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2화
컨델이 그렌을 상대하기 위해 뽑아냈었던 그림자에 이번에 또 다시 뽑아낸 그림자까지 거의 70에 가까운 그림자가 지크와 그렌을 포위했다.
그렌이 도끼눈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회귀 후 최초로 그렌에게 그런 시선을 받은 지크였지만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회귀 전에는 항상 그렌에게 받던 시선이었으니까.
‘무슨 놈의 성인마냥 푸근한 눈빛을 보내오던 게 오히려 소름 끼쳤지.’
“이걸 어찌하실 겁니까!”
“뭘?”
사방에서 들끓는 그림자를 경계하며 등을 맞댄 둘이 서로 소리쳤다.
“당신 때문에 일이 틀어졌지 않습니까!”
“내가 뭘 했다고 그럽니까?”
“상대는 분명 전의를 잃고 있었어요! 당신의 말 때문에 녀석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아닙니까!”
맞는 말이다. 지크는 교묘하게 컨델을 자극하는 말을 해서 녀석의 전의를 다시 북돋았다.
만약 녀석이 그걸로도 전의를 잃고 있었다면 조금 더 직접적인 행동을 할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지금은 막 나가던 회귀 전이 아닌 것이다.
“아니, 그냥 당신과 대화 몇 마디 나눈 것뿐 아닙니까! 심각하게 말한다고 해봤자 약간의 말다툼 정도고요!”
“그러니까 그게 저 녀석을 자극했단 말입니다!”
“그냥 저 녀석이 쓰레기라서 폭주하고 있을 뿐이라니까요! 나가서 다른 사람 붙잡아 물어보쇼! 사람들, 그것도 연인들만 콕 집어 납치해 죽인 개악질 녀석이 당신의 말 몇 마디에 회개를 했다가 내 말 몇 마디에 다시 인성이 썩어 문드러져 폭주하기 시작했다고!”
그렌은 할 말이 없었다. 누가 봐도 지크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그저 컨델이 저런 말 몇 마디가 통하는 녀석이었을 뿐. 하지만 그걸 증명하기란 불가능했다.
“어쨌든 저 녀석을 쓰러뜨려야 하는 건 변하지 않은 것 아니요! 좀 힘이 들긴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요! 당신이 시간을 끌어줘서 곧 우리 편이 올 테니까!”
지크의 말이 끝나가기 무섭게 통로 저편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지크 일행과 라라였다. 그들이 그림자에 포위되어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뭐라뭐라 소리를 친다.
한스와 스녹, 라라는 검을 앞세워 달려들었고 라일라와 엘레나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멈춘 후 영창을 준비했다.
그들을 컨델도 눈치챘다.
‘젠장!’
당장이라도 자신과 연인을 능멸한 개자식과 허튼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려한 사기꾼을 철저하게 두들기고 싶었지만, 더 이상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두 놈도 상당히 좋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지금 달려오는 놈들도 절대 방심할 수 없는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컨델은 그림자들을 거뒀다. 그리고 문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젠장!”
그렌이 쫓으려다가 멈췄다. 이 안 쪽은 정말로 컨델 이시드의 영역이다.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그조차 위험했다.
적어도 혼자는 불가능했다.
“그렌!”
다행히 라라가 그를 부르며 달려왔다. 라라의 실력은 제법이다.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방패를 들었으면 더 수월했을 것을!’
검을 사용하는 검사만 두 명인 조합과 검사와 방패 전사 두 명의 조합은 그 안정성이 차원이 다르다.
안 그래도 안 풀리는 상황에 그녀에 대한 답답함까지 겹치며 욱하고 짜증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렌은 오랜 경험에 의한 인내로 그 짜증을 내리눌렀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어 보이네요.”
“그래. 저분들 덕분이야.”
라라가 지크와 그 일행을 가리켰다. 그렌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그래도 지크와 기 싸움을 하는 형국에 빚이 생겨버린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정의로운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그렌 제너드’라면 빚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랬기에 그렌은 일단 고개를 숙였다.
“그 점에서는 감사드립니다. 라라를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아니. 그렌이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어. 도움 받은 건 나야.”
“하지만 브라우닝은 제 동료가 아닙니까. 그리고 당신을 두고 간 것에 저도 상당히 마음이 무거웠으니까요.”
“그래도 내가 그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그런 거잖아. 그래서 내가 남겠다고 한 거고.”
‘라라 브라우닝이 혼자서 남은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군.’
확실히 속도가 맞지 않는다면 방해가 된다. 그것 때문에 지크도 한스와 스녹을 떼 놓고 가지 않았는가.
그러나 지크와는 엄연히 상황이 다르다.
그렌과 라라는 선행 중이었다. 상황을 보면 컨델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상황.
거기에 미숙한 라라를 버리고 간다는 건 얼핏 그녀의 생명을 포기해도 된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크는 다르다. 그는 컨델을 쫓고 있는 상황. 즉, 남겨진 이들이 컨델과 마주칠 일은 없다. 게다가 뒤쪽으로 줄줄이 대기 병력이 지원을 올 상황이다.
‘혹시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나?’
그렌이 쓰레기가 맞을 시, 라라는 그가 쥐고 있는 패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도 그렌이 직접 데리고 다니는 만큼 아끼는 패.
‘그런 패를 버린다는 것은 이상한데.’
그때 지크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방패를 추천하고 있다고 했었지. 혹시 놈이 원하는 건 라라 브라우닝이 아닌, 방패를 든 라라 브라우닝인가?’
그리고 지금 상황을 보면 브라우닝은 아직 검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걸 생각하면 정말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 그렇게 까진 아니더라도, 조금 덜 아까워졌을 순 있어.’
지크는 두 사람을 의미심장하게 관찰했다.
라일라가 지크에게 다가왔다.
“뭐 해? 컨델 이시드를 쫓지 않는 거야?”
“그건 괜찮습니다.”
그녀의 말을 그렌이 받았다.
“저 안은 막다른 곳이었습니다. 도망칠 곳은 없을 겁니다.”
“그래요?”
“하지만 저 안은 그의 영역일 겁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죠.”
그렌은 철문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지크를 봤다.
“저는 한 번 더 설득을 할 겁니다. 이번에는 방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방해를 한 적은 없다고 했을 텐데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게 통한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하지만 뭐, 시도를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지크가 손으로 문 안을 가리켰다.
“먼저 가시죠. 부디 당신의, 악당의 마음을 울리는 달변이 통하길 빌죠.”
잠시 둘의 시선이 부딪친다. 그렌은 싸늘하게 고개를 돌리고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라라가 당황한 얼굴로 따라 들어갔다.
“뭔 일 있었어?”
라일라가 묻는다. 지크는 간단하게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저 녀석이 트집을 잡고 있네. 상식적으로 네가 잘못한 건 없잖아. 거기서 또라이가 어떻게 미쳐 날뛸지 누가 알아?”
“그렇지! 역시 너는 내 마음을 잘 알아!”
“그런데 의도는 했었지?”
“…무슨 의도?”
“내가 널 하루 이틀 보는 줄 알아?”
라일라가 쏘아보자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시인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뭐, 네가 한 일이니까 별말은 하지 않을게. 이유나 알자. 왜 녀석을 다시 자극하는 말을 했어?”
만약 그렌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갔다면 이번 사건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저 그렌을 엿 먹이고 싶었던 것뿐일까. 하지만 라일라는 이번 일이 그런 감정 때문에 벌어진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크의 얼굴을 보고 확신했다.
지금 그는, 간혹 짓는 마왕의 웃음을 하고 있었다.
한스와 스녹조차 한 걸음 물러서고 엘레나가 라일라의 소매를 잡는다. 그만큼 지크의 웃음은 무서웠다.
“비교해서 판단했을 뿐이야.”
“뭘 비교해?”
“‘자신이 한 일이 모두 쓸데없는 일이었다고 깨닫고 허망하게 주저앉아 버리는 것’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에도 외부의 방해로 인해 한 끝 차이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 둘 중에 어느 게 더 분하고 원통할지 말이야.”
“…그래서 네 판단은?”
“당연히 후자지.”
지크는 철문 안으로 발을 들이밀며 말했다.
“녀석은 억울함과 분노로 몸서리쳐야 해. ‘나’라는 방해물로 인해 눈앞에서 박살 난 목적을 보고서 말이야.”
라일라는 지크의 뒷모습이 먹잇감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몸을 꿈틀거리는 뱀 같다고 느꼈다.
* * *
철문 안의 통로는 지금껏 그들이 달려온 통로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저 통로의 구멍이 좁을 뿐이었다.
사람 세 명만 나란히 가도 비좁을 만한 통로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곧 변화가 일었다.
참방!
발끝에 액체가 닿았다. 하지만 일반 물은 아니었다. 그건 투명하지 않았다. 마치 끈적한 어둠을 액체로 만들어 풀어놓은 것처럼 무척이나 검었다.
“조심해라! 슬슬 시작인 것 같으니까!”
지크가 일행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저 앞쪽에서 계속 전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렌과 라라 일행의 것일 것이다.
지크도 뜀박질을 멈추고 걷기 시작했다.
스르륵!
그들이 걸은 지 얼마나 됐을까. 전면에서 수면에 파문이 일더니 검은 형체가 스르륵 일어났다.
‘그림자인가?’
지크는 윈두르를 겨누며 그걸 쳐다봤다.
‘그림자는 아니군.’
하지만 비슷한 것일 것이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그들이 밟고 있는 액체 같았지만 생긴 거나 움직임은 그림자와 너무도 비슷했다.
스르르르륵!
주변으로 그것들이 더 일어난다.
“뭐야, 저건?”
라일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몰라. 편의상 액체 그림자라고 부르자고.”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너 센스 없어.”
“전투 센스만큼은 한가득이다.”
여기저기서 솟아나는 놈들을 일행은 모조리 박살 내면서 전진했다.
그것들은 확실히 강했다. 그림자 인간보다는 약하지만 일반 그림자들보다는 강했다.
게다가 종종 지크 일행의 발치에서 솟아나 기습적으로 공격을 하는 놈들도 있어 성가시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크 일행은 그것들을 순조롭게 격퇴했다. 지크와 한스가 접근하는 놈들을 철저하게 틀어막고 반격을 날린다.
라일라는 다가오는 액체 그림자들을 몰아서 터뜨려버렸고 엘레나도 이젠 제법 능숙해진 마법 몇 개로 그림자들을 격퇴했다.
스녹은 아예 지면을 들어 올려 액체가 닿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전진한 지 얼마나 됐을까.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그들이 도착한 건 거대한 공동이었다. 공동 바닥엔 검은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그 중앙으로 마치 섬처럼 튀어 올라온 지형이 있었다.
섬 위로 이미 도착해 있는 그렌과 라라가 보인다. 그들을 한 무더기의 그림자 인간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렌은 포위된 상태로 뭐라뭐라 소리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설득을 멈추지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상황을 보아하니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 증거로 컨델의 얼굴엔 엄청난 분노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 잘한다! 그놈의 허튼 말이 뭐란 말이야! 무시하고 그냥 갈아버려!’
지크는 속으로 열렬히 컨델을 응원했다.
“지크.”
그때 라일라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봐.”
지크는 라일라가 가리킨 곳을 봤다.
그건 섬의 중앙에 있었다. 마치 하늘에 신성한 제물을 받치는 것처럼 높이 쌓아 올려진 인공물 끝에 무언가가 있었다.
탈색된 듯 창백한 피부와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 반쯤 검은 액체에 잠겨 있는 그것은 분명 사람의 시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크는 그 시체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시아 루브렌터.’
분명 그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