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지크의 말에도 컨델은 웃지 않았다. 안 그래도 무뚝뚝한 얼굴에 감정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지크는 저 상태를 알고 있었다. 너무도 분노하고 분노하고 분노해서, 오히려 감정을 초월해 무감정해지는 것이다.
“…좋습니다.”
컨델이 말을 꺼냈다. 감정 없는 목소리가 마치 어두운 동굴 속으로 끈적하게 스며드는 것 같다.
“저를 상당히 의심하시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무장 병력까지 엄청나게 끌고 온 당신들을 상대로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당신들을 따라가겠습니다.”
거기까지는 순순히 조사에 협조하는 용의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말은 한기를 한껏 머금은 채 사람들의 귓가를 때렸다.
“하지만 만약 제 범죄를 밝혀내지 못하신다면, 아마 꽤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하게 될 겁니다. 이런 모욕을 참을 정도로 저도 곱게 자라진 않았으니까요.”
“모욕이라. 전 사랑의 도피를 한 하인과 전 귀족 영애를 욕한 적밖에 없습니다만. 이시드 씨가 당사자가 아니라면 분노를 느낄 필요가 없죠.”
아까까지의 노골적인 빈정거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지크는 다시 처음처럼 예의를 차렸다. 그러나 말에 가시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당신의 태도는 완연한 제삼자에게 하는 것이라도 충분히 무례했습니다. 제가 열이 받은 건 그것 때문이죠.”
“아, 그렇습니까? 이거 정말로 죄송하게 됐군요.”
물론 말과는 달리 지크는 죄송하다는 얼굴이 전혀 아니었다.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적절한 보상은 제가 알아서 받아낼 테니까요.”
“이런, 지금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이시드가 지크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건방 떨지 마.”
삼백안이 희번덕거리고 얼굴에 새겨진 흉터가 성난 파도처럼 꿈틀거린다. 얼굴만으로도 웬만한 인간들은 충분히 협박을 하고도 남을 인상이었다.
“저기 뒤에 계신 백작님은 신분의 차이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어디서 굴러먹던 뜨내기인지도 모를 너 하나쯤은 충분히 매장시킬 수 있어. 네가 정말로 귀족 가문 출신이라도 집을 뛰쳐나온 이상 더 이상 귀족이라고 나불대진 못하겠지.”
“시아 루브렌터처럼 말입니까?”
방금 전과는 달리 컨델의 얼굴에 변화는 없었다. 아마 마음을 독하게 먹은 모양이었다. 그가 냉막하게 말했다.
“이번에 내가 무사히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좋을 거다.”
“내 앞에서 협박을 하다니. 상당히 간이 크군.”
요하임이 불쾌한 듯 말했다. 자그마치 귀족, 그것도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그가 하는 말이다. 웬만한 평민이라면 바닥에 바짝 엎드려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그러나 컨델은 달랐다.
“글쎄요. 제가 간이 큰 게 아니라 백작님의 위세가 그만큼 별로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요하임의 눈이 꿈틀거렸다.
“드라큘 가문의 치부는 이미 왕국에서는 유명하죠. 아마 이번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이곳 영주님과의 친분도 계속 이어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을 텐데요. 안 그렇습니까? 게다가 그 와중에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모욕까지 줘가며 체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더더욱 그렇겠죠.”
“뭘 말하고 싶은 거지?”
“그저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드라큘 영지의 미래를 말이죠. 저도 왕국의 귀족 가문 하나가 허무하게 스러지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하네.”
“물론 그러시겠죠. 어디까지나 헛된 걱정일 뿐입니다.”
컨델은 의자를 밀고 천천히 책상 옆으로 걸어 나왔다.
“절 체포하신다고 하셨죠? 그럼 따르도록 하죠. 지금 백작님께서 강제 조사권을 가져오신 건 확실하니까요. 부디 이 카지노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컨델이 싸늘하게 사람들을 훑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꽤 큰 곤란을 겪으시게 될 겁니다. 장담하죠.”
“이야, 정말 자신만만하군요.”
역으로 백작과 지크 일행을 협박하는 컨델에게 지크가 쾌활한 어조로 대답했다.
“마치 우리가 이 카지노에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거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저는 범인이 아니니까요.”
“그래요?”
의구심 하나 없는 자신만만한 대답에 지크를 제외한 사람들은 조금 불안해졌다. 이렇게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와서 증거를 찾는다 하면 기본적인 불안감 같은 게 보여야 하건만, 컨델은 그 점에 관해서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이제 와서 컨델이 범인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지크에 대한 믿음도 있거니와 아까 시아 루브렌터에 대한 매도가 나왔을 때 그가 보인 격정적인 반응도 그가 범인임을 확신시켜 줬다.
그러나 증거가 나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지크가 말했다.
“그런 반응을 보인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개군요. 정말로 여기에 당신을 범인으로 단정할 수 있는 증거가 없거나, 절대 찾을 수 없다고 확신하거나.”
“전자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제가 범인이 아니니까 말이죠.”
“그 말은 당신이 그 멍청한 골 빈 여자와 사랑의 도피를 한 루브렌터가의 전 하인이 아니란 소리죠?”
“그렇습니다.”
시아 루브렌터를 멍청한 골 빈 여자라는 거친 표현으로 불렀지만 이번에 컨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슬쩍 그의 손을 내려다봤지만 분을 못 참아 손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떠는, 그런 뻔한 장면도 없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지크가 웃었다. 하지만 컨델은 이제 지크의 웃는 모습에 편안함이 아닌 섬뜩함밖에 느끼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아까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양심에 찔렸거든요.”
라일라, 요하임을 포함해 뒤쪽에 있는 지크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지크의 뒤통수에 꽂혔다. 심지어 일행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엘레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지크의 행동에 관대해진, 아니 반쯤 포기해버린 그들이라도 지크가 양심 운운하는 끔찍한 소리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크는 태연했다. 일행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채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눈치챘다고 하더라도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일행들은 확신했다.
“만약 당신이 그 하인이었다면 실망했을 겁니다. 사랑의 도피씩이나 할 정도로 루브렌터 자작 영애를 사랑했으면서 눈앞에서 연인을 욕하는 이야기에 입 닫고 가만히 있다니. 그건 사랑이 아니죠.”
지크가 컨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렇게 욕을 해댔어도 그 둘의 사랑은 진짜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하니, 적어도 지금 그 둘의 사랑을 부정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렇죠. 만약 당신이 하인이라면 그 사랑은 악취가 나는 쓰레기보다 더한 폐기물이자 난잡한 짐승의 짝짓기보다 야만적인 것일 테지만, 그러진 않을 테죠.”
“…할 말은 끝났습니까? 그렇다면 슬슬 체포를 하시죠.”
“뭘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어차피 당분간 카지노의 경영은 불가능할 테니 천천히 얘기나 좀 더 나눠도 되지 않습니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당신과는 할 말이 없습니다. 차라리 감옥에 들어가 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군요.”
컨델이 요하임을 바라봤다.
“여기의 책임자는 백작님이 아니십니까? 빨리 임무를 다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크 님, 이만 하시죠.”
요하임이 말하자 지크도 컨델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순순히 물러났다.
요하임이 병사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이 특수한 밧줄로 컨델을 묶고 양옆에서 팔짱을 꼈다. 이대로 이송만 하면 된다.
라일라가 지크에게 다가왔다.
“이번엔 정말 성깔 제대로 부렸네.”
“그렇게 보였어?”
“한스와 스녹도 조금 질린 표정인던데?”
“그래? 그 녀석들, 나름 교육을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순진하기 그지없군.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역시 예상대로 지크는 고작 이 정도 괴롭힘으로 컨델을 놔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증거를 찾을 자신이 있는 거야? 저렇게 순순히 따라나서는 걸 보면 정말 제대로 숨긴 모양인데.”
“물론이지.”
라일라는 일단 한시름 놓았다.
‘진짜 뭔가 방법이 있긴 한 모양이야.’
“어떤 증거야? 어디에 숨겨져 있는데?”
라일라가 가볍게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지크의 답은 충격적이었다.
“몰라.”
“…뭐?”
라일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증거를 찾을 자신이 있다며.”
“맞아.”
“그런데 어떤 증거인지, 어떻게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고?”
“응.”
터무니없는 답변이 너무도 가볍게 돌아온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곧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크를 쳐다봤다.
“무슨 꿍꿍이야? 빨리 불어.”
지팡이의 끝으로 지크의 명치를 꾹꾹 누른다. 정말로 사양이 없어졌다.
숨길 것도 아니다. 지크는 답했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거라면 아는 놈한테 맡기면 되는 거야.”
“…컨델 이시드가 숨긴 증거를 아는 놈?”
라일라의 머리에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렌 제너드!’
그러고 보니 그렌은 카지노에 들어왔을 때, 병사들과 같이 카지노를 뒤지겠다고 그들과 떨어졌다.
“게다가 그놈이 공적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놈이라면 효과는 더 좋지.”
사무실 밖 계단이 소란스러워졌다. 한 명의 병사가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백작님!”
“무슨 일이냐.”
요하임이 그 병사를 맞았다.
“카지노에서 이상한 통로를 찾았습니다! 비밀 통로 같은데, 상당히 깊게 파인 게 어디론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컨델에게 향했다. 그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워낙에 표정 변화가 없는 자였기에 혹시 그저 평소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는 분명 경악하고 있었다.
“오오, 그거 놀라운 발견이군요!”
지크가 호들갑을 떨며 병사에게 다가갔다.
“평범한 카지노에서 발견된 비밀 통로라. 무척 흥미가 가는 존재입니다. 아, 물론 이게 이시드 씨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아니겠죠.”
지크가 즐겁다는 듯 말한다.
“그럼요! 이시드 씨가 범인일 리 없잖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시드 씨는 자신의 사랑을 스스로 짓밟고 연인조차 부정한,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서 온갖 모독을 가한 쓰레기가 되는데요! 전 믿습니다! 이시드 씨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을요! 하지만 그렇다고 수상한 통로를 가만히 둘 수도 없죠.”
지크는 과장되게 컨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요하임을 보고 말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백작님! 지금 당장 그 통로를 조사하라고 말이죠.”
그리고 컨델을 쳐다본다. 턱은 들고 입꼬리는 한쪽만 올린 후, 비웃듯이 내려다봤다. 그 모습은, 싫다고 해도 컨델의 시야에 자동적으로 들어 왔다.
컨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후웅!
갑자기 컨델의 뒤에서 무언가 검은 물체가 뛰쳐나왔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지크가 윈두르를 휘둘렀다.
콰아앙!
커다란 칼 형태를 한 그림자가 지크의 윈두르에 막혔다.
“습격이다!”
“백작님을 보호해라!”
“녀석을 체포해!”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무기를 부여잡는다. 지크 일행도 바로 컨델을 향해 무기를 들었다.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군.”
지크가 입술을 핥았다. 컨델의 발밑에서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를 흘끗 봤다가 컨델과 시선을 맞췄다.
“이건 내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데 말이야. 눈앞에서 연인을 모욕하는 인간을 내버려 둬야 하는 기분은 어땠어? 자기 사랑이 철저하게 부정되는 기분은? 보통은 그런 건 못 참지 않아? 그것도 사랑의 도피를 할 정도로 사랑하는 사이에 말이야. 아, 그렇게 생각하면 새로운 의문이 드네.”
지크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녀, 정말로 사랑하긴 했어?”
뿌드득!
컨델이 이를 갈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