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1화
그렌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잔말피의 성벽이 그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젠장!’
속으로 욕설을 내뱉는다. 지나치게 낮은 자신의 명성을 올리기 위해 이 도시로 왔건만, 전부 헝클어져 버렸다.
물론 명성을 얻는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문제는 그 달성한 명성이란 것이 예상보다 지나치게 낮다는 게 문제였다.
컨델은 정말로 은밀하게 움직여 다니는 자였다. 자신의 연인을 부활시키겠다는 목적에 혹시 방해라도 될까봐 철저하게 자신을 숨겼다.
연인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질투가 다른 연인들에게 향해버려, 무차별 실종 사건에서 연인 실종 사건으로 사건이 변해 피해자의 특정이 가능해지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 들키기엔 컨델의 그림자 능력의 은밀성과 기동성은 무척 뛰어났다.
원래 잔말피는 그런 컨델에게 이리저리 휘둘려 다니다 끝끝내 범인을 잡지 못한다. 그리고 잔말피에서는 부활한 연인을 거느린 새로운 마인이 탄생하게 된다.
‘오래가진 못하지만.’
컨델 이시드란 마인은 골 때리는 놈이었다. 연인을 부활시켜도 곧 부활시킨 것이 자신의 연인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렌이 컨델에게 했던 말이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이후엔 보통 두 가지의 길을 걸었다.
폭주해 주변을 다 때려 부수는 진정한 마인이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야.’
다른 마인들이 웬만하면 착실하게 설계된 길을 걷는 것과는 달리 약간의 계기만으로도 마인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월등하게 높아지는 녀석.
만약 마인이 될 인간들을 충분히 확보해놓지 않았다면 컨델 이시드를 계속 마인 후보로 내버려 두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을 혼란시키고 그가 명성을 얻을 충분한 수의 마인이 있었기에 컨델 같은 불안한 놈들도 내버려 두고 있었다.
종종 이렇게 초반에 자신의 명성을 위한 제물로서 써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엔 역대급으로 사건이 어그러졌다.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인으로 클 수 있는 자가 죽었고 그렌은 아주 작은 명성만을 얻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명성을 가로채 간 자가, 그의 최대 목표.
‘지크 모어!’
그렌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속으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리는 이름.
‘그놈이 모든 걸 어그러뜨렸어!’
마왕이 되어야 할 지크는 도시의 영웅이 되었고 그의 부하로서 세상을 공포와 절망에 빠뜨려야 할 요하임과 이블린은 오히려 지크를 도와 도시를 구했다.
지크가 컨델을 쓰러뜨릴 것 같아 당한 척하며 시아까지 지크에게 덤벼들게 했었지만 오히려 그게 패착이었다.
‘시아 루브렌터를 역이용해서 녀석을 쓰러뜨리다니….’
역시 전투에 관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녀석이었다.
너무도 어긋난 운명. 이런 적은 맹세코 한 번도 없었다.
‘역시 지크 모어 때문이겠지.’
그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가 되었다고 했을 때는 무척이나 놀랐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그걸 시작으로 계획이 통째로 어그러졌다.
‘역시 그놈을 찾아야 돼.’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든 최유력 용의자.
‘지크 모어에게 이상한 것을 가르쳐 준 그 개자식!’
운명을 이 정도까지 비틀어 놓을 수 있는 자가 이제 와서야 나타날 줄은 몰랐다.
그가 누군지, 어떤 계기가 그를 움직여 지크에게 인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를 반드시 찾아야 했다.
‘다음을 위해서라도!’
그때 운명이 이렇게 어그러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라일라라고 했던가?’
지크가 동료로 데리고 다니는 마법사.
‘엄청났지.’
그 미모도, 그 실력도 용사의 동료가 되기에 정말로 걸맞았다. 엘레나를 빼앗겼다고 생각해 열이 받았는데 그녀의 상위호환인 존재가 나오다니.
‘그녀라면 엘레나의 예비가 아니라 오히려 엘레나를 예비로 밀어낼 수도 있을 거야.’
그의 머릿속에 있는 완벽한 용사 파티의 구성원 중 엘레나의 이름이 떨어지고 거기에 라일라의 이름이 붙었다.
‘좋아, 그 녀석에게 라일라에 대해 알아보라고 해야겠어. 게다가 이쯤 시간을 줬으면 지크 모어에게 조언을 줬다는 놈의 정체도 어느 정도 알아냈겠지.’
적어도 실마리 정도는 잡았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야겠어.’
그의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하지만 그러면 일단 이 녀석을 떨어뜨려야 하는데.’
그렌은 슬쩍 라라를 쳐다봤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뭔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찌 보면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유를 묻긴 했지만 그녀는 얼버무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방패를 들 생각은 없는 건가.’
그의 시선이 못마땅하게 라라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을 훑었다.
‘예전엔 이 즈음이면 검을 버리고 방패에 주력을 했었는데.’
빌어먹을 비틀어진 운명이 그녀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방패를 들지 않는 라라 브라우닝은 필요 없어.’
괜히 자신의 주목도만 떨어져 버린다. 파티에서 검을 쓰는 자는 자신 혼자뿐이어야 했다.
‘조금 더 설득해보자. 라라의 실력은 무척 뛰어나니까.’
하지만 그녀가 결국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더 이상 데리고 다닐 필요가 없지.’
예비품은 있다. 라라보다 실력은 좀 떨어지지만 적어도 지금의 라라보다는 훨씬 더 쓸모가 있으리라.
그렌은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봤다. 아까보다 멀어진 잔말피의 성벽이 보인다. 그 성벽 너머에 아직 그놈이 있을 것이다.
‘계속 지크 모어가 설치게 둘 순 없어.’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받아야 할 환호와 갈채를 계속 빼앗길지도 모른다.
아직 뚜렷한 계획은 없다. 지금은 그저 컨델의 처리 과정을 트집 잡아 지크에게 시비를 걸어, 나중에 충돌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작은 여지를 만들었을 뿐.
그걸 살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의견 충돌로 내버려 둘지는 앞으로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냥 네 운명을 따라가라, 지크 모어. 어쭙잖게 정의의 용사 흉내를 내려 하지 말고. 너는 지크 브레이브가 아니니까.’
다행히 지크가 브레이브가 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것 하나만큼은 그렌에게 있어 좋은 이야기였다.
* * *
클로원 문자의 해석을 위해 한동안 잔말피에 머무르기로 한 지크 일행. 오락으로 유명한 도시이니만큼 잔말피에 머무르는 동안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한스와 스녹은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곳이 얼마나 좋은 도시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끝까지 천국 같은 곳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그들의 예상대로 지크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마자 다시 둘에게 고된 훈련을 시키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엘레나도 끼어 있었다. 라일라가 문자의 해석에 집중을 하니 자연스레 마법 수업 시간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여유 시간을 지크는 환상적으로 활용했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기초적인 체력은 있어야 한다며 그녀를 철저하게 굴렸다.
그 결과 그녀는 한스와 스녹이 지크의 아래에서 어떤 지옥을 맛보고 겪어 왔는지 아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 더 뛰어! 아무리 마법사라도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머리가 굳는 법이다! 드웨인가 출신의 네가 모르진 않을 텐데!”
닦아내지 못한 침과 토사물의 흔적을 입가에 가득 묻힌 채 달리던 엘레나는 순간 소리를 빽 지를 뻔했다.
지크의 말대로 마탑에서도 기본적인 운동은 권장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마법 공부에 도움이 되는 정도 선이지 이런 무식한 운동은 절대 아니었다.
“네 스승님도 했던 일이다! 너는 그만둘 거냐!”
물론 지크도 라일라 정도의 수준을 원하진 않았다. 라일라는 놀랍게도 육체적 능력도 상당했으니까. 하지만 엘레나의 육체 능력은 평범했다.
그러나 지크의 말은 엘레나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확실하게.
풀려 있던 엘레나의 눈이 초점을 찾았다. 이를 악물고 그녀는 다시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다! 잘한다, 엘레나!”
멀어져가는 등을 향해 지크가 크게 소리쳤다.
‘이 정도면 되겠지.’
상당히 엘레나를 몰아붙이고 있지만 지크도 이 강도의 훈련을 계속 지속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몸을 써 싸우는 스타일도 아니고 한스나 스녹같이 자신의 제자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육체 능력이 있어야지.’
지크 일행과 함께 다니려면 아무리 마법사라도 기본적인 체력은 있어야 한다. 그게 전투에도 유리하다. 특히 지크 일행같이 위험한 일에 머리를 들이미는 자들이라면 더더욱.
‘마인, 마왕, 클로원, 그리고 그렌 제너드까지.’
하나하나 범상치 않은 것들이다. 아무리 지크 자신이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저것들을 상대로 계속 지켜줄 수 있단 보장은 없었다. 때문에 이런 기본적인 훈련은 당연했다.
하지만 지크는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험한 일에 빠질 수도 있다는 건 각오를 하고 왔을 테니까.’
엘레나를 맡기 전 그녀와 그녀의 할아버지에게 이미 답은 받아 놨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 엘레나 드웨인이 아니던가. 그녀가 성장했을 때 얼마나 괴물 같은 마법사가 되는지 아는 지크로선 별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상대가 마인? 엘레나 드웨인은 그 마인을 전문적으로 토벌하는 팀에 있었다고.’
파티를 이루고 다녔다지만 그녀의 힘은 마인, 그중에서도 최상급의 마인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이었다.
‘어쩌면 회귀 전 이상의 마법사가 될지도 모르지’
그녀의 재능과 라일라라는 최고의 스승, 그리고 앞으로 겪을 경험들을 생각하면 허튼 생각도 아니다.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 전에 꺾이는 걸 방지하려면 이런 고된 훈련도 필요한 법이야.’
물론 생전 처음 하는 힘든 훈련이 오히려 몸을 갉아먹을 수도 있지만 그건 포션으로 치료하면 그만이다. 무식한 방법이지만 이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정말로 경악스럽게도, 엘레나를 철저하게 굴리는 사디스트적인 겉모습과는 다르게 지금 지크를 움직이고 있는 건 계산적인 면은 전혀 없는 순수한 호의였다. 지크로서는 정말로 희귀한 행위.
물론 엘레나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머리를 하얗게 물들이고 정신없이 달리고 있을 뿐이었다.
‘라일라가 문자 해석에 몰두해서 마법 공부 시간이 좀 빌 때 어느 정도 궤도까지는 올려놔야 해.’
그 이후는 올려놓은 육체 능력을 유지할 정도의 훈련만 하면 될 것이다.
지크는 목표 지점을 찍고 다시 달려오는 엘레나를 쳐다봤다. 그녀가 지크를 보다가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흠칫!
그녀가 몸을 떨었다.
그녀가 보는 곳. 그곳에는 그녀가 하는 훈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고된 훈련을 받고 있는 한스와 스녹의 모습이 있었다.
“똑바로 안 하지!”
지크가 소리치자 한스와 스녹이 늘어진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지크는 이번엔 엘레나를 쳐다봤다.
“넌 빨리 안 뛰어오냐!”
엘레나가 다리에 힘을 줬다.
그 훈련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됐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 세 명은 완전히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 * *
그날 저녁, 지크 일행은 오랜만에 요하임, 이블린과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두 명도 아직 도시에 머무르고 있었다.
“다른 분들은 참여 안 하십니까?”
요하임이 물었다.
식사 자리에는 지크와 라일라, 요하임, 이블린뿐이었다. 제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훈련을 심하게 시켰더니 전부 뻗어버려서 말이죠. 하여간 허약한 녀석들입니다.”
“그렇습니까?”
지크의 훈련을 모르는 요하임과 이블린이야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지크의 훈련을 경험한 적이 있는 라일라는 살짝 손을 떨었다. 침대에 널브러져 죽은 듯 자고 있을 그 세 사람에게 행운을 빌어주는 라일라였다.
약간의 잡담을 나누며 식사를 하길 얼마쯤. 슬슬 접시의 빈 공간이 많이 보일 즈음이었다.
“죄송하지만 지크 님, 부탁을 하나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요하임이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