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화
한스는 혼자서 길을 걷고 있었다. 나올 때는 스녹, 엘레나와 같이 였지만 지금은 따로 떨어져 행동하고 있다.
‘그 녀석들이랑 같이 있으면 왠지 눈치가 보인다니까.’
마치 연인의 데이트에 생각 없이 낀, 눈치라곤 전혀 없는 형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뭔가 눈치를 준 건 아니고 그 둘이 급속도로 사랑에 빠진 연인 사이가 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셋이 모인다면 아무래도 한스 자신이 겉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둘 사이가 특별히 친한 것도 있고 말이야.’
아무래도 엘레나의 마법 공부를 도와주며 인연을 맺은 터라 엘레나는 스녹을 굉장히 편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몰락한 천재로서 마법 공부에만 빠져 있든 그녀가 사귄 첫 번째 친구라는 이유도 컸다.
때문에 한스는 숙소에서 셋이 같이 나오더라도 곧 혼자 떨어져서 도시를 둘러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좀 처량한 느낌인데.’
아끼던 동생에게 뭔가 뒤쳐진 느낌이다.
그렇게 한스는 터덜터덜 도시를 누볐다. 혼자라곤 해도 잔말피란 곳이 워낙에 오락이란 곳에 충실한 곳이다 보니 혼자서도 이것저것 놀 것은 많았다.
한스는 혼자라는 것에 기죽지 않고 최대한 이 도시를 즐겼다.
‘충분히 휴식 시간을 줬다고 판단되면 지크 님은 다시 인정사정없이 훈련을 재개하실 테니까.’
한스는 확신했다.
그렇게 혼자서 도시를 거닐던 그의 발걸음이 순간 어느 곳에서 멈췄다.
‘여기는….’
익숙한 곳이다. 방금 전까지 건물로 가득 들어차 있던 공간이 갑자기 확 트였다.
도시를 흐르는 개울 중 한 곳이다. 개울 위로 여러 다리가 늘어 서 있다.
‘분명 브라우닝 씨를 만난 곳이지.’
한스는 무의식적으로 예전에 그녀를 만났던 다리 위를 쳐다봤다.
‘응?’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마냥, 예전에 봤던 그 모습 그대로 라라가 다리 위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인사를 나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한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말을 걸려 할 때였다. 라라가 흠칫 어깨를 떨더니 검자루에 손을 가져다대며 몸을 돌렸다.
한스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얼마 전 라라와 만났을 때 있었던 일과 똑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한 발자국 물러서 가볍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누….”
경계어린 그녀의 눈이 한스를 확인하자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한스가 손을 든 자세 그대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브라우닝 씨. 또 같은 상황에서 만났군요.”
“아…!”
검자루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보던 라라가 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죄, 죄송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왜 그렇게 과민반응을 하는지 이해는 가니까요.”
일행 중 명실공히 미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라일라가 있는지라 그녀가 평소 얼마나 귀찮은 일을 당하는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혼자 있을 때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한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다리의 난간 저편으로 졸졸 흐르는 개울과 다리들이 보인다.
“이곳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예전에도 여기서 뵀었죠.”
“개울을 따라 시야가 트이니까요.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랄까요.”
한스와 라라는 자연스레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얘기를 나눴다.
얘기를 나누는데 편하려면 공통의 화제가 있어야 하는 법. 둘의 화제가 얼마 전에 있었던 컨델의 사건으로 귀결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제너드 씨는 괜찮으십니까? 그때 부상을 당하신 것 같았는데요.”
“크게 다친 건 아니었어요. 충격으로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뿐이죠. 다친 곳도 포션으로 치료했었고요.”
“다행이군요.”
“한스 씨의 일행은 괜찮나요?”
“네, 모두 무사합니다.”
“그쪽도 다행이네요.”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계속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다보니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크였다.
지크가 화제로 올라온 순간부터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란 걸 믿지 못하겠어요.”
라라의 말에 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크의 성격에 대한 건, 그를 존경하는 한스도 편을 들 수 없는 일이었다.
‘지크 님 본인도 원치 않으시고.’
한스가 지크의 인성이 좋다고 엄호를 해봤자 지크 본인이 나서서 ‘너 눈깔 삐었냐?’라고 되물을 게 뻔했다. 내기를 해도 좋았다.
“밸리드 토벌과 성녀님의 보호를 통해 얻으신 칭호니까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기사와는 분명 거리가 있으신 분이죠.”
“성격도 그렇지만 컨델 이시드를 몰아붙일 때도 그래요.”
당시 그녀는 지크 일행과 더불어 컨델의 부하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지크의 목소리를 어느 정도는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컨델이 치명상을 입은 후에 나눴던 대화는 확실히 들었다.
게다가 사건이 끝난 후 그렌에게 당시의 상황을 들은 것도 있어 그녀는 공동 안에서 있었던 지크와 컨델 사이의 일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분명 컨델 이시드는 심판받아 마땅한 악인이에요. 사연이 있다고는 해도 그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니죠.”
라라도 그건 인정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한 행위는 도를 넘었어요! 그때의 상황만 놓고 본다면 솔직히 누가 악당인지 모를 정도예요!”
‘지크 님이 악당은 아니지.’
하지만 어느 쪽의 인성이 더 썩어 문드러졌냐고 묻는다면 한스는 조심스레 지크 쪽에 한 표를 줄 것이었다.
그리고 하는 행동이 악당과 비슷하지 않느냐 물으면 대꾸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지크 님의 행동이 도가 지나치게 보일 수 있는 건 인정합니다. 지크 님의 성격이 무척 더럽기도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지크 님은 악당이 아닙니다.”
한 점 부끄럼 없이, 한스는 단언했다.
“지크 님이 괴롭히는 상대는 어디까지나 악당에 한합니다. 절대 그 분은 가만히 있는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아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악당들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노력하시죠.”
“…그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 사람의 성격이 비틀려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만약 그러다 그 사람이 악당으로 변하면 어떡하죠? 그 정도로 비틀어져 있는 사람이라면 악당이 되는 것도 그리 이상….”
“제가 막을 겁니다.”
“…네?”
예상 못 한 답에 라라가 놀라 그를 쳐다봤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제가 지크 님을 막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렇게 말하는 한스의 눈동자는 일말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지크 님의 힘을 생각해보면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그분을 막을 약간의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겠죠. 그래도 막을 겁니다. 그리고 그건 지크 님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가르쳤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분은 용사가 되고 싶다는 저의 철없는 꿈을 확실하게 지지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런 말도 스스럼없이 하시죠. 만약 그 분 본인이 악당으로 변한다면 주저 말고 검끝을 향하라고 말입니다.”
“…….”
설마 지크가 그런 말까지 하며 한스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에 라라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침묵이 흘렀다. 한스는 더 이상 여기에 머물 필요를 찾지 못했다. 그가 떠나기 위해 발을 돌렸다.
“아, 그리고 보니 예전에 말씀 드렸죠? 지크 님이 당신의 검의 재능을 인정하셨다고요.”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어떻게 보면 최근, 그녀의 검의 재능을 칭찬했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 아니었던가.
“당신이 검을 계속 사용하고 싶다면 뜻대로 밀고 나가는 게 좋아요. 당신의 일행보다는 지크 님이 훨씬 더 강하시니까요.”
라라가 울컥하는 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그렌을 비교 대상으로 삼은 것이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그러나 한스는 신경 쓰지 않고 등을 돌렸다.
* * *
“그렇게 헤어졌다고?”
라일라가 흥미진진하게 물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라라와의 약간의 의견 충돌을 한 후 쿨하게 돌아섰지만, 다시 생각을 해보니 자신이 너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크에게 물들어 적에게는 자비를 보이지 않는 한스였지만 다른 자들에게까지 그렇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숙소에 들어왔을 때 꽤나 우울함을 풍기고 있었는데, 그것을 라일라에게 걸렸다.
라일라는 오지랖을 부려 한스를 끌고 지크의 방으로 쳐들어 왔다. 고민이 있다면 들어주려는 것이었다.
물론 요새 클로원의 문자 해석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남의 이야기로 풀고 싶다는 욕망도 아주 적게지만 존재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했어?”
“…지크 님을 욕하는 발언에 조금 울컥해서….”
“쓸데없는 일을 했네. 그 애의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잖니.”
라일라가 뒤를 돌아보며 ‘그렇지 않아?’라고 물었다. 조금 떨어진 침대에 누워 있던 지크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뭐, 맞는 말 했네.”
“저도 그건 알고 있습니다.”
“뭐가 어째?”
지크가 상체를 일으키자 한스가 의자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났다. 그건 지금껏 지크의 고된 굴림으로부터 파생된 반사적인 행위였다.
다행히 지크는 주먹을 흔들어 보일 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진 않았다.
그것도 라일라가 조용히 하라며 옆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지자 다시 벌렁 드러누웠다.
라일라가 계속 말하라며 한스를 채근했다. 한스도 지크의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남의 시선으로 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그래도 지크 님에 대한 험담이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했더니 조금 분이 솟아올랐습니다.”
“하긴, 개새끼라고 욕을 해도 우리가 해야지, 남이 하면 불쾌한 법이니까.”
“어이, 그건 위로가 안 된다고.”
라일라가 던진 베개를 빙글빙글 돌리던 지크가 그렇게 말하며 낄낄댔다. 라일라는 무시했다.
“그래서 그녀가 좋아하는 듯한 그렌 제너드의 이름을 꺼내들었다?”
“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저도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라일라도 재능에 대한 말 중 지크와 그렌, 둘 중 한 명을 신뢰해야 한다면 당연히 지크를 신뢰할 것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 중에서도 그렌 제너드가 지크를 개인적으로 능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힘과 재능에 관한 한 지크보다 정확한 사람은 없어.’
게다가 지금의 지크는 라일라 자신처럼 미래의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맞는 말이야.”
지크가 돌리던 베개를 침대에 던지고 벌떡 일어나 남은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라라 브라우닝도 남이 듣기 불쾌한 진실을 말했다. 그리고 너도 진실을 말했을 뿐이지. 그게 라라 브라우닝을 불쾌하게 만들 순 있겠지만, 그건 그녀가 먼저 한 짓이잖냐.”
“…너도 참 대단하다.”
지크 자신을 욕하는 라라의 말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진실이라고 말하다니.
지크의 대단한 점은 마력, 재능, 인성 등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쩌면 그중 제일은 저 뻔뻔함일지도 모른다고 라일라는 생각했다.
“그런데 너는 무슨 고민이 그렇게 크냐? 네 성격은 익히 알지만 그래도 조금 과하게 걱정한다고 생각한다만. 혹시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심한 말을 했다고 심장이 쪼그라든 거냐?”
지크가 야유하며 말했지만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에 검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면 뜻대로 밀고 나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그녀를 도발했고요. 괜히 반발심 때문에 검을 놓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안 그래도 고민이 많아 보였는데.”
이런 걱정은 예상하지 못했다. 지크와 라일라가 서로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하여간 걱정을 사서 하는군.”
“그래도 순수해서 좋잖아? 세상에 지크 너 같은 사람들만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기 짝이 없어.”
“사람들이 따라잡기엔 내 완벽함이 좀 많이 앞서 있긴 하지.”
자신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는 라일라를 무시하고 지크가 한스에게 눈을 돌렸다.
“괜한 걱정하지 마라. 고작 그 정도 도발로 검을 버리게 된다면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검을 버릴 녀석이었다.”
“하지만….”
“게다가 누누이 말하지만 네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지크가 거만하게 말했다.
“내가 그렌 제너드 그놈보다 훨씬 나은 건 사실이니까.”
한스가 쓰게 웃었다.
“그럼에도 네가 계속 걱정이 된다면 내가 해결해주마.”
“어떻게 말입니까?”
“걱정이란 것도 여유가 생기니까 할 수 있는 법. 다른 생각 못 하게 아주 철저하게 훈련으로 굴린다면 다른 이의 걱정 따위….”
“이젠 걱정 않습니다!”
한스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든 듯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라일라는 조용히 머리를 짚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