 슬슬 이 계획의 전말이 보이는 것 같았다.
‘놈들은 이 도시 전체를 털 생각인 게 분명해.’
방어 병력은 적고 도시에 스며든 도적은 많다. 아마 불 같은 것을 질러 혼란시킨 다음 보이는 족족 도적질을 할 계획임이 분명했다.
대담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다. 그리고 만약 성공한다면 아마 이 왕국은 물론이고 주변 왕국까지 그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렇게 둘 수야 없지.’
지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팀에게 말한 대로 준비를 해야 했다. 다만, 팀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준비일 것이다.
* * *
팀은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올 때 산 술병을 따 잔에 따랐다. 한 번에 들이켠 후 다시 잔을 채웠다.
‘드디어 내일인가.’
그답지 않게 끝없는 인내를 삼키며 끌어온 계획이 드디어 완성된다. 내일이 지난 후, 자신은 곧 엄청난 액수의 돈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시작이다. 그 돈을 바탕으로 더욱 힘을 키워 세상에서도 알아주는 거물이 되어야 했다.
‘일단 그럴듯한 조직부터 만들어야지.’
세력이 없어 다른 도적놈들을 끌어들인 것이 얼마나 스트레스였는가. 돈도 나눠야 했고 명령도 제대로 듣지 않았다.
‘계획만 끝나면 일일이 찾아서 모두 쳐 죽여 버리겠어!’
짙은 살기가 그의 눈에 맴돌았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조용히 놓아둬야 했다. 게다가 자신에게 가장 기어오르던 도적단은 내일 계획이 진행되는 와중 죽을 것이다.
‘그 녀석은 잘 하겠지?’
팀은 지크를 떠올렸다. 그가 느낀 강함이라면 지크는 충분히 도적들을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라도 힘의 소모는 피할 수 없을 거야.’
노릴 순간은 바로 그때다.
도시 전체를 털 생각을 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도시를 점거할 생각은 없었다. 벰비스는 캠벨 후작령에서도 중요한 도시이니, 아무리 현재 캠벨 후작령에 여유가 없다고 해도 바로 탈환을 하려 병력을 보내올 것이다. 게다가 적다고 해도 아직 도시에 남아 있는 병력도 부담이다.
때문에 딱 밤에만 약탈을 한 후, 뿔뿔이 흩어질 셈이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최대한 돈이 있는 곳을 노려야 한다. 그리고 팀이 보기에 지크는 말 그대로 보물창고였다.
봐둔 곳은 봐둔 대로 털고 지크를 털어 보너스까지 챙긴다. 그게 팀의 계획이었다.
지크가 강하긴 하지만 팀은 결코 지크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도 도적들을 처리하기 위해 힘을 소모한 다음이라면 더더욱.
‘놈의 정체가 신경 쓰이긴 하지만 이젠 상관없어.’
도시 출신은 절대 아니다. 그가 약점을 잡은 관리의 말로는 시는 아직 도적들이 도시 안에 숨어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만약 지크가 시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모를 리 없다.
‘그리고 도시 바깥의 세력이라도 이젠 상관없고.’
아무리 그 세력이 가까이 있다 해도 하루만에 벰비스에 도착하진 못 할 터.
‘도시에 알린다 해도 하루 정도는 보고를 막을 수 있으니까.’
약점을 잡은 관리에게 이미 협박도 해놨다.
‘그 녀석이 도시 안에 우리들이 숨어들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때는 정말로 기겁을 했었는데 말이야.’
운명은 그의 편인지 조금 삐걱대긴 했어도 계획은 예정대로 돌아갔다.
그래, 계획은.
‘…지크라.’
약간의 망설임을 안은 채, 팀은 조용히 다음 날을 준비했다.
* * *
지크는 드미로 상회의 옆 건물 옥상에서 상회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야심한 시각이라 이미 상회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해가 지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비치던 불빛들도 지금은 대부분 꺼져 있는 상태. 남은 불빛의 숫자도 계속해서 줄어갔다.
그때, 갑자기 도시 저편에서 불빛 하나가 나타났다. 누군가 한밤중에 일어나 불을 켠 것일까.
그러나 그 불은 조명으로 켰다고 하기엔 너무도 컸다.
‘불이 났군.’
지크의 좋은 눈에 한 목조 주택이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의 부주의에 의한 화재일까.
그러나 타오른 불꽃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다.
도시 이곳저곳에서 화재가 일어난다. 누가 봐도 명백한 방화였다.
잠든 도시가 서서히 깨어났다. 저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리고 하나 둘 자던 사람들이 일어나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방에 번져 있는 불꽃을 보고는 공포에 질렸다.
지크가 몸을 움직인 건 그 때였다.
‘시작이군.’
그는 몸을 움직여 상회의 건물 안으로 잠입했다. 한밤중에 경비를 서고 있어야 할 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살해당한 건 아니다. 전투 흔적은커녕 자그마한 핏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지크는 마치 자기 집 앞마당을 거니는 것처럼 상회의 가장 커다란 창고 쪽으로 향했다.
화재가 일어난 후 경비들의 기척이 향한 곳이었다.
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이야, 이게 다 얼마냐!”
“이제 난 부자야! 부자라고!”
“수다는 그만 떨고 빨리빨리 챙겨! 여기만 털고 말 거야? 시간이 얼마 없어! 여기 털고 빨리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거 아냐!”
지크는 발을 들었다.
뻐엉!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창고의 큰 문이 경첩째로 뜯겨 나가 안으로 떨어졌다.
창고 안의 모습이 보였다. 잔뜩 쌓인 상자들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달라붙어 있다. 텅 빈 상자 몇 개가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다.
창고 안에 있던 자들, 도적들이 놀란 눈으로 지크를 바라봤다. 그들의 꼴은 우습기 그지없었다. 손가락에는 반지를 잔뜩 끼고 목에는 목걸이를 몇 개씩이나 걸었다. 아마 그것들이 텅 빈 상자의 내용물이었을 것이다.
지크는 씨익 웃었다.
“드디어 잡았다.”
상황을 보아하니 녀석들은 상회의 경비로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보통 상회의 경비는 믿을 만한 사람을 쓰는 게 보통인데 어떻게 도적놈들이 경비로 둔갑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지긴 했지만, 지금 그건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지금 눈앞에 물건을 훔치는 도적놈들이 있다는 것이다.
“저, 저 녀석은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도적들이 서로를 보며 당황한다. 상자에 걸터앉아 있던 각진 얼굴의 남성이 흉악하게 인상을 쓰며 외쳤다.
“누가 봐도 방해꾼이잖아, 이 멍청이들아! 당장 저 녀석을 죽여!”
부하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지크도 느긋하게 윈두르를 빼 들었다.
“나는 너희들 말고 다른 손님도 맞아야 하거든.”
윈두르에 마력이 잔뜩 주입됐다.
“그러니까 빨리 끝내자고.”
지크는 도적들에게 달려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