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8화
잘 닦인 길이다.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의 저택이 있는 구역의 포장된 길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비만 오면 온갖 오물이 섞인 더러운 진창으로 변하는 서민들의 구역보다는 훨씬 낫다.
길을 중심으로 양옆에는 여러 건물들이 서 있었다.
형태도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건물들은 공통적으로 입구 바로 위에 커다란 간판들을 떡 하니 붙여 두고 있었다.
거리에는 많은 마차와 짐을 든 이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곳은 온갖 상회들이 밀접해 있는 상업구역이었다. 물류의 중심 도시답게 벰비스에는 온갖 상회들의 본부와 지부가 난립해 온갖 물품들을 사고팔았다.
같은 구역에 모여 있는 상회들이었지만, 상회라고 해서 모두 같진 않다.
그 재산, 규모, 영향력 등등에서 상회마다 차이가 있고 그것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상회 건물의 규모였다.
많은 건물 중에서도 수위에 꼽힐 만한 거대한 건물.
커다란 정문으로 계속 말과 마차들이 오가고 창고에 수많은 물자들이 쌓이거나 빠지며 사무소에는 거래를 하러 온 온갖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런 혼잡과 열기도 해가 지고 달이 뜨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람과 마차가 지나다니던 정문의 자물쇠가 굳게 닫히고 인적이 사라졌다. 남은 사람이라고 해 봐야 창고를 지키는 경비병들뿐이었다.
험악한 얼굴과 통일되어 있지 않은 무기를 보니 용병들인 모양이었다.
건물을 감싸고 있는 높은 담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바깥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그다지 경비에 열중인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짝다리를 짚거나 하품을 쩍쩍 하는 모습이 경비를 한다는 의식마저 없어 보였다.
몇몇은 끼리끼리 모여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낄낄 거렸다.
따악!
저질스런 손 모양을 하며 경박하게 웃던 경비의 고개가 꺾였다. 그와 얘기를 나누던 다른 경비가 당황해 무기를 뽑아들었다.
“누…!”
따악!
그의 고개도 동료처럼 푹 꺾였다.
뒤통수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두 사람의 앞으로 누군가 섰다.
“네놈 새끼들, 지금 뭐 하냐?”
“아, 플랫 씨!”
뒤통수를 친 상대를 확인한 경비들이 바로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지금 뭐 하고 있냐고.”
“아, 두목의 명령으로….”
“두목?”
팀의 목소리에 날이 서자 경비가 급히 말을 수정했다.
“아, 아뇨! 대장의 명령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래. 경비. 그게 너희 임무지. 그런데 이상하지? 내가 오자마자 본 건 경비를 서고 있는 경비병들이 아니라 제들 노가리 까느라 정신이 없던 양아치들뿐이었거든.”
“그, 그게….”
핑계를 찾기 위해 눈이 이리저리 구른다. 하지만 변명하려 팀의 눈을 본 순간 그들은 머릿속에 떠올렸던 수 십 가지의 핑계를 일순 내팽개칠 수밖에 없었다.
인간 같지 않은 눈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 광포한 기운과 살기는 말 그대로 피 맛을 알게 된 늑대의 것이었다.
“네놈들에게 진짜 경비병처럼 행동하는 걸 바라진 않아. 밑바닥 쓰레기들에게 무리인 일이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흉내조차도 제대로 내려하지 않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
팀이 경비 중 한 명의 머리카락을 잡아채 자신의 얼굴 앞까지 끌어당겼다.
“적어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이게 얼마나 중요한 건수인지 벌써 까먹었냐? 내가 직접 머리 뚜껑을 따서 그 조막만 한 뇌에 직접 새겨주랴!”
“죄, 죄송합니다!”
“역시 너희 같은 놈들은 본보기가 필요하겠어.”
팀이 손을 들었다. 그의 손가락 다섯 개가 전부 빳빳하게 서 손날을 만들었다. 경비의 눈에 죽음의 공포가 짙게 드리울 때였다.
“그만하지.”
팀이 고개를 돌렸다. 웬 사내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허리에 날카롭고 커다란 칼을 차고 각진 얼굴을 한, 거친 분위기를 풍기는 자였다.
“그 새끼는 네 부하가 아니야. 내 부하지. 아무리 우리가 협력을 하는 중이라고 해도 경우는 지켜줬으면 하는데.”
“경우?”
팀이 잡고 있던 경비를 거칠게 땅바닥에 꽂았다. 얼굴을 바닥에 정통으로 박은 그가 신음을 흘렸다.
목숨에 지장은 없어 보였지만 안 그래도 뭉툭하던 코가 완전히 주저앉아 있는 게 코뼈는 확실히 부러진 것 같았다.
“말 잘했다, 이 자식! 너 아니, 네 놈들은 이게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한 일인지 아직 제대로 모르나본데, 내가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게 다시 설명해줄까?”
“물론 그 설명은 주먹으로 하는 거겠지? 못 받아줄 것도 없지만, 그랬다간 그 대단하고 중요한 일이 박살나지 않겠나.”
“네놈들의 헛짓거리를 보아하니 실패할 게 분명해. 마음 졸이며 화병 얻느니 차라리 내가 뒤집어엎는 게 낫지!”
각진 얼굴의 남자는 팀의 손끝을 쳐다봤다. 눈의 착각일까. 팀의 손톱이 길어진 느낌이다.
좋지 않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팀과 당당하게 맞서는 중이긴 했지만, 정말로 맞붙게 된다면 팀의 손에 의해 자신들이 갈가리 찢길 것이라는 걸 남자는 익히 알고 있었다.
결국 남자가 한 발 물러섰다.
“알았어. 알았다고. 협력자들과 부하들에게 다시 한 번 경고하지. 아무리 사소한 상황이라도 마음을 놓지 말라고 말이야.”
“말만으로는 안 돼. 전부 다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놈들이라 본보기가 필요해.”
“…적당히 해라, 팀 플랫.”
각진 얼굴의 남자가 처음으로 험상궂게 인상을 썼다.
“우리는 협력하는 처지지, 네 부하가 아냐. 그런데 남의 부하를 본보기로 삼겠다고?”
“적당히 해야 하는 건 네놈들이지. 이번 건수는 네놈들이 지금껏 해 왔던 그 어떤 일보다 규모가 큰일이라고. 그만큼 착실히 공을 들여야지. 그런데 저런 쓰레기들 몇 때문에 일을 그르치자고 하는 거냐?”
팀이 경비들을 가리켰다. 구석에 몰린 생쥐마냥 덜덜 떨며 흘러가는 사태의 눈치를 보고 있던 경비들이 흠칫 놀랐다.
“그렇게 썩어빠진 정신머리로 이 일을 할 거면 당장 때려 쳐! 아니면 내가 때려치우게 만들어 줄까?”
팀의 눈이 샛노래졌다. 그 순간 각진 얼굴의 남자는 더 이상 팀을 말릴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
“…때려치울 순 없지. 좋아, 알았어. 하지만 저 녀석들을 본보기로 만드는 건 내가 한다. 내 부하니까. 이게 내가 양보할 수 있는 마지막이다.”
각진 얼굴의 남자는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팀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상황이 변하는 것이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좋아. 단, 나중에 확인해서 물렁하게 넘어갔다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다른 놈들에게도 정신 차리라고 확실히 말해.”
“알았다.”
팀이 몸을 돌리자 각진 얼굴의 남자는 한숨 돌렸다. 일단 정면충돌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회피한 것이다.
담을 넘어 상회의 건물 밖으로 나가는 팀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혀를 찼다.
‘하여간 저 더러운 성질머리하곤.’
자신도 한 성질머리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팀에게 비할 바는 못 된다. 녀석은 말 그대로 미친 개 그 자체였다.
팀이 사라진 곳을 향해 침을 한 번 뱉은 그는 이 트러블의 원인이 된 부하를 쳐다봤다.
그들은 몸을 빳빳하게 굳힌 채 앞으로 나올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남성이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다른 부하들 몇 명이 일정 거리를 둔 채 대기를 하고 있었다.
“이 새끼들 죽여. 그리고 경고의 의미로 목만 떼어 내서 다른 놈들한테 돌려라.”
“두, 두목!”
“제발…!”
콰직!
두 경비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각진 얼굴의 남성이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큰 소리 내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얘기했냐!”
그리고 그는 쓰러진 부하들에게 서슴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그들은 커다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몸을 웅크려 맞기만 했다.
분이 풀리도록 발길질을 한 그는 다른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끌고 가!”
숨죽여 우는 경비들이 다른 부하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소란에 달려온 다른 자들이 그 모습을 굳은 모습으로 지켜봤다.
‘일단 녀석의 말대로 본보기는 확실히 되겠군.’
그렇다고 사내가 순순히 자신과 부하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잘못도 전부 타인에게 떠넘기는 순수한 쓰레기였던 것이다.
“흥!”
그는 콧방귀를 뀌고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뭐 하냐! 작업으로 돌아가지 않고!”
부하들이 허둥지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부하들을 한번 기분 나쁘게 훑어 본 그도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한밤중에 일어난 일련의 소동은 끝났다.
* * *
‘일의 중요도도 모르고 날뛰는 개자식들 같으니!’
팀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뒤 돌아가 각진 얼굴의 남성을 동그랗게 깎아버리고 그 부하들도 피곤죽을 만들고 싶었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었지만 그렇다고 놈들을 죽일 수도 없었다. 일단은 계획의 협력자들이었으니까.
‘내가 세력만 있었다면!’
역시 자신만의 세력이 필요했다. 이번 계획을 성공시키고 그는 반드시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그냥 이렇게 넘어가는 것도 좀 그랬다. 특히 그 각진 얼굴의 남성은 사사건건 팀과 충돌을 하는 자였다.
‘그러고 보니 녀석들의 주목표가 드미로 상회였지?’
팀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떠올랐다.
* * *
지크는 팀과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술 한잔 기울이며 하루를 마감하려던 중 찾아온 팀. 그가 찾아올 용건은 하나밖에 없다.
지크는 기대를 담아, 하지만 겉으로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이번엔 제대로 내가 모르는 정보를 찾아 온 거겠지?”
“물론!”
자신이 있는지 팀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좋아, 말해 봐.”
“그것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다.”
“뭐지?”
“너, 돈 좀 있냐?”
“그게 정보를 얻는 것과 관련이 있나?”
“있지. 정보정보 거리는 너라면 알 거 아냐? 정보를 구하기 위해선 돈이 든다는 거. 사람 쓸 일 있으면 고용 좀 하고, 협력해야 할 사람이 있으면 기름칠도 좀 하고, 조금 위험한 일이 있다 싶으면 덮기도 하기 위해서 말이야.”
지크가 나지막이 감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건 순수한 감탄이 아니었다. 오히려 살짝 비웃는 투였다.
“어디 귀한 정보라도 얻어 왔나 봐? 내가 너한테 바란 건 뒷골목에 나도는 소문 정도였는데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대단한 기대를 한 것도 아니고.”
팀이 발끈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눌러 참았다. 일단 지크가 갖고 있는 돈이 얼마인지 알아야 들일 노력을 판단할 수 있다.
‘별로 돈이 없다면 적당히 거짓 정보나 주고 뜯어내야지.’
하지만 사소한 일만으로도 보석을 선뜻 던져준 지크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재산은 상당히 많을 것이라고 생각됐다.
‘그렇다면 이 녀석을 조금 더 깊이 끌어들여야 할 테고.’
“내가 제법 신뢰성이 있을 만한 루트를 알아냈거든. 그곳을 뚫기 위해 돈이 필요해.”
“어딘데?”
“그걸 가르쳐줄 순 없지.”
지크는 잠시 팀을 보다가 마법 상자에서 돈과 귀중품을 테이블에 쏟기 시작했다.
자루마다 들어있는 금전과 반짝반짝한 보석들에 팀의 꾸며진 여유가 일순간 날아갔다. 그건 개인이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도 큰돈들이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나?”
팀이 침을 삼켰다.
‘이건 기대 이상이다!’
지금 이 순간, 팀은 지크를 단순한 용돈벌이 상대에서 이 계획의 중요 목표 중 하나로 생각을 바꿨다.
‘이 정도 재산을 바로 보여줄 수 있다면 숨기고 있는 재산은 더 많을 수도 있어!’
“…충분히 만족스럽군.”
“그렇지? 그렇다면 어디 알아 온 정보를 말해 봐. 네가 정말로 정보를 알아올 수 있다면 그에 따른 비용은 충분히 내 줄 수 있지만, 그 전에 네가 내 신뢰를 얻는 게 먼저야.”
“그 신뢰는 내가 지금 알아온 정보로 판단하겠지?”
“물론이지.”
“좋아. 미안하지만 도적들의 근거지 같은 건 찾지 못했어. 하지만 도적들의 목표는 얼핏 알아낸 것 같아.”
지크가 앞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흥미를 보였다.
“도시 근처의 상행들을 습격하는 게 목적이 아닌가?”
“아니. 조금 더 큰 거야. 녀석들의 진짜 목표는 도시 밖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 같아.”
지크가 팀의 검지를 살폈다. 검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