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9화
도시 안. 그 말을 들은 지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일개 도적들 주제에 도시 안쪽을 습격하겠다고?”
“일단 내가 알아낸 정보론 그래.”
“간덩이가 부었군.”
감히 산적 따위가 정규군이 지키고 있는 도시, 그것도 물류의 중심지 캠벨을 공격하려 하다니. 하지만 지크는 곧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니, 오히려 머리가 돌아가는 건가?’
다른 때라면 멍청이들이라고 비웃으며 커다랗고 단단한 바위에 머리를 들이 받는 무식한 짓을 구경했을 테지만, 지금은 평소와 상황이 달랐다.
해적 퇴치를 위해 병사들이 동원된 터라 벰비스에 배치되어 있는 병사들은 평소보다 적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적은 병력도 도적의 은거지를 찾겠다며 바깥으로 나다니고 있지.’
결국 벰비스에 배치된 병력은 더욱 줄어들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 어느 정도 규모의 병력과 적절한 계획만 준비된다면 도시 안에서도 충분히 날뛸 수 있을지 모른다.
‘도시에 내통자도 있으니 더 쉬울 수도 있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성공 가능성이 올라갔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당장에 엄청난 이득을 얻겠지.’
“목표는? 설마 시청은 아니겠지? 그럼 웃기겠네. 자그마치 도적들 따위가 도시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거 아냐. 신생 왕국이 하나 탄생하는 건가?”
“그런 건 아니야.”
‘그럴 능력도 없고.’
속으로 자신의 협력자들을 씹은 팀이 말을 이었다.
“어디 돈 될 만한 곳을 습격할 것 같긴 한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라. 조금 더 정보를 얻어야 해.”
“그리고 그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겠지?”
“그래.”
“흐음.”
지크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팀은 몸이 달았다. 하지만 꾹 눌러 참고 짐짓 여유를 가장했다.
“믿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나도 경비를 주지 않는다면 이 이상 움직이지 않아. 아니, 못해. 괜히 돈도 없이 위험한 일에 목을 들이밀 수는 없어. 나도 목숨은 소중하니까.”
“…좋아.”
지크가 테이블에 있는 돈 자루 두 개를 팀에게 던졌다.
“하나는 이번 정보에 대가. 또 하나는 경비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무, 물론이지!”
대충 대답을 하고 주머니의 끈을 풀어 돈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번쩍이는 광채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도적놈들의 목표가 도시 안에 있을 거라는 정보, 꽤 좋았다. 다음에도 이런 정보를 가지고 온다면 대가는 섭섭지 않을 거야.”
지크는 테이블에 남은 돈과 귀금속을 가리켰다. 팀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목숨을 걸어서라도 정보들을 얻어올 테니까.”
“그런 마음가짐 정말로 좋아!”
지크가 손뼉을 한 번 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분이다! 내가 한 잔 사지! 오늘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 보자고!”
술. 그 한 단어에 팀이 반응했다. 원래 양아치치고 술 싫어하는 놈은 없다. 그건 팀도 마찬가지.
그는 술을 좋아하는 걸 넘어 사랑했다. 게다가 공짜 술이 아닌가. 툭하면 무전취식을 일삼는 팀이지만 그건 그것, 이건 이것이다.
“좋…!”
당장이라도 동의를 하려던 팀이 순간 말을 멈췄다.
“왜 그래? 술 안 좋아해?”
“아니, 그게 아니라….”
팀은 요즘 절주 중이었다. 술이라면 환장하는 팀에게 절주란 단어는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먼 단어지만, 요새 진행하는 계획이 계획인지라 술에 취해 있기 꺼려졌다.
게다가 같이 마시는 상대가 지크라는, 그가 사냥감이라 점찍어 놓은 자였던 것도 찝찝했다.
술은 이성적 판단을 쉽게 앗아가니까.
‘이놈 봐라? 이 녀석이 술을 마다해?’
회귀 전, 술이라면 환장하던 이가 바로 팀이었다. 술에 떡이 되어서 전투에 나섰던 때도 허다하다.
물론 그 일신상의 무력 때문에 그는 술에 취한 채로도 전장을 휩쓸었다.
아니, 전투를 할 때 기술보다는 본능으로 날뛰는 그에게 술이란 건 별로 단점이 되지도 않았다.
‘지금 시기에는 술을 싫어하나?’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을 때 보였던 반응을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럼 그렇게 술을 좋아하면서도 지금 조절을 하고 있단 말이지?’
물론 팀이라고 항상 술을 입에 달고 산 건 아니다. 그도 간간이 절주를 할 때가 있었다.
그런 때는 보통 굉장히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저 본능대로 사는 놈이 잠시나마 그 본능을 억눌러야 할 정도로 중요한 때.
‘즉, 지금 녀석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지크는 그게 벰비스를 어지럽히고 있는 도적들과 무관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뭐야. 거친 남자같이 폼은 다 잡더니 술도 제대로 못하는 약골이었어?”
지크가 눈을 가늘게 뜨고 팀의 발끝부터 머리까지 쓰윽 훑었다. 그 태도와 말에 팀이 발끈했다.
“약골이라니! 나는 나보다 술 센 사람을 보지 못한 사람이야!”
“그러셨어요? 그런데 왜 내 눈에는 술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겁먹은 양아치로 보일까?”
“좋아! 그러면 가자고! 네놈 재산 오늘 술값으로 전부 거덜내주마!”
‘단순한 놈.’
씩씩거리며 문을 나서는 팀을 지크는 뒤에서 한심하게 쳐다봤다.
* * *
처음 둘이 술집에 자리를 잡았을 때,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먹는 사이인데다가 각자 숨기는 것까지 있다.
거기에 술집에 오기 바로 전에 지크가 팀을 놀려먹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때문에 안주를 가득 깔고 처음 술잔을 부딪칠 때만 해도 둘의 대화는 그리 살갑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으하하하하! 그랬다고?”
“그럼!”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지크와 당당히 목소리를 높이는 팀. 그들의 테이블 아래에는 이미 내용물이 빈 술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한 양이다. 하지만 수련을 깊이 한 지크와 팀이 인사불성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효과는 분명 있었다. 취기가 올라오지 않는다면 그들이 굳이 술을 즐길 필요가 없으니까.
그들은 딱 적당히 기분 좋은 정도로 취해 있었다.
술자리가 즐겁기 위해서는 보통 세 가지가 필요하다. 좋은 술과 좋은 안주. 그리고 좋은 술 상대.
놀랍게도 지크와 팀은 술을 마신 지 얼마 안 되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처럼 죽이 맞았다.
“그때 네가 그놈 바지에 오줌 지린 것 봤어야 해! 덜덜 떨면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서 비는데, 그게 얼마나 웃겼는데!”
양아치로 살아왔고 지금도 양아치로 사는 팀의 무용담이라고 해 봐야 뻔했다.
누구를 때리고 누구를 겁박한 이야기들. 평범한 사람이라면 어색하게 웃으며 표정 관리를 하거나 대놓고 인상을 찡그린 후, 팀과 거리를 둘 그런 이야기다.
그러나 듣는 상대가 지크다. 지금이야 착하게 산답시고 분에 맞지 않는 선행 아닌 선행을 하는 처지지만, 마음만은 아직 새까만 그대로였다.
당연히 팀의 악행을 듣고 진심으로 깔깔 대며 웃었다.
“큭큭큭! 그것 볼만했겠는데!”
“당연하지! 생각 같아서는 그림으로 그려서 방 안쪽에 걸어놓고 싶을 정도야.”
“그거 훌륭한 인테리어가 될 것 같은걸?”
“역시 그렇지?”
“좋아,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지크도 바로 자신의 무용담을 꺼냈다. 그가 꺼낸 이야기는 저번에 카르위먼과 토벌을 했던 밸리드 교단의 트리슬로와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론 어느 정도 각색은 했다. 자기의 정보는 최대한 주지 않는 편이 이득이니까.
따라서 지크는 그저 어느 광신도를 엿 먹였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게다가 지크에게 필요한 건 어디까지나 그가 크리슬로와를 엿 먹인 부분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지! ‘뭐 하고 있어? 어서 가! 가서 날 후회하게 만들어줘야지!’라고.”
“설마 진짜 그냥 보낸 건 아니겠지? 그런 놈들은 보내 놓으면 언젠가 분명 뒤통수를 친다고.”
“그럴 리가 있겠어? 이미 탈출로에는 함정을 전부 설치해 놨었지. 그리고 게임을 하자고 했어. 시간 안에 함정 지대를 벗어나면 정말로 보내준다고.”
“큭큭큭! 정말로 머리 잘 돌아가네! 그래서? 녀석은 어떻게 됐어?”
“시간 안에 간신히 벗어나긴 했어. 그때 녀석이 뭐라고 했는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
“‘내가 이겼다!’래!”
“크하하하하하!”
정말로 숨넘어갈 듯 팀이 웃어젖혔다. 그가 들고 있는 술잔의 술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거 웃기는 놈이네!”
“얼마나 필사적이었으면 그랬겠어!”
“그래서? 너는 어떻게 대응해줬는데?”
“난 정직한 사람이니까 인정해줬지! 네가 이겼다고!”
“그러고는?”
“‘그러고는’은 무슨 ‘그러고는’이야.”
지크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당연히 가슴때기에 칼을 박아줬지.”
“크하하! 하하하! 키하하하하하하!”
팀이 통쾌하게 발을 구르며 웃었다. 술잔으로 테이블도 쿵! 쿵! 쳤다.
다른 술집 같으면 주변에서 비난의 시선이 쏟아졌겠지만 지금 그들이 술을 먹고 있는 곳은 독실이었다. 때문에 마음 놓고 웃고 떠들 수 있었다.
“아깝네! 그런 얼굴은 직접 봐야하는데!”
“그럼! 말이라고! 그 얼굴 봤으면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끼니를 굶어도 배가 안 고팠을 걸?”
“그 정도였어? 이런 젠장! 왜 그 때 내가 그 현장에 없던 거야!”
팀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감정에 놀랐다.
‘이렇게 즐거운 게 얼마만이지?’
술을 좋아하는지라 이런 술자리는 줄곧 있었다. 그만큼 술 상대도 많이 만나왔다.
같이 길거리를 누비던 양아치 친구도 있었고 술에 취한 채 어울린 이름 모를 인간도 있었으며 뜨거운 시간을 보낸 여인도 있었다.
하지만 맹세코 이번처럼 즐거운 술자리는 처음이었다.
그건 지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팀과는 다르게 그는 처음이 아니었다. 회귀 전 종종 있었던 일이니까.
‘역시 이 녀석은 나랑 마음이 잘 맞아.’
지크와 팀의 술자리는 쌓여가는 술병만큼이나 깊어졌다.
그 정도 시간이 흐르자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조금은 진지한 이야기도 오고가기 시작했다.
“너는 어쩌다 양아치가 됐냐?”
지크가 팀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맞춰 볼게. 넌 태어날 때부터 그 성격이었지?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울음 대신 욕설을 내뱉으며 튀어나왔을 게 분명 해! 분명 산파에게 ‘X발!’이라고 외쳤을 거라고!”
“대체 어떤 쓰레기가 태어나자마자 그러냐.”
무척이나 모욕적이니 말이었지만 팀은 웃기만 할 뿐, 화를 내지 않았다.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까지 초인적인 능력을 갖고 있진 않아. 오히려 반대야. 어렸을 때 나처럼 순해빠진 사람도 없었어.”
“아,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그 엘프가 드래곤을 구워먹고 오크가 평화를 노래하며 비 대신 황금이 떨어지는 그 환상적인 세계의 이름이 뭐라고?”
“거짓말이 아니야, 이 빌어먹을 놈아!”
팀은 낄낄거리며 잔을 들었다. 그의 잔은 비어있었다. 술병을 들어 잔에 따르려다 그는 아예 병 주둥이를 입에 물고 꿀꺽꿀꺽 마셨다.
“크아! 술 맛 좋네! 어쨌든 어렸을 때의 난 정말로 찌질한 놈이었어. 세상에! 이 팀 플랫이 싸우는 걸 무서워했다니까! 부모님끼리 조금 목소리를 높이기만 해도 울어버리는 한심한 놈 말이야!”
“그래?”
아마 저 말은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양아치들은 자기가 겪은 작은 일을 큰일처럼 부풀리긴 해도 저런, 소위 찌질한 시대의 일을 꾸며내진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순진한 소년이 이런 쓰레기가 된 거냐?”
“많은 일이 있었지. 아주 많은 일이….”
그렇게 말할 뿐, 팀은 그 이상 과거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