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7화
‘예전에 준비한다는 게 저거였구나.’
라일라는 지크가 들고 있는 서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한 장 한 장을 썼을 때의 당사자들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만큼 컨델에 대한 분노가 솟았다.
그래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마음 한구석에 약간의 동정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지크가 내민 일기와 편지는 그 감정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라일라가 옆을 흘끗 보자 다른 이들의 감정도 그녀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까는 컨델에게 일말의 동정을 보내는 모습이 조금씩 보였지만 지금은 그런 기미가 일절 없었다. 그저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을 뿐.
“네 사랑은 고귀하고 대단하겠지. 적어도 너에게는 말이야. 나는 그걸 인정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모두 자유거든. 그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게 더 멋없는 일이지. 그런데 말이야. 사랑이란 감정에 엄청난 가치를 두는 만큼 이 사람들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무척이나 소중히 생각하지 않았겠어? 넌 그 사람들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은 거야. 그러면서 뭐?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을 뿐이야?”
지크가 일기와 편지를 조금 더 컨델에게 들이밀었다.
“왜 말이 없지? 그렇게 자신감이 있으면 다시 한번 말해보라고.”
“…….”
컨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지크를 향해 증오스러운 시선을 날리던 그의 눈이 눈앞의 일기를 담았다.
예쁜 필체로 써 내려간 글귀가 보인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눈에 잡힐 것 같다.
“네놈이 연인만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도 어차피 알량한 질투 때문이었잖아? ‘나는 연인을 잃고 이런 불행한 생각에 빠졌는데, 다른 놈들은 즐겁게 사랑 놀음을 하고 있네?’. 이런 감정이었겠지.”
“…….”
“대답 못 하는 것 보니 맞군. 진짜 쓰레기 같은 자식 같으니.”
지크는 컨델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가 작게 신음했다.
“그냥 빨리 뒈져버려.”
“…그래, 그것도 좋겠지.”
컨델이 허탈하게 웃었다. 숨이 넘어갈 듯하던 그의 말투가 어느새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지크가 상처를 보니 그림자가 그의 상처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회복을 한 건 아니다. 그저 목숨을 잠깐 붙들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래야 했어. 살아서 만날 수 없다면, 나도 죽어 시아를 찾으러 가야 했어.”
그가 그리움에 차 말했다. 마지막 순간에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일까. 컨델은 이대로 자연스레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이걸로 끝이다. 이대로 컨델이 죽는다면 잔말피를 휘감았던 실종 사건은 완벽하게 막을 내린다.
‘누구 마음대로?’
그러나 지크는 이대로 막을 내릴 생각이 없었다.
보통이라면 이대로 보내줬을 것이다. 지금까지 신나게 재미를 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번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요하임과 이블린을 건드려 놓고?’
지크는 편지와 일기를 집어넣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려던 일행들도 손을 들어 막았다. 라라가 그렌에게 뛰어가 부축하는 모습도 무시했다.
그리고 컨델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죽는다고 시아 루브렌터와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큭큭! 난 지옥에 갈 거라는 말인가.”
이미 예상이라도 했던 듯 컨델이 작게 웃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그래도 같은 저승이 아닌가.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그녀와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 있다면 족해. 그리고 혹시 아나? 저승이란 곳이 우리가 생각하는 곳과는 다른 곳일지. 말마따나 카르위먼 놈들이 천국, 천국 노래를 불러도 직접 본 사람은 없지 않나.”
이미 현실을 완전히 포기한 이유 때문일까. 컨델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크도 고작 이런 말로 컨델을 절망에 빠뜨릴 생각이 없었다.
“누가 시아 루브렌터가 저승에 있다고 했지?”
“…뭐?”
컨델이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의문과 함께, 희미한 불안감이 보였다. 저걸 보고 싶었다. 이제 할 것은 저 불안감을 폭증시키는 것뿐.
“네 애인은 여기 있잖아.”
지크가 손을 뻗어 그들의 근처에 서 있는 시아 루브렌터의 시체를 가리켰다.
“내가 죽으면 당연히 내 능력도 풀린다.”
“그래? 뭐, 그쯤은 예상했어. 그렇게 대단한 자율 의지가 있다면 네 몸에 구멍이 났을 때도 계속 움직였겠지. 그런데 말이야. 네 애인은 무척 특별한 녀석이잖아? 네놈이 죽었을 때도 남아있을지 모르지.”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긴. 어차피 네 능력도 받은 거잖아. 웬 로브를 쓴 놈한테.”
컨델이 놀랐다. 설마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원래 네 것도 아닌 능력을 네가 완전히 파악하고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네가 모르는 다른 능력이 있을 수도 있지.”
“그런 건 없다!”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지. 다행히 우리한테는 네 능력에 빠삭한 인간도 있고 말이야.”
지크는 그렌을 가리켰다. 역시 죽진 않았는지 그는 라라의 부축에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렌을 본 컨델이 당황했다.
“네 능력이 정말로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는 능력이라면 적어도 시아 루브렌터의 영혼은 시체 안으로 들어온 상태지 않을까? 그렇다면 네가 저승으로 간다고 해도 그녀를 만날 순 없겠지.”
컨델이 시아를 바라본다. 멍하게 서 있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다. 정말로 시아의 시체에 영혼이 들어가 있는 걸까.
컨델이 당황한 걸 확인하고 지크가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렇지. 넌 절대 편안하게 죽으면 안 돼.’
“지금부터 내가 뭘 할 줄 알아?”
“뭘….”
“일단 제너드 씨에게 네 능력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낼 거야. 그리고 온갖 실험을 해야지. 네 애인을 데리고.”
컨델의 눈이 부릅떠졌다.
“웃기지…! 쿨럭!”
흥분을 해서 그림자로 막아둔 상처가 터졌는지 그가 피를 토한다. 하지만 지크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제 더 이상 컨델이 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들을 수 있는 귀만 있으면 된다.
말을 하는 건 자신 혼자로 충분하니까.
“걱정 마. 네 애인을 욕보이려는 건 아니야. 오히려 반대지. 난 네 애인을 살려볼까 해.”
지크의 발언은 컨델에게 무척이나 뜻밖의 것이었다. 하지만 비열하게 웃는 지크의 표정은 결코 그에게 유리한 말을 할 모습이 아니었다.
“나는 너희를 철저하게 떨어뜨려 놓을 생각이야. 저승에서 만나 행복하겠다? 절대로 용납 못 하지.”
“이 자식…!”
컨델이 팔을 휘저었지만 이미 그의 몸에 아까처럼 대지를 떨어 울리는 괴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반항은 지크의 손에 너무도 쉽게 막혔다.
“그리고 그 후에 내가 뭘 할 줄 알아?”
“…설마 내 죄를 전부 말할 생각이냐!”
“아, 그게 네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구나? 하지만 아니야. 아, 네 죄를 말하긴 할 거야. 내가 부정하는 건, 그게 네 최악의 상황이 아니라는 거지.”
“그 무슨….”
“난 네 연인을 꼬실 생각이야.”
“…뭐?”
“난 이래 봬도 얼굴도 괜찮고 여자를 꼬시는 스킬도 꽤 알아.”
컨델은 코웃음 쳤다.
“흥! 나의 시아가 고작 그런 덜떨어진 유혹에 넘어갈 것 같으냐?”
“응.”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네 믿음이 보답 받지 못할 조건이 너무 많아. 일단 너와 네 연인은 강제로 헤어진 상태가 되지. 원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야.”
“고작 그런 평범한 속설 따위는 우리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래, 그런 걸로는 부족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보다 훨씬 심각해. 일단 시아 루브렌터가 네 범죄를 알게 되잖아.”
컨델의 눈빛이 흔들린다.
“무척이나 슬퍼하겠지. 자신의 연인이 자신 때문에 무고한 연인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은 거니까. 게다가 그녀는 의지할 곳도 없어. 가문에선 도망친 상태고 유일하게 믿은 사람인 너는 뒈져버린 상태일 테지. 가문 안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그녀가 어떻게 생활을 할까?”
“…….”
“아, 혹 자살을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내가 철저하게 막을 거야. 결국 그녀는 산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 그렇게 착실하게 시아 루브렌터를 코너로 몰아붙일 거야. 당연히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겠지. 그런 때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를,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까?”
“……!”
컨델의 입가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복부에 난 상처 때문에 뱉은 상처가 아니다. 극도의 증오에 입술을 짓씹어 새로 나온 피였다.
“…어떤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시아는 날 배신하지 않을 거다!”
컨델이 소리쳤다. 그러나 지크는 가소롭게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
보통이라면 바로 ‘그렇다!’라고 소리를 쳤을 컨델이지만 상황이 너무나 그에게 좋지 않았다.
게다가 대화를 하고는 있지만 컨델의 상처는 무척이나 크다. 그를 곧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당연히 평소처럼 머리가 돌아가지도 않았다.
때문에 컨델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지크가 노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어라? 뭐야, 너.”
지크가 만면에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설마 지금 네 연인을 의심하고 있는 거야?”
“……!”
“맞지? 지금 시아 루브렌터를 의심하고 있지? 네가 죽으면 그녀가 다른 마음을 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그…!”
“말 못 하는 것 보니까 진짜인가 보네?”
지크의 눈이 번뜩인다.
“지금까지 네 연인에 대한 마음에 한 점 부끄럼 없는 것처럼 굴어놓고 적인 내 말 몇 마디에 지금 네 애인을 의심한단 말이냐?”
“그런 적 없다!”
컨델이 부정했다. 하지만 지크는 밀어붙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나한테 거짓말 해봐야 소용없어. 어차피 이런 일은 네가 아는 네 마음이 중요하니까. 그렇게 연인이 소중하다며 사람들을 죽여 놓고 이제는 애인을 믿지 못한다? 이거 생각보다 더 한 쓰레기잖아.”
“그런 적 없다고 했다!”
“네 마음에 거짓말을 해 봐야 소용없어, 이 새끼야!”
큰소리치는 컨델에게 지크는 더욱 큰 소리로 화답했다.
“좋아! 네 애인이 살아났을 때 얘기해 줄 게 하나 더 늘었군! 컨델 이시드란 작자는 너를 전혀 믿지 않았다고!”
“개자식! 그러면 죽여 버리겠어!”
“어떻게 죽일 건데? 어차피 그 때는 네가 뒈져버렸을 텐데!”
지크가 컨델의 뺨을 찰싹 찰싹 때렸다. 그 모욕적인 행위를 컨델은 그저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해서 말한다만, 지금까지 내가 한 말들은 허언이 아냐! 시아 루브렌터가 살아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할 거다!”
“빌어먹을! 빌어처먹을!”
컨델이 그림자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자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눈앞의 악마 같은 놈이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걸 봐야한단 말인가.
‘차라리 시아가 살아나지 않았으면!’
그런 생각이 들 때였다.
미친 듯이 외치던 지크의 말이 뚝 끊겼다. 그의 유리 같은 눈이 또르륵 굴러 컨델의 눈을 바라본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컨델이 눈을 피했다.
“너 지금….”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시아 루브렌터가 그냥 이대로 죽길 바랐지?”
“!!!”
컨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부정하기 위해 지크를 바라봤다. 이것까지 그가 확신하게 둘 순 없었다.
그 마음을 인정해버린다면 그를 지탱하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지크의 얼굴을 본 순간 컨델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그를 조롱한 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지크가 자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이, 컨델.”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며 지크가 친근하게 그리고 상냥하게 말했다.
“시아 루브렌터를 그냥 이대로 죽여줄까?”
그건 악마의 유혹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