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3화
지크는 산을 타고 있었다. 정리된 길은커녕 산짐승들이 다니는 길조차 없는 깊은 숲. 빽빽한 나무가 시야를 가리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수풀이 발에 스친다. 간혹 튀어나온 나무 뿌리나 낙차 있는 지형이 발목을 잡으려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 지크의 방해가 될 순 없었다.
사냥꾼이나 약초꾼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면 짐승과 몬스터들만이 다닐 만한 곳이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거칠 것이 없었다. 애초에 다른 일행들을 데리고도 가도가 아니라 그게 산이든 들이든 강이든 지도상 일직선으로 주파하는 걸 선호하는 지크가 아니던가. 이제 와 어색함을 느낀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다.
‘조용하군.’
지크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울창한 수해의 사이로 난 작은 공간에서 달빛이 조용하게 스며든다. 주변에는 수많은 곤충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저 멀리서는 이름 모를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그러나 지크는 분명 지금 극도의 정적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혼자서 이렇게 다닌 적이 얼마 만이지?’
회귀를 하기 전에도 세력을 일군 후에는 부하들과 같이 세계와 싸웠고, 회귀 후에도 이미 백작가에서 나올 때부터 한스를 데리고 있었다. 혼자 이렇게 여행을 다닌 적은 지크에겐 아득히도 오래전 이야기였다.
‘흐음, 이건 이것대로 좋지만, 적적한 것도 사실이군.’
한스와 스녹을 굴려… 아니, 훈련을 시키며 라일라와 실없는 농담 따먹기를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 곳에 엘레나까지 포함이 될 것이다.
‘벌써 그런 일상에 익숙해진 건가.’
회귀 전 그를 씹어 먹을 정도로 증오하던 사람들이 본다면 기겁을 하며 현실을 부정하지 않을까.
콰득!
지크가 그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근처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가 접근하고 있었다. 짐승일까. 그러나 지크의 감각은 그 추측을 부정하고 있었다.
지크가 윈두르를 등에서 빼 들었다. 여전히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변신능력을 일절 보여 주지 않는 성가신 검. 나뭇가지 같은 검날이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무겁게 반사했다.
크륵!
인간이 아닌 것이 분명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윈두르를 추욱 늘어뜨린 채 지크는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둘러봤다. 울창한 수풀 때문에 시야에 잡히는 건 없다. 그러나 지크는 놈들의 움직임을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
‘총 일곱 놈.’
상대는 오크다. 매번 산속을 가로지를 때마다 질리도록 만났던 몬스터들. 평소엔 한스나 스녹이 처리하도록 시켰지만 지금 그들은 없다.
‘그것참, 설마 녀석들이 그리운 거야?’
지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재미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뭐,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잘됐어.’
지크가 천천히 윈두르를 들어 올렸다. 윈두르가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거리는 것 같다.
‘심심풀이 정도는 되겠지.’
크앙!
순간 오크들이 소름 돋는 고함을 터뜨리며 튀어나왔다. 지크의 팔뚝 근육이 물결치며 윈두르가 휘둘러졌다.
숲속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숲은 다시 먹먹한 정적에 잠겨들었다.
* * *
거대한 도시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커다란 길이 뚫려 있다. 산 하나 없는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도시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위엄 있게 굽어보는 것 같다. 주변에 산이 없어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왕복하고 있었다. 팔 물건을 잔뜩 싣고 있는 상인의 마차부터 지팡이 하나를 지고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 일반 여행객들까지.
과연 캠벨 후작령의 물류 중심지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지크도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터덜터덜 발을 놀리며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확실히 골치가 좀 아프겠군.’
보통 도적떼들은 산 속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편이 많다. 토벌군을 피하려면 그게 가장 좋을 테니까. 하지만 이 근처에는 산다운 산이 없었다. 있는 건 야산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언덕 몇 개뿐.
그나마 도시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몇 개의 숲이 도적들이 틀어박힐 만한 곳으로 보였지만 그 숲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도적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확실히 도적은 있는 모양이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양옆으로 물러나더니 일단의 병사들이 길을 지나간다. 완전무장을 하고 부리부리한 시선을 사방에 던지며 행군하는 병사들의 눈에는 상당한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무기를 들고 있는 자들에게는 한층 더 험상궂은 눈빛을 뿌렸다. 지크에게도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단순 순찰은 아니다. 아마도 도적들이 가도를 습격하는 걸 방지하기 위함일 터. 확실히 상황은 심각해 보였다.
성문으로 들어가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게 보인다. 주변에서 도적들이 활개를 치느라 검문이 강화된 모양이다. 지크는 잠시 품 속에 있는 마법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그 안에는 요하임이 받아다 준, 신분을 증명할 패와 증명서가 있었다. 이걸 보여 주기만 하면 바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상자에서 손을 뗐다.
‘당분간은 혼자서 움직이자.’
괜히 보고한답시고 도시의 관리들을 찾아갔다가 괜히 행동에 통제를 당할 수 있다. 이곳에는 요하임처럼 지크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일단은 본래의 예정대로 무식하게 도시 주변을 뛰어다니며 기척을 탐지해서 산적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지크는 조용히 성문 앞에 늘어서 있는 뒤 편에 줄을 섰다. 발만 까딱이며 하릴없이 줄에 대기하던 때였다. 갑자기 성문이 크게 열리더니 일단의 병력이 튀어나왔다. 전부 말을 탄 그들은 빠른 속도로 가도를 질주했다. 사람들이 놀라 분분이 옆으로 피했다.
지크가 그들을 쳐다봤다.
‘무슨 일이 터진 건가?’
혹시 도적이 습격해온 건지도 모른다. 지크는 조용히 줄에서 빠져나왔다. 라일라가 만든 투명화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다행히 사람들의 이목은 방금 달려나간 병력에 몰려 있었기에 지크의 모습이 사라지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병사들은 가도를 쭉 따라가다가 나온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었다. 지크가 온 곳과 다른 길이었다. 지크도 병사들을 따라 오른쪽 길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지크는 가도에서 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공포에 질린 사람처럼 얼굴이 허연 사람도 있었다.
뭔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잠시 후, 병력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고 지크도 그 주변에 숨어들었다.
그곳은 벰비스 근처에 있는 작은 숲을 뚫고 난 길이었다. 그래도 도시에서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는지 길의 폭은 충분히 컸다.
언제나 사람들의 훌륭한 안내역이자 편안한 이동의 보조자 역할을 했을 그 길이, 지금은 끔찍한 살육의 현장으로 변해 있었다.
대부분은 흙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검게 물든 길의 표면만으로도 살육이 행해졌을 당시의 참혹함을 알 수 있었다. 시체는 세 구. 모두 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당했다.
병사들이 말에서 내려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길 한쪽으로 비켜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현장을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도 흩어졌다.
지크는 그 소란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 시야를 확보했다.
사건 현장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몬스터의 짓은 아니군.’
인간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망가진 시체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지크는 확신했다. 시체에 날카로운 칼에 맞은 상처가 있었다. 분명 인간의 솜씨였다.
시체들은 벌거벗고 있었다.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벌거벗고 다니는 사람은 없으니 누군가에게 빼앗겼다고 봐야 하리라.
‘도적놈들의 짓인가 보군.’
실제로 현장을 보고 있는 병사들이 그런 식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피해자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신분을 확인할 것도 없고 시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난도질이 되어있으니 당연한 일.
길을 가던 사람들이 현장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들의 얼굴엔 공포가 가득했다.
하지만 지크는 무덤덤했다. 고작 이 정도 사건으로 그의 마음에 무언가 영향을 미치기엔 그가 살아온 시절에 본 피가 너무도 많았다.
‘이 정도로 심각한 일이면 사건을 해결했을 때 요하임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겠지.’
오히려 그렇게 생각을 할 정도였다.
지크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저 현장에서 더 이상 얻을 만한 건 없었다. 그는 숲 어귀에서 남들이 눈치채지 못 하도록 조용히 투명화를 지웠다. 그리고 가도를 걷는 사람들 안으로 스며들었다.
얼마 후, 그는 벰비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
지크는 일단 숙소를 잡고 도시를 거닐었다. 과연 캠벨 후작령 물류의 중심지답게 거리에는 사람이 넘쳤다. 사람들이 사는 가판대에는 희귀한 물품들이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의 얼굴은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언뜻언뜻 불안감이 보이기도 했다.
‘도적떼들 때문이겠지.’
어느 정도 도시를 둘러보자 슬슬 해가 지기 시작했다. 허기가 졌다. 일단 오늘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화려한 만찬보다는 가볍게 끼니를 때우며 술 한잔을 곁들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일행들과 떠들썩하게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였던 얼마 전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비교되는 터라 지크는 피식 웃었다.
‘내가 이렇게 감성적인 녀석이었나?’
마음이 물러졌다고 화를 내야 할까,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는 것을 신기해해야 할까.
‘아무렴 어때. 자기가 좋으면 그렇게 사는 거지.’
지크가 그렇게 눈앞에 나타난 음식 가게에 들어가려 할 때였다.
그가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콰앙!
가게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사람 한 명이 날아왔다. 길바닥에 몇 번 구른 그 사람은 정신을 잃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길을 다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지크는 가게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가게 안은 난장판이었다.
식탁은 거꾸로 엎어져 있고 의자는 넘어져 있다. 몇 개는 부서져 있기도 했다. 떨어진 음식과 음료들이 가게 이곳저곳을 더럽히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있었다.
가게의 벽면에는 아마도 손님인 듯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에게서 분노와 공포, 경멸의 감정이 보인다.
주변을 훑는 걸 끝낸 지크는 가게의 중앙을 바라봤다.
세 명의 사람이 한 사람을 포위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이 집단구타를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되는 상황이지만, 의아하게도 겁에 질려 있는 건 쪽수가 많은 쪽이었다.
“이 개자식이!”
무리 중 한 명이 포위된 사람을 공격한다.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그는 한 손에 작은 단검까지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 몇이 새된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날카로운 칼이 피부와 근육을 가르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악!”
무기를 들고 덤빈 사람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가 칼을 들었던 팔이 축 늘어져 덜렁거렸다.
“이런 젠장!”
“죽여!”
다른 두 사람이 마저 덤벼들었지만 포위된 사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빛살과도 같은 속도로 다른 두 사람의 뼈마저 부러뜨렸다.
순식간에 싸움이 끝났다. 지크는 싸움의 승자를 쳐다봤다.
아무렇게나 기른 긴 더벅머리. 상쾌한 호남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였지만 사나운 표정이 접근하고 싶은 마음을 싹 가시게 만들었다.
사내는 마치 짐승 같은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