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2화
“부탁할 일이요?”
“그렇습니다.”
지크의 도움을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도움을 청하는 자신이 한심했는지 요하임의 얼굴은 살짝 굳어있었다.
지크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것 참, 이렇게 보면 또 우습다니까.’
회귀 전, 자신을 따르며 뻔뻔한 말을 늘어놓던 그가 지금은 한 왕국의 어엿한 백작이 되어 자신의 무능력에 수치를 느끼고 있다.
물론 그 요하임과 이 요하임은 다르다. 지크는 그걸 헷갈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완전히 타인 대하듯 할 생각도 없었다.
‘내가 아는 요하임과 이블린은 아니지만, 이 녀석들이 그 녀석들의 과거 모습임은 분명하니까.’
그 이유만으로도 그들에게 마음이 간다. 그 마음을 부정해야 할 이유 또한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컨델은 무척이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일단 들어보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 지크는 그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도적단을 퇴치하는 일입니다.”
“도적단을요?”
“그렇습니다.”
“자세히 얘기를 들어볼까요?”
요하임이 말한 바는 이랬다.
이번 사건을 해결한 후 잔말피를 포함해 그 일대를 모두 다스리는 백작은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앞으로 드라큘 영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요하임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백작이 제안을 하나 가져왔다. 성공만 한다면 요하임의 명예를 조금은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일이라면서.
“그게 도적단의 퇴치입니까?”
“네. 이 백작령 옆에는 후작령이 존재합니다. 캠벨 후작령이죠.”
이야기에 집중한 탓에 요하임은 아예 식기를 완전히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에 비해 지크는 남은 음식을 깔끔히 비웠다.
“캠벨 후작님은 왕국에서도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말은 곧 드라큘 백작님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란 소리군요.”
“정확합니다.”
요하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캠벨 후작령에 도적 떼가 들끓고 있다고 합니다.”
지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그 도적 떼 때문에 후작님께서 도움을 요청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무리의 규모가 상당하겠군요. 후작령 자체에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면 말이죠.”
“그렇진 않답니다. 정확한 규모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영지 하나를 뒤집어엎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는 아닐 거랍니다.”
“그런데도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후작이라는 고위 귀족이 고작 규모가 크지 않은 도적단 하나에게 빌빌거리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일단 후작령 자체가 지금 여력이 얼마 없다 합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옆 나라와의 국경을 지키고 있는 게 후작님이거든요. 실제로 십수 년 전에는 전쟁까지 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대해선 요하임도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는지 언급할 때 약간의 불쾌감이 느껴졌다.
“따라서 국경에 일정 병력을 계속 배치해 두어야 하죠. 물론 그것만으로 도적 떼 따위에 애를 먹진 않지만, 지금 후작님은 해적 퇴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해적말입니까?”
“얼마 전부터 소규모 해적들이 연합을 하기 시작해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성장했다더군요. 그래서 꽤 공을 들여 준비를 해 해적들을 소탕하기 시작했답니다.”
“즉, 성장한 해적을 퇴치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는 데다가 옆 왕국을 견제하기 위한 병력도 남겨둬야 하는 상황에서 도적들이 말썽이란 소리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후작이라는 작위가 대단하다 해도 골치 아픈 상황임은 확실하다.
“물론 그 정도라면 그저 골치 아픈 문제로만 끝났을 테죠.”
“뭔가 더 있군요.”
“도적 떼가 활동하는 곳이 벰비스라는 도시 근처입니다. 후작령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이고 나라 전체를 봐도 충분히 규모가 있는 도시입니다. 후작령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고요.”
“도적놈들이 간이 부었군요. 아니, 이 경우엔 머리가 좋은 건가?”
후작령의 상황을 확실히 파악하고 날뛰고 있는 것이라면 여간 영악한 게 아니다.
적어도 세상에 널려 있는 흔한 도적놈들보다는 확실히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 있다는 뜻이다.
“아직 어떤 놈들인지는 모릅니다. 정말로 현 상황을 정확히 인식해서 후작령의 빈틈을 찔러 최대의 효과를 보려는 머리 좋은 놈들인지, 아니면 그저 운만 좋은 놈들인지 말입니다.”
설혹 도적 떼가 후자인 놈들이라도 얕볼 순 없다.
이 세상을 헤쳐나가는 데 실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운이라는 걸 지크는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건으로 세력이 더욱 커질지도 모르니까.’
교통의 요지에 터를 잡고 사람들을 습격한다면 인적 드문 외곽에서 큰소리치며 사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수입이 들어올 터.
게다가 이어진 요하임의 말은 사태의 심각성을 더했다.
“그리고 교통의 요지인 만큼 벰비스로 대다수의 물자가 이동합니다. 이번 해적 퇴치를 위한 군사 물자마저 말이죠.”
“…그 정도라면 그냥 일개 도적 떼가 날뛴다고 생각할 수준이 아니군요.”
혹시 도적 떼의 영향으로 군사 물자의 이동이 지체되어 해적 퇴치를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후작령의 타격과 함께 컴벨 후작의 명예도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이웃 영지에 도움을 요청할 만하군요.”
“게다가 현 백작님의 부인이신 분이 후작님의 여동생이기도 하니, 손을 내밀기가 조금 더 쉬웠을 겁니다.”
인척관계로까지 묶여 있다니. 충분히 납득이 갔다.
“그래서 백작님이 후작님에게 지원 병력을 보내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후작님도 그렇게까지 요청은 하지 않으셨고요. 사실, 도적 떼를 퇴치할 병력 자체는 있다고 합니다.”
“그럼 어떤 도움이 필요한 겁니까?”
“도적 떼의 근거지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신답니다.”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도적 떼를 처리할 때 가장 골치 아픈 건 그들의 근거지를 찾는 일이다.
보통 정규군이 출동하면 웬만한 도적 떼들은 처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건 도적들이 정정당당하게 정면으로 붙어줬을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도적놈들이 정면으로 붙을 리가.’
보통 도적들은 정규군이 온다면 겁을 먹고 자기 은신처에 틀어박히거나 다른 곳으로 달아나기 일쑤다.
때문에 도적 토벌은 전투력보다는 추적과 탐색의 성과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리기 마련이다.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적국의 경계와 해적토벌에 힘쓰는 지금 대대적으로 병력을 모집해 도시 주변을 다 뒤질 수도 없는 판국이니, 후작님의 걱정이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탁을 받으신 겁니까?”
“백작님이 이번 컨델 이시드 토벌전에 상당히 감명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본인의 병력은 범인의 그림자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는데 우리는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사건을 해결했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대부분 지크 님의 공이죠.”
“흐음, 그럼 제가 할 일은 벰비스 근처에 있을 도적들의 근거지를 찾는 일이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맡도록 하죠.”
별 고민 없이 지크는 흔쾌히 승낙했다. 요하임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지크 님에게는 여러모로 은혜를 입는군요.”
“나중에 이자 붙여서 넉넉히 돌려주시면 됩니다.”
“하하하! 나중에 꼭 갚아드리죠.”
요하임이 껄껄 웃었다.
“한데, 이번 일은 저 혼자 갈 생각입니다. 그 점은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특히 별다른 고민 없이 방에 돌아가자마자 짐을 챙길 생각을 하던 라일라는 더욱 놀랐다.
“뭐야? 갑자기 왜?”
그녀의 목소리가 심정을 대변했다. 그러나 지크는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
“네가 맡은 일로 한동안 여기 머무르기로 했었잖냐.”
클로원의 문자 해석을 일컬음이다.
“굳이 또 이동을 해서 네 일에 차질을 빚게 할 순 없지. 그 결과는 나도 상당히 기대하고 있으니까.”
또 해석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아 내심 아쉬워하고 있었던 그녀는 지크의 말이 내심 반가웠다.
“그런데 왜 혼자야? 다른 애들은 안 데리고 갈 거야?”
“엘레나야 네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을 테고. 그렇게 일행이 갈리는 바에야 나 혼자 가서 얼른 처리하고 오는 게 낫다. 들어보니 인원수가 많이 필요한 일은 아닌 것 같고. 오히려 방해지.”
도시 주변을 기감을 넓게 펼친 채 마구잡이로 뛰어다니다 보면 걸리는 놈이 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아직 지크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나머지들은 방해다. 그렇다고 한스와 스녹의 기감이 지크처럼 넓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둘은 여기서 놀게 내버려 둬. 아마 좋아라 할 거다.”
“그건 그렇지.”
지금껏 지크가 자유 시간을 주지 않은 건 아니지만 무서워하는 감시자의 부재만큼 완벽한 자유가 어디 있을까.
이참에 지크는 둘을 한번 완벽히 풀어주기로 했다.
“좋아. 네가 가 있을 동안 열심히 해석해 놓을게.”
라일라도 지크의 의견에 동의했다. 지크가 요하임을 쳐다봤다.
“그렇게 됐으니, 원군은 저 혼자라고 보고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솔직히 지크 혼자 간다는 사실이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요하임은 곧 그 생각을 지웠다.
어차피 그가 알기로 지크의 일행 중 가장 판단력이 좋은 사람은 지크였으니까.
그렇게 지크 혼자 백작의 캠벨 후작령으로 출발하는 것이 정해졌다.
* * *
식사가 끝난 후, 요하임과 이블린은 마차를 타고 요하임이 머물고 있는 숙소로 가고 있었다.
이블린의 숙소는 지크 일행과 같은 곳에 있는지라 그녀가 마차를 탈 필요는 없었지만, 그녀는 종종 요하임이 방문하는 날이면 이렇게 같이 마차를 타며 잠깐의 대화를 즐겼다.
커다란 사건 속에서 서로를 새삼 인식한 두 사람이 저절로 가까워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조금씩 발전해 이렇게 서로 마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정도까지 발전해 있었다.
요하임이 맞은편에 앉은 이블린을 바라본다. 그녀가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 한숨 쉬었다.
“하아, 정말 그 두 사람 사이는 발전이 없네요.”
그녀의 고민을 안 요하임이 쓴웃음을 지었다. 요 근래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 지크 님과 라일라 씨 아닙니까. 평범한 사람의 잣대로 판단하기엔 어렵죠.”
“그래도 조금은 가까워진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요. 그런데 이제는 잠시라고는 해도 아예 떨어질 생각이라니.”
그 떨어지게 된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인 요하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걸 눈치챈 그녀가 당황했다.
“아, 백작님을 탓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두 사람이 워낙에 답답해서….”
“압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말 한마디로 분위기가 풀어질 리 없다. 여기선 자신이 화제를 바꿔야 한다.
요하임은 그녀가 아주 좋아할 만한 화제를 던졌다.
“하지만 전 그 두 사람이 아주 가망이 없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의 의도대로 바로 이블린이 화제에 따라왔다.
“네? 솔직히 라일라 씨는 사랑이란 감정에 무지할 뿐, 그래도 평범한 감성이 존재하는데 지크 씨는 너무 개성적이라 그럴 기미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 같은걸요.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데이트로 카지노를 데려갈까요.”
이블린이 예전 경험까지 끌어내 투덜거렸다.
“전 오히려 그 점에서 가망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요?”
저 말도 안 되는 데이트 계획을 세운 인간의 어떤 점을 보면 가망이 있다고 생각이 되는 걸까.
“사실 지크 님이 위장 데이트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전 저와 처음 만났을 때도 한 번 했었죠. 상대는 바곳 부인이었습니다. 제 가족을 죽이고 영지를 엉망으로 만들려 한 여자였죠.”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이블린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당시에 지크 님은 바곳 부인을 떠보기 위해 접근했었는데, 그때의 수완이 대단했습니다. 순식간에 주변에 사랑하는 사이라고 소문이 날 만큼 완벽히 에스코트를 했었죠.”
“네? 그런 사람이 이번엔 왜….”
“저도 그래서 상당히 놀랐었습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본바, 이런 추측을 하게 됐죠.”
흥미진진하게 자신을 보는 이블린에게 요하임은 자신이 생각한 답을 내놨다.
“라일라 씨와의 데이트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정말로 지크 님이 즐겁게 생각한 걸 한 거라고 말이죠.”
“…그러니까 그 바곳 부인과 한 것은 그저 위장이었고, 라일라 씨와 한 것은 지크 씨 딴에는 진짜 데이트였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추측에 이블린은 잠시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요하임의 추측이 자신의 소망과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의 흥분은 빠른 속도로 식었다.
“…만약 진짜 데이트가 그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심각한 것 아닌가요?”
“…….”
요하임도 그 말엔 대답할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